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 그 친일 행각 *..역........사..*



3.1절 특집 포스팅입니다. 좀 길겠네요. 중요한 사실만 정리했는데도 제법 내용이 깁니다.

이완용李完用은 나라를 망하게 한 3개의 조약에 서명을 한 사람입니다. 을사보호조약,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한일합병조약이 그것이죠.

최근에는 이완용이 사실은 충신이며, 그는 대한제국의 황실에 충성했을 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도 인터넷에 떠돌더군요. 상식적으로 충신이라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게 하는 것이지, 나라를 버리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런 어이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완용이 황실 가족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나라를 버리게 했을 뿐이라는 논리로, 이완용이 충신이었다고 하죠.

그리고 그를 위해서 이완용이 일본 측과 열심히 협상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런 주장이 사실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을사조약의 내막을 알아보죠.

1905년 11월 9일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루부미) 서울 도착.
              10일 덕수궁 수옥헌에서 고종 알현
              15일 3시 30분 외교 절차 무시하고 고종에게 외교권을 넘기라고 통보

고종은 외교권을 가져가도 좋지만 형식적으로나마 대한제국에 외교권이 있는 걸로 해달라고 이등박문에게 통사정하지만 이등박문은 오히려 위협으로 일관함. 결국 고종은 내각으로 이 문제를 넘겨버립니다.

               16일 4시 이등박문은 대한제국의 각료와 원로대신들을 자신의 숙소인 손탁 호텔로 부름.
                                 이등박문의 호출에 의해
                                 참정대신 한규설
                                 내부대신 이지용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군부대신 이근택
                                 탁지부대신 민영기
                                 원로대신 심상훈 참석

이등박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가 한국 대신들에게 일한협약 문제를 제의했을 때, 그들 가운데 감히 의견을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당시 학부대신이던 이완용이 나서서 '오늘의 동아시아 형세를 살펴볼 때 대사의 제안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협약이 성취되기에 이르렀다."

이완용은 이때 이등박문을 처음 만나 그가 죽은 1909년 10월 26일까지 충성을 다 바쳤습니다.

"이등박문 공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죽은 뒤,

세상 일을 개탄하며 희망을 잃은 사람처럼 속히 이등박문을 따라 죽지 못함을 한탄하고 슬퍼했다고 합니다. 그는 고종이 죽었을 때도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손탁 호텔에서 한규설만이 고종처럼 외교에 대해서 형식만이라도 유지하게 해달라고 애원했으나 이등박문은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이날 일본측 공관에서는 일본 공사 임권조林權助(하야시 곤스케)와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이 을사보호조약의 내용을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17일 오전 11시 이등박문의 지시에 따라 한국대신 8명은 일본공사관에 집결했습니다. 일본 공사 측은 조약 체결을 강행하고자 했으나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반발이 있자, 오후 3시 한국대신들을 거느리고 덕수궁으로 향했다. 고종은 일본공사 임권조를 내보내고 대신들과 어전회의를 열었습니다.

이완용은 일본의 입장이 확고하니 할 수 없이 조약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데, 조항 중 일부는 수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고종을 설득합니다. 이런 이완용의 노력으로 결국 조약이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물론 이완용이 아니더라도 을사보호조약을 막아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완용이 잘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죠.

이때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말합니다.

"신이 외부에서 얻어본 일본 황제의 친서 부분에는 우리 황실의 안녕과 존엄에 조금도 손상을 주지 말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번 조약 조문에는 여기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것도 응당 따로 한 조항을 만들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권중현의 말은 고종에게 만족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후의 일은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이등박문은 오후 8시 대궐 안팎을 일본군으로 포위하고 한국 대신들을 불러 하나씩 조약 체결에 대한 가부를 물었습니다.

참정대신 한규설은 반대, 외부대신 박제순은 찬성,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반대, 법부대신 이하영은 반대하였으나 이등박문은 그를 찬성으로 분류했고 학부대신 이완용은 적극 찬성, 권중현, 이근택, 이지용은 모두 찬성을 표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찬성한 다섯 대신을 우리는 을사오적이라고 부릅니다.

