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 (3) - 일본서기의 생 제르맹 *..역........사..*



[于道朱君]님의 지적에 따라 전체 틀을 다시 잡습니다.

생 제르맹 백작. 불사의 삶을 산다는 전설적인 인물인데, [일본서기]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katura sotuhiko)과 목라근자木羅斤資가 그 주인공이다. 먼저 갈성습진언에 대해서 알아보자.

습진언이 처음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것은 신공황후 5년이다. [일본서기] 연대로는 205년이다. 괄호 안의 수치는 내가 추정하는 실제 연대다. 괄호가 없는 것은 연대를 비정하기 어려운 것이라 내버려 두었다.

신공황후 5년 / 205년(418년) - 미질허지(미사흔)을 빼돌린 후 모마리질지(박제상)이 거짓말을 고한 대상이 습진언이다. 습진언은 속은 것을 알고 모마리질지를 불태워 죽이고 신라를 공격해서 초라성草羅城(삽량군=박제상의 영지)을 함락시키고 돌아왔다.
신공황후 62년 / 262년(442년) - 습진언을 보내 신라를 공격했다.
응신천황 14년 / 283년 - 백제인 궁월군弓月君이 120현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왜로 오고자 했으나 신라의 방해로 가라에 머물러 있다고 했다. 천왕은 습진언을 보내 그들을 데려오게 했으나 습진언은 돌아오지 않았다.
응신천황 16년 / 285년 - 8월에 두 명의 장수를 더 보내 궁월군의 백성과 습진언을 데려오게 했다. 습진언이 돌아왔다. (이 시기의 일을 2갑자 내려서 403년에서 405년에 일어난 일로 본다면 광개토대왕의 원정 이후 백제와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도망친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인덕천황 41년 / 353년 - 3월에 백제에 사신을 보냈는데 백제왕족 주군酒君이 무례해서 사신이 화를 내자 백제왕이 주군을 쇠사슬에 묶은 뒤 습진언에게 넘겨 진상하게 했다. 주군은 달아나서 숨어 살았다.
이중천황 원년 / 400년 - 이중천황의 어머니는 습진언의 딸이다.(이때 이중천황의 나이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은데 64살로 추정할 수 있다. 습진언의 딸이 20살에 이중천황을 낳았다고 치면 315년생이 된다. 습진언이 그녀를 50살에 낳았다고 치면 그는 265년생이 된다. 하지만 그는 이미 262년에 신라를 공격했어야 한다. 205년에 인질 관리의 총책임자였다. 정말 생제르맹 백작?)
윤공천황 5년 / 416년 - 습진언의 손자 옥전숙례가 반정천황의 빈소를 관리하게 되었다. 그는 이 해에 천황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웅략천황 7년 / 463년 - 옥전숙례가 여기서는 아들로 나온다. 손녀 이야기가 나온다. 두 아들의 어머니인데 미색이 뛰어나 천황이 빼앗았다고 한다. 옥전숙례는 416년에 죽었으므로 그 해에 딸이 태어났다고 해도 이때는 47살이 된다. 상식적으로 이 나이의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남편을 죽이지는 않을 것 같다. 이 기사를 사실로 본다면 416년의 사건은 그 연대에 일어난 일일 수 없다. ([일본서기]도 이쯤 오면 연대를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습진언이 4세기 전반에 활동한 무장이라면 그의 손녀가 이 시기쯤 존재할 수 있다. 습진언이 아들을 410년에 낳고 그 아들이 440년에 딸을 낳았다면 딸은 이때 23세가 된다. 아이 둘을 낳을 수 있는 나이다. 그럼 습진언은 380년에서 440년대까지 활동한 인물이 된다. 만일 이 여자를 증손녀로 본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30년을 올려서 생각한다면 습진언은 아들을 380년에 낳았어야 한다. 이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 경우 습진언은 360년에서 420년 정도 살았던 인물로 생각하면 된다. 이 경우 신공62년(442년)의 사건에서 활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 나는 그 연도에 습진언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었으나 62년의 기록은 매우 정밀하므로- 아래에 그 기사를 요약해 놓았다- 저 사건 자체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62년 사건에서 습진언은 천황의 비난을 받고 사망한다. 따라서 옥전숙례는 아들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신공황후 62년의 사건에서 사지비궤(=습진언)의 누이가 천황에게 의중을 떠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어쩌면 습진언의 손녀가 의중을 떠보는 장면이었을지도 모른다.)

