남대문이 타버리는 바람에 여기저기서 "국보 1호도 못 지키고..." 운운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문화재청이 국보1호라는 건 아무 의미가 없고, 그냥 관리번호를 붙인 것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입이 닳도록 떠들고 다녔는데 그런 선전이 아무 의미가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찌질 조선의 남대문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냐, 일본애들이 지들 좋으라고 붙여 놓은 이름이 남대문이다(남대문은 지어졌을 때부터 남대문이라고 불렸다. 숭례문과 남대문은 병칭된 이름이다), 심지어는 남대문은 일제가 지은 것이다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떠돕니다.
이런 이야기의 밑바탕에는 맹목적인 조선에 대한 증오가 끼어들어있습니다.
이런 증오심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흔히 미움도 관심의 일종이라는 말을 합니다. 맞는 이야기죠. 아예 관심이 없다면 조선에 대해서 뭐라 하건 신경 끄고 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 증오론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죠. 누구라도 조선에 대해서 애정을 표현한다고 생각하면 가서 한마디 해줘야 합니다. 못난이 조선을 옹호하지 말라고요. 증오가 극도에 달한 사람들인지라, 그냥 조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참지를 못합니다.
이런 증오는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저 위대하고 잘난, 세계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나라에 태어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저주가 조상에 대한 원망으로 발현되는 것이죠.
이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며 따라서 우리나라 역사라고 해서 이유없이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제게 익숙하고 제 능력으로 들여다보기 쉽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많이 하고 있을 뿐이죠. (네, 영어건 일어건 외국어는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그리고 잘 알게 될수록 그 대상에 대한 사랑도 깊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증오도 비슷해서, 일단 증오하게 되면 알면 알수록 더 증오하게 됩니다. 인간인 이상 이런 감정을 초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단 방향을 잡으면 마치 관성의 법칙 같은 것이 작용하는 법이죠. 그러다보면 팩트가 좀 틀리더라도 대의가 맞으면 된다는 사고도 나옵니다. 가령 일제가 20만권의 고서를 태운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줘도, 중요한 것은 일제가 뭔가를 태우려 했다는 사실이고 일제가 뭔가를 태우려 했다면 그게 고서가 아닐 이유도 없다는 식의 논리 비약이 쉽게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전통적인 세계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의 역사는 분명 세계사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환단고기] 신봉자들은 조선의 역사를 떠나 우리 역사가 세계사의 변방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기만과 조작을 가해서라도 세계사의 중심에 서려고 합니다. 그러나 명백한 것들을 다 조작할 수는 없기 때문에 증거가 없는 고대로 날아가 [환단고기]같은 위서를 만들어내고는 좋아라 하는 거죠. 그런 이유로 조선도 중국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정신없는 사람들은 그 세계에서도 욕먹기가 일쑤인 것입니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한국사가 일본사나 중국사에 비해 비중이 작게 언급되는 데에는 현재 한국의 위상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쳐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이야기를 해도, 조선 증오론자들에게는 오늘날 한국이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한 수 접히는 이유 자체가 조선이 찌질한 나라였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환원되어 버립니다.)
조선을 증오하는 사람들의 길은 결국은 똑같습니다. 자기 뿌리에 대한 혐오. 그것을 환상 속으로 들어가 위안을 삼으려는 사람들이 [환단고기] 신봉자들이죠. 그리고 다행히 [환단고기]까지는 가지 않는다 해도 조선에 대한 경멸을 표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은 사실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폴란드의 역사 같은 것은 알지 못하죠. 핀란드의 역사는 어떨까요? 가나의 역사는? 인도네시아의 역사는? 세계에는 200개 가까운 나라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사는 열 개 남짓한 나라뿐입니다.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이태리, 스페인, 미국 대개 이 정도죠. 이른바 세계 역사에 영향을 미친 나라들 몇 개 이외에는 별 관심도 없습니다. 사실 이들 역사도 뭔가를 안다고 할만큼 많이 알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이들 나라 외에는 한가지 역사를 더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자신이 미워하는 조선의 역사죠. 자신의 핏줄이기 때문에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더럽고 추하게 보이는 조선의 역사. 더럽고 추하다고 생각하니까 더 알아볼 필요도 느끼지 않죠. 어디선가 우연히 몇마디 듣게 되어도 그런 관점을 더 강화시킬 뿐입니다.
조선을 증오하는 사람들의 기준에서 볼 때, 조선처럼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라들은 많습니다. 거란이나 여진처럼 한때 강대했으나 이제는 사라진 나라들도 있고요. 조선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과연 그런 나라의 이야기에도 그와 같은 증오심을 드러낼지 궁금합니다. 사실 관심도 없을 겁니다. 누군가가 잘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이야기를 해주면 하하 웃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겠죠. 잘 모르는 그 나라의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어도 말이죠. 하지만 조선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버럭 화를 내면서 "나의 조선은 그렇지 않아!"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역사에서 작고 보잘 것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또 크고 위대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무척이나 큰 사람들입니다. "나"가 소중한만큼 "나"와 관계된 것이 하찮은 것임을 참을 수 없는 것이죠. "나"와 관계없는 듣보잡들이야 어찌 되었건 상관도 없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남의 말 잘 안 듣습니다. 감히 누구에게 충고를 하냐고 생각하죠. 그런데 "나"의 역사와 관련된 부분은 어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건 인간으로 태어난 운명이니까요. 따라서 "나"는 그것들을 경멸함으로써, 그것과 "나"의 차별화를 시도합니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지요. 그것들은 불태워 없어져야 할 헤라클레스의 인간적인 부분과 같은 것일 뿐이니까요. 그것을 모욕하고 더럽게 볼수록 그것과 자신은 다른 개체가 되고, 그만큼 더 "나"는 위대해지죠. 일부 망상주의자들의 "나"는 더 위대한, 세계의 운명을 뒤흔든 "민족의 후예"여야 하고요.
역사라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 역사는 그저 사람들이 살아간 날들의 기록입니다. 이 안에서 위대한 것도 볼 수 있고, 이 안에서 증오할 것도 볼 수 있죠. 이 안에서 영웅들을 만날 수 있는가 하면, 이 안에서 바보들도 만날 수 있습니다. 역사를 만들어낸 위인도 있고, 역사를 망친 흉악배도 볼 수 있죠. 크고 광활한 것이 있는가 하면, 작고 세밀한 것들도 있습니다. 역사는 역사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런 역사를 통해서 대체 무엇을 알아야 하는 것일까요? 역사가들은 무엇을 위해 연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 자신은 저 나름대로의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께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무엇을 오직 증오하기 위해서 역사책을 펼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