이완용은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넣고 싶어했으나 이등박문은 허락해주지 않았습니다. 이완용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이 그가 황실을 걱정해서일까요? 조약 체결까지는 불과 다섯 시간. 이완용이 적극적으로 주장했다거나 강경한 자세를 가졌다고 말할 건덕지가 없습니다. 그냥 이야기 한번 해보고 안 된다고 하자, 그럼 말죠라고 이야기한 수준인 것이죠. 권중현이 주장한 황실을 보호한다는 조항은 제5조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조약 체결이 끝난 것은 자정을 지난 11월 18일 오전 1시였습니다.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에 앞장 선 이완용은 황실의 보호를 위해 뭔가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은 권중현이 했군요. 이완용은 그저 이등박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충성의 대가를 곧 받게 됩니다.

1906년 3월 2일 1대 통감으로 이등박문이 부임합니다. 이등박문은 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대쥬신론을 주창하시는 김운회 교수가 존경하는 폐원탄幣原坦(시데하라 히로시) 같은 학부 안에 포진한 일본인들은 이 방침에 적극 찬성하지요.

공교육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겠다는 방침은 당연히 반발에 부딪칩니다. 그러나 우리의 용맹하신 학부대신 이완용은 일본어를 가장 중요한 학과목으로 만들고 주당 수업시간도 가장 많이 배정하는 용단을 내리십니다. 일본인들은 이완용 사후, 이 결단이야말로 훌륭한 것이고 이완용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칭송할 정도였습니다.

이등박문은 고종이 고분고분하지 않자, 그를 퇴위시키고자 합니다. 물러난 한규설 대신 참정대신의 자리에 오른 박제순은 이런 이등박문의 움직임에 호응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등박문은 박제순을 물러나게 하고 자신의 오른팔인 이완용을 참정대신의 자리에 올립니다.

1907년 5월 22일 이토가 추천하고 망설이던 고종은 결국 5월 23일 이완용을 참정대신으로 임명합니다.

1907년 7월 1일 헤이그 밀사 사건이 국내에 알려집니다. 7월 3일 오후 이등박문은 이완용을 불러 질책하고 궁으로 들어가 고종을 추궁하게 되지요. 이완용은 이 일을 무마하기 위해 고종을 퇴위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그날 밤 이완용은 고종을 단독면담해서 양위하라고 말합니다. 고종은 화를 내고 이완용을 물리칩니다.

그러나 이완용은 7월 6일 내각회의를 소집하고 대신들을 이끌고 어전으로 나아가 양위하라고 다시 상주합니다.

고종의 거듭된 양위 거부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완용은 7월 16일 또다시 양위를 상주합니다. 다시 17일에도 양위를 거듭 상주합니다.

18일 고종은 이등박문을 불러 양위에 대한 이등박문의 의견을 묻습니다. 결국 이완용은 허수아비라는 것을 간파한 고종이 이완용을 제치고 이등박문과 직접 담판을 지으려 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등박문은 그것은 자기가 할 말이 아니라고 끝까지 이완용에게 이 일을 미뤄놓습니다.

이날 밤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은 고종에게 일본 천황이나 일본군 사령관에게 가서 사과하라고 고종을 윽박질렀으며, 이완용은 황실의 안위를 위해 양위해야 한다고 은근한 협박을 했습니다. 고종은 원로대신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으나 이들도 양위 밖에 길이 없다고 고종을 압박했습니다. 결국 고종은 자정을 넘긴 19일 새벽 1시에 황태자에게 황제대리를 명한다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고종은 양위가 아니라 황제대리를 명하였으나 이미 고종의 뜻대로 돌아가는 조정이 아니었지요.

이완용은 19일 바로 황제대리의식을 치렀습니다. 본래 이 일을 주관해야 하는 궁내부대신 박영효는 이런 일을 하기 싫어서 궁에 나오지 않았지요. 그러자 다음날 이완용은 자신을 궁내부대신 서리로 임명한 뒤, 황제대리의식을 집행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 소식에 분개한 백성들이 이완용의 집을 불살라 버렸을 정도입니다. 대체 이 지경인데, 이완용이 황실에는 충신이었다는 말이 어찌 가당키나 한 것인지 모르겠군요.

7월 20일 일본 천황은 황태자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전보를 보내서 황태자가 대리청정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가 된 것이라고 말해버렸습니다. 이완용이 어찌 가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완용은 7월 22일 황제라고 부르자는 상주를 해서 황태자를 황제로 확정해 버립니다. 이이가 바로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입니다.