* 自重自愛님의 포스팅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초록불님 질문에 대한 대답 [클릭])
[일본서기]는 19대 윤공천황까지 7세기 唐의 의봉력(儀鳳曆)을 사용하고 20대 안강천황부터 5세기 중국 남조 宋의 원가력(元嘉曆)을 사용한다. 같은 역법을 쓰지 않고 454년(안강천황의 즉위년도로 추정되는 해)을 기준으로 서로 다른 역법을 쓴 이유는, 453년 이전의 기년을 조작하기 위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주류성, 2001), 181쪽~182쪽 요약)
즉 454년부터의 기년은 인정할 수 있기 때문에 위에 일어난 사건 즉 463년의 사건은 그 기록을 믿을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노파심에 덧붙인다면 기록에 대한 인정은 물론 연도에 대한 것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신공황후 62년의 사건은 [백제기]를 인용하여 다른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따로 살펴보자.

신라가 왜에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공황후는 장수 사지비궤沙至比跪(satihiko=습진언의 일어발음 sotuhiko와 극히 유사하므로 두 사람은 동일인이다.)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신라는 왜의 장수에게 미녀 2명을 보내는 미인계를 썼다. 사지비궤는 미녀를 받아들인 뒤 신라 공격은 포기하고 가라를 공격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은 버려두고 비잔틴을 공격하는 꼴을 보는 것 같네요.) 가라국왕 기본己本 한기는 아들 백구지百久至 등을 거느리고 백제로 도망쳤다. (이들이 백제로 도망친 이유는 자명하다. 공격 주체에게 항의하기 위함이다. 429년 백제에 의해 정벌됨으로써 이들은 이미 백제의 동맹국인 상태에서 백제군에 의해 공격을 받은 것이다.) 가라국왕의 누이 기전지旣殿至가 천황(신공황후가 아니다.)에게 하소연을 했고 천황은 목라근자를 보내(천황이 왜 백제 장수를 보냈을까요? 당연히 이 행동 주체가 백제인 것이죠.) 가라를 다시 세웠다. 사지비궤의 누이는 천황의 은총을 받은 적이 있어서 천황의 의중을 떠보았는데 천황의 진노가 확고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사지비궤는 석혈로 들어가 자결했다.

이 시기에 신라측 기록을 보면 왜의 공격은 드셌지만 백제와는 우호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것은 두가지를 시사한다. 사지비궤가 진짜 천황으로부터 신라 공격을 명받았다는 것, 즉 위 기사가 액면 그대로 사실일 가능성. 두번째는 천황 명의 신라 공격 자체는 존재하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 사지비궤는 단독으로 가라 공격에 나섰을 가능성이 있다. 왜의 국가 명을 받은 장수가 신라와 그런 거래를 했다는 기록은 믿기 어렵다. 나는 사지비궤가 신라의 사주를 받고 가라를 공격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429년 백제 영향력 아래 들어간 가야를 다시 신라 쪽으로 기울게 만들고자 한 시도였을 것이다. 즉 사지비궤는 왜와 백제 입장에서는 반역자였다.

사지비궤(=습진언)는 전형적인 일본 인명이라는 于道朱君님의 지적에 따라 좀더 생각할 여지가 늘어났다. 그가 백제 장군 목라근자와 더불어 가야 정벌에 종사한 것은 사실이고, 그후 그는 목라근자와 더불어 가야지방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그가 신라의 미인계에 넘어갔다는 것은 그의 집단이 용병적 성격을 가진 집단이었다는 뜻일까? 그의 후손들이 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 것도 분명한 것 같기 때문에, 그의 활약이 가문에 힘을 보탠 것으로 생각해야 하겠다.

습진언은 그 본인이 활동한 연대만 해도 205년에서 353년의 148년이나 된다. 205년에 스무살이었다고 해도 168년을 산 셈이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의 인용은 당연히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은 목라근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목라근자는 신공49년(429년)에 신라와 화친을 하고 가야의 여러 나라와 전남지방을 정복했다. 그와 같이 다닌 장군의 이름이 사사노궤沙沙奴跪(sasadoko)다. 아무리 봐도 신공62년(442년)에 등장하는 사지비궤와 동일인물인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于道朱君님의 말씀을 보니 둘이 동일인물일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응신천황 25년(294년)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한번 보자.

백제의 직지왕(전지왕)이 훙하였다. 그 아들 구이신이 왕이 되었다. 왕의 나이가 어려 목리만치木刕滿致가 국정을 잡았다. 왕모와 간음하여 무례한 일이 많았다. 천황이 듣고 불렀다. (백제기에 말했다.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그 나라의 부인을 얻어 낳았다. 아비의 공으로 임나를 맡았고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귀국(일본)과 왕래했다. 제도를 천조(일본)에서 배우고 우리나라 국정을 맡았다. 당세에 권세가 무거웠다. 천조가 그 흉포함을 듣고 부른 것이다.)

이 기록은 [일본서기] 상으로는 294년이지만 [삼국사기]를 따르면 420년이 된다. 126년이 차이가 난다. 대략 2갑자가 차이 나는 셈이지만, 문제는 목만치가 [삼국사기]에서는 475년에 등장하는 목협만치木劦滿致와 동일인물이 틀림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420년에 국정을 농단하던 목만치가 475년에 문주를 모시고 웅진으로 달아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3갑자를 내리면 어떻게 될까? 294년에 180년을 더하면 474년이 된다. 1년의 오차는 고대사서에서 흔한 일이다. 즉 직지왕이 훙한 사실과 목만치가 국정을 잡은 사건은 60년의 차이를 가진 기록이 그냥 들어가 있는 셈이다.

나는 목만치가 국정을 잡았다거나 어지럽혔다는 기록은 문주왕 때의 일이 아니고 그 뒤를 이은 삼근왕 때의 일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삼근왕은 13세에 왕이 되어 군사와 나라 일을 좌평 해구에게 맡겼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목만치에 대한 기록이 더 없긴 하지만 516년 기록에 목리불마갑배, 541년에 목리매순, 543년에 목리마나, 목리매순, 551년에 가야와 관련된 때에 목리금돈이 등장하고, 554년에 목리시덕 등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 목리 집안이 몰락하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다.

목만치는 삼근왕 때 국정을 가지고 좌평 해구와 겨뤘던 것은 아닐까?

여기서 잠깐, 대체 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일본서기]에 있는 기사가 이렇게 많이 빠진 것인지 궁금증을 풀어보지 않을 수 없겠다. 오만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신라본기에도 고구려가 신라에 영향을 미친 부분의 기사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임나와 관련된 부분도 그렇고, 백제본기에는 가야 관련 기사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신라에 흡수된 가야계는 자신들이 신라와 대항하거나 백제 편에 섰던 기록들이 남아있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삼국유사] 가락국기도 매우 빈약한 기록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 [삼국사기]에 기록된 가야와 신라 사이의 분쟁조차 삭제된 상태다. 신라 안에서 완전히 몰락한 석씨의 시조인 탈해를 찍어누른 기록만 남아있다.

이런 이유로 임나일본부에 대한 기록은 한국 내 사료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 것 같다. 거의란 말이 무색한 것이 한국 사료에는 임나일본부는 아예 존재하지 않고, 임나라는 말만 몇 군데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가야 정벌도 [삼국사기]에서 찾을 수 없다.