껄끄러웠던 고종을 완전히 내친 이등박문은 7월 23일 이완용을 불러다가 내정까지 모두 통감의 지휘를 받는다는 내용의 조약을 내밀었습니다. 정미7조약, 한일신협약이라 불리는 이 조약이 7월 24일 체결되었습니다. 협상이고 나발이고 있지 않았음은 물로 자구의 수정조차 없었습니다. 황실의 안위에 대한 내용이 있던 을사보호조약과는 달리 그런 내용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이완용이 황실을 위해 무슨 협상을 벌이고 노력을 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완용이 장악한 내각에서는 일사불란하게 이 일이 처리되어 아무 잡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때가 더 시끄러웠던 것이죠.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습니다. 철저히 준비를 해서 무기를 빼앗은 상태에서 군대 해산이 선언되었죠. 그러나 시위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이 해산에 항의하여 권총 자살을 하고 1대대 병사들이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한 뒤 일본군과 충돌했습니다. 제2연대 2대대 병사들도 공격에 합류했습니다.

남대문을 중심으로 펼쳐진 전투는 패배로 끝났습니다. 이미 그 전날 폭동 진압 준비를 마친 일본군에게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죠. 대한제국군은 200여명이 전사했고, 일본군도 100여명이 전사했습니다.

해산된 대한제국군은 의병 운동에 합류하게 되고, 이완용은 이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헌병보조원에 한국인을 채용하여 이이제이로 의병을 물리치자는 제안을 합니다. 1910년부터 1919년에 이어지는 헌병무단정치의 기초는 이완용에 의해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이등박문은 이처럼 열과 성을 다해 자신과 일본 정부에 충성을 다하는 이완용에게 욱일동화장이라는 훈장을 내려 격려합니다. 또한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태극훈장을 내려 공로를 치하하게 하죠.

순종은 11월 19일 이등박문을 황태자(영친왕 이은)의 태사로, 11월 22일에는 이완용을 황태자의 소사로 임명해서 이 두 사람을 극진히 대접하고 있죠.

이완용은 한국인으로서는 무소불위의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내각을 자기 친인척으로 채워넣고 황태자 책봉 문제 같은 것에도 개입해서 한 밑천을 챙기고 있습니다.

궁내부대신 이윤용은 이완용의 형이고,
탁지부대신 임선준은 사돈,
승녕부 총관(고종의 비서실장) 조민희는 처남,
승녕부 시종 이항구는 아들이었습니다.

1909년 이등박문은 통감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이때 이등박문과 이완용은 또 한 건, 대한제국을 무너뜨릴 공작을 하게 되지요. 사법권까지 일본에게 넘기게 됩니다.

1909년 7월 10일 송별연회가 끝난 후 이등박문은 이완용을 불러 사법권을 넘기라고 말합니다. 이완용은 11일에 자기 집으로 대신들을 불러 이등박문의 지시에 대해 논의합니다.

이때 탁지부대신 임선준, 학부대신 이재곤, 법부대신 고영희는 반대를 표하고 내각총사퇴를 결의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병무는 입장을 모호하게 발언했을 뿐이었고,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은 내각총사퇴를 하는 것은 사태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는 얼빠진 발언을 했습니다.

              12일 다시 회의가 열렸는데, 결국 반대로 결정이 나고 내각총사퇴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일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완용은 13일, 2대 통감인 증미황조曾彌荒助(소네 아라스케)와 단독으로 사법권 위임 각서에 서명합니다. 날짜도 하루 전인 7월 12일로 합니다. 그리고 대신들에게는 사법권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회의를 열지 않는다고 통보까지 하지요.


1909년 10월 26일 이등박문은 만주 하얼빈哈爾濱 역에서 안중근에게 사살됩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한국 병합 문제는 초미의 문제로 대두됩니다. 1909년 7월 6일에는 한국 병합안이 일본 내각에서 통과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1909년 12월 4일 친일단체인 일진회는 한일합방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이들은 이대로가면 한국은 일본의 종이 될 것이니, 그 전에 일본과 동등한 자격을 가질 수 있도록 합방을 하는 것이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합방안은 이완용이 체결한 합병안보다 한국에 훨씬 유리한 것이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완용은 이 합방운동에 반대했습니다. 그가 대한제국 시절 유일하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행동이 일진회의 합방을 반대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당시 백성들은 이완용이 합방의 공을 일진회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반대한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12월 22일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칼로 찔렀습니다. 이재명은 그가 겉으로는 합방을 반대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주도하여 합방코자 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그를 처단코자 한 것입니다. 이완용은 중태였지만 악운이 길어 살아남았습니다. 1910년 2월 14일 퇴원했고, 23세의 청년 이재명은 5월 18일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재명은 합병 후 9월 13일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1910년 5월 30일 2대 통감 증미황조가 물러나고 3대 통감 사내정의寺內正毅(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취임했습니다. 그는 일본 군부내 강경파로 그가 통감이 된 것은 한국을 병합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셈이었습니다. 이완용은 등청하지 않는 상태였으나 여전히 내각총리대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사내정의는 군부 출신답게 의논같은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방적으로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회수한다고 통보했고, 무력한 내각은 6월 23일 그냥 경찰권을 넘겨주었습니다. 사내정의는 아직 한국에 입국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리고 이완용은 7월에 드디어 요양을 마치고 상경했습니다.