불행히도 이런 이유로 왜곡된 것이 분명한 사료 속에 남아있는 임나일본부를 추적하여 그 진실을 파악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이겠는가? 오만 억측이 구구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덧글

  • 于道朱君 2008/02/25 08:14 #

    沙至比跪(서기 훈 satihiko)는 백제인이 될 수 없습니다. "比跪(hiko:남자·彦)"라는 어미 자체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倭條의 "卑狗"에서부터 나타나는 전형적인 고유일본어이고, 이미 이나리야마(稻荷山)철검명에도 일본인명으로서 "意富比垝(ohohiko:大彦)"라는 표현이 나타나, 이를 더욱 강화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서기에 따라 葛城襲津彦(katura sotuhiko. 고사기의 曾都毗古)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沙沙奴跪(서기 훈 sasadoko. 大野晉 수정훈 sasanako)또한 "笹な子"로서, "笹の子(細竹의 아들)"라는 의미의 전형적인 일본인명입니다. 백제인이 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둘을 동일인물로 추정하는 데에는 대단히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대체로 서기에 나타나는 백제인명은 "一字 or 二字姓+二字名"이 전형적인 격식이며, "姓+三字名"은 매우 드문 케이스입니다.

    그리고 "百久之"라 쓰신 인명은 "百久至(서기 훈 hakukuti)"로, 인명의 어미에 붙는 "至(ti)"란 용자는 가라-신라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후 시기에는 知/智의 격식으로 나타납니다.
  • 마에스트로 2013/07/09 13:04 #

    물론 가쓰라기노 소츠히코와 사지비궤는 동일인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백제인이었다가 왜로 망명을 갔다고 볼 수는 없으련지요? 그러면 일본인으로 행세해도 크게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 초록불 2013/07/09 15:04 #

    于道朱君님은 이제 블로그를 운영하지 않으므로 답변하실 수 없을 것 같네요. (비로그인 댓글은 허용되어있지 않기도 하고요.)
  • 耿君 2008/02/25 09:06 #

    于道朱君님/ 혹시 至, 知/智의 인명 어미에 붙이는 용례에 대한 논문을 알고 계신지요?
  • 초록불 2008/02/25 09:16 #

    于道朱君님 / 지적 고맙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지비궤나 사사노궤 모두 2자+2자로 본 것이고 1자+3자로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이 이름들이 전형적인 일본인명이라고 하면 전체 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군요. 百久之는 졸다가 오타를 낸 모양입니다...^^;;
  • 초록불 2008/02/25 09:45 #

    于道朱君님의 지적에 따라 사건을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제 일정상 당분간은 여기서 더 진도를 나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 라디오 2008/02/25 09:46 #

    沙至比跪= 葛城襲津彦 으로 보고 있는뎁쇼.. 이 시기는 광개토왕 시절로서..
    400년 전후입니다.

    木劦滿致의 나이가 100살이상이 된 것은 일본서기 연대가 늘어났으므로.. 연대조정으로 나이를 세밀히 조정해야 할 것입니다.
  • 초록불 2008/02/25 09:49 #

    라디오님 / 수정한 내용으로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 라디오 2008/02/25 09:54 #

    葛城 襲津彦에서 葛城은 성이니까..

    沙至比跪(사치히코)= 襲津彦(????)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습진언의 음가를 까먹었어요.)
  • 초록불 2008/02/25 09:55 #

    라디오님 / 수정된 내용으로 보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라디오님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만, 제가 혼란스러워 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다면 트랙백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 초록불 2008/02/25 10:07 #

    트랙백에 대해서는 이글루스 도움말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성인들만 이용하는 이 블로그 사이트에 왜 재야로 기울어진 분들만 한결같이 트랙백을 몰라요, 라고 이야기하는지 저는 늘 궁금합니다.

    http://help.egloos.com/182

    다음 주소로 가보시기 바랍니다.
  • 초록불 2008/02/25 10:32 #

    라디오님 / 세번째 말씀드리지만 수정된 내용을 보세요. 이건 벽에다 말하는 것도 아니고...
  • 라디오 2008/02/25 10:40 #

    仁德朝 (인덕조) 즉위:379년, 己卯(기묘)

    ○遣葛城襲津彦於新羅(蓋爲四年 壬午歲) 嘖其缺貢 而新羅不順 百濟多詐 襲津彦留不還
    <按> 이하 생략

    葛城襲津彦(갈성습진언)을 신라로 보냈다.(인덕 즉위 4년 임오년; 382년) 조공을 빼먹으므로 책망하였으나, 신라는 불순하였다. 백제는 속임수가 많았다. 襲津彦(습진언)은 머무르며 돌아오지 않았다.

    『日本書紀』卷九 神功皇后攝政 六二年(庚午 二五〇)二月◆六十二年。新羅不朝。卽年遣襲津彦擊新羅。〈百濟記云。壬午年。新羅不奉貴國。貴國遣沙至比跪令討之。新羅人莊飾美女二人。迎誘於津。沙至比跪受其美女。反伐加羅國。加羅國王己本旱岐。及兒百久至。阿首至。國沙利。伊羅麻酒。爾汶至等。將其人民。來奔百濟。百濟厚遇之。加羅國王妹旣殿至。向大倭啓云。天皇遣沙至比跪。以討新羅。而繩新羅美女捨而不討。反滅我國。兄弟人民皆爲流沈。不任憂思。故以來啓。天皇大怒。旣遣木羅斤資。領兵衆來集加羅。復其社稷。一云。沙至比跪知天皇怒。不敢公還。乃自竄伏。其妹有幸於皇宮者。比跪密遣使人間天皇怒解不。妹乃託夢言。今夜夢。見沙至比跪。天皇大怒云。比跪何敢來。妹以皇言報之。比跪知不免。入石穴而死也。〉

    *沙至比跪(사치히코)= 襲津彦

    신공황후 62년, 일본서기 기년 250년, 132년 하향 조정해서 382년. 壬午年은 382년.
    --------------------------------------------------------------------------------
    ○詔遣紀角宿禰 羽田矢田宿禰 石川宿禰 木兎宿禰 嘖讓百濟背盟 且援襲津彦伐新羅 百濟卽殺王辰斯謝罪 新羅王樓寒亦服命 四將乃班師 是歲(晉 大元 十六年 辛卯) 高麗王 安殂 談德(永樂大王)立
    <補> 이하 생략

    조서를 내려, 紀角宿禰(기각숙니), 羽田矢田宿禰(우전시전숙니), 石川宿禰(석천숙니),木兎宿禰(목도(토)숙니)를 보내었다. 백제가 동맹을 배신함을 책망하였다. 또한 襲津彦(습진언)을 도와 신라를 벌하였다. 백제는 즉시 辰斯王(진사왕)을 죽여 사죄를 하였다. 신라왕 樓寒(루한) 역시 명령에 복종하였다. 4명의 장군은 곧 군사를 돌렸다. 이 해(진 태원 16년 신묘년; 391년), 고구려왕 安(안)이 죽고, 담덕(영락대왕)이 즉위하였다.

    (日本書紀
    三年 是歲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 故遣紀角宿禰 羽田矢代宿禰 石川宿禰 木菟宿禰 嘖讓其无禮狀 由是 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禰等便立阿花爲王而歸.

    응신천황 3년 (A.D 392년) 이 해, 백제의 진사왕(辰斯王)이 귀국(貴國)의 천황에게 무례(無禮)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니(紀角宿禰), 우전시대숙니(羽田矢代宿禰), 석천숙니(石川宿禰), 목도숙니(木菟宿禰)를 보내어 그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등은 아화(阿花:아신왕)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일본서기) )
  • 초록불 2008/02/25 11:05 #

    라디오님 / 인용하신 것은 또 박창화의 소설입니까? 왜 재야사에 빠지신 분들은 출전을 달 줄 모르시는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런 이야기는 본인의 블로그에 쓰시기 바랍니다. 제게 알려주고 싶다면 트랙백을 하시고요. 저는 제 블로그를 재야사가의 선전장으로 이용하는 것을 두고보지 않습니다.
  • 라디오 2008/02/25 11:07 #