사내정의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7월 23일이었습니다. 그는 왜 이렇게 늦게 부임한 것일까요? 그것은 한국 병합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을 만들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7월 25일 태황제 고종과 순종을 알현하는 것으로 공식 임무를 시작했습니다.

사내정의는 한국에 오기 전에 한 사내를 만나 합병에 대한 조언을 들었습니다. 군부 실세인 사내정의에게 충고를 한 사나이. 그는 흑룡회의 내전양평內田良平(우치다 료헤이 1874~1937 : 이 작자는 친일파 최동을 만나 망상재야사학의 뿌리를 만든 인간이기도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최동에 관한 글 한 편 [클릭] 참조)이었습니다.

내전양평은 합병을 위해서는 한국 내각의 찬성이 있어야 하고 반대가 나오지 않게 잘 조치해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그는 일진회의 고문이기도 해서 한국 사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10년 8월 4일 이완용은 일진회의 합방 청원을 반대했던 일은 까맣게 잊은 듯이 자신의 비서 이인직(혈의누 작가)을 통감부 외사국장 소송록小松綠(고마쓰 미도리)에게 보내 합병을 제의했습니다. 일본이 아직 말도 꺼내기 전에 선수를 친 것입니다. 이완용이 이렇게 한 것은 선수를 치지 않았다가는 송병준이 자기 자리를 차고 올라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내정의 입장에서는 누가 총리대신이건 상관이 없었으니까요.

소송록도 놀란 모양이었습니다. 그는 후일 "그물도 치지 않았는데 물고기가 뛰어들었다"라고 그 일을 설명했습니다. 일본은 합병조약문 작성에 들어갔습니다.

         8월 16일 이완용은 일본에서 일어난 수재를 위로한다는 핑계를 대고 통역으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을 데리고 통감부에 방문했습니다. 여기서 합병조약문이 이완용에게 건네졌습니다.

이완용은 합병조약문에서 두 가지 부분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황제에게 왕 칭호를 허용할 것과 국칭을 조선으로 바꾸지 말고 한국으로 쓰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내정의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회담은 한 시간 만에 끝났습니다. 이완용은 일단 물러났다가 그날밤 조중응을 다시 보내 왕 칭호와 국칭 한국은 절대 양보할 수 없고, 이를 무시하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내정의는 국호 문제는 자기 권한이 아니라고 말한 뒤, 황제를 이왕 전하, 태황제를 이태왕 전하로 칭하는 정도는 허락한다고 답했죠. 이로써 협상도 끝났습니다. 이완용의 이런 술책은 일본에게 있어서 양보 못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반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황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완용은 그 틈새를 노려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킨 것 뿐이었죠.

         8월 18일 한일합병조약이 내각에 상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겼습니다. 학부대신 이용직이 반대한 것입니다. 이용직의 반대로 조약은 내각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완용은 당황했습니다. 

         8월 19일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시종원경 윤덕영(규원사화 출처로 의심받는 인물로 황후의 백부)을 불러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두 사람이 주저하자 이완용은 사내정의에게 일러바쳐 이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반대파인 이용직은 일본 수해 위문사절로 만들어 동경으로 보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용직은 이완용이 자신을 보낸 뒤 합병안을 처리하려는 속셈인 줄 알고 병을 핑계로 삼아 동경으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내정의는 8월 21일 민병석과 윤덕영을 불러서 회유와 협박을 가했습니다. 이들은 쉽사리 굴복했습니다. 그날 밤 이완용은 순종을 찾아가 윤허를 받았습니다. 이어 이완용은 덕수궁으로 가 고종을 만났다. 이