    이것은 팔린통빙고 인덕조입니다. 박창화랑은 무관합니다.
  • 라디오 2008/02/25 11:10 #

    기계적으로 120년 하향조정만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실례했다면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 초록불 2008/02/25 11:17 #

    라디오님 / 쯧쯧... 權藤成卿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팔린통빙고]를 껴안고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http://hyunk02.egloos.com/tag/權藤成卿

    1930년대에 나온 책을 가지고 뭘 하자는 겁니까?
  • 초록불 2008/02/25 11:18 #

    라디오님 / 도무지 글을 읽었는지 알 수가 없는 분이군요. 기계적인 120년 하향조정이 제 글 어디에 있는지요? 정말 재야사에 빠진 분들은 읽고 싶은 것만 보는 편한 눈을 가지고 계시네요.
  • JuRo 2008/02/25 11:31 #

    라디오님/ 학문에도 "고수"가 있습니까?
    아님 인터넷에 "올리는" "고수"를 말하는 것입니까?
    계속 보다가 황당한 개념을 가지고 계신것 같아서 참지못해 글올려봅니다.
  • 이집터 2008/02/25 11:38 #

    신공기의 기년을 일률적으로 이주갑만 인하하면 안 된다는 거야 70년대 井上秀雄이 논한적도 있는 대단히 고전적이고 당연한 이야기인데, 라디오님은 마치 새로운 이야기라도 되는 양 이야기하고 계시는군요. 기존 학자들은 눈이 폼으로 달린 줄 아십니까? 그 정도도 모르게? 그럼에도 《백제기》와 같은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삼서의 성격문제도 걸려있기 때문에, 고수고 나발이고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공기의 기년이 이주갑 내지 삼주갑 인상된 원인은, 신공을 억지로 위지 동이전의 비미호에 비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공이 이렇게 중요시된 까닭은, 야마토정권의 足/帶(tarasi)라는 왕통(수서 동이전 "多利思比孤")의 개창자로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개창자의 시대에 고대 일본의 영웅적 인물들, 씨족의 조상들이 가탁되어 섞인 결과가 신공기의 어지러운 기년이지요.

    논문이나 읽고 오세요.
  • 한단인 2008/02/25 12:48 #

    와..초록불님. 라디오가 여기까지 와서 행패로군요. 그냥 접근 금지하는게 어떠실지.. (어떻게 보면 저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듯 싶은데..)

    고소를 안할까 싶었는데..이쯤되니 정말 막장 같네요. 정말 고소를 해야겠어요. 주변 민폐가 장난이 아니네요.
  • 초록불 2008/02/25 13:48 #

    한단인님 / 하하, 좀더 두고보도록 하겠습니다.
  • 부여연 2008/02/25 14:54 #

    라디오님 왜 여기까지 오셔서 행패이십니까....
  • 自重自愛 2008/02/25 17:19 #

    질문이 있는데 제가 본 다른 책에서는 木刕滿致를 "목협만치"라고 읽고 있어서요.....
  • 초록불 2008/02/25 17:39 #

    自重自愛님 / 삼국사기에는 목협만치로 나옵니다. 글자를 자세히 보세요. 삼국사기의 글자는 劦자로 힘력力자 3개가 모인 것이고 일본서기의 글자는 刕로 칼도刀자가 3개 모인 것입니다. 일본서기에서 목리만치의 아버지가 목라근자로 목리/목라는 같은 ㄹ계통의 글자로 "협"이 아니라 "리"가 맞는 글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국내 판본 중에도 刕로 되어 있는 것이 있다는 말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 自重自愛 2008/02/25 17:53 #

    감사합니다!!! (아직도 공부가 부족하구나..... -_-;;;;)
  • 自重自愛 2008/02/26 23:47 #

    트랙백했습니다.
  • 나루나루 2008/05/07 14:22 #

    라디오 횽아 襲しゅう津つsyuutu가 어떻게 さちsati로 음운변화 되었는지만 설명해주면 되겠네효.

    증거 있으신지? 잉카 = 인가국 수준 얘기는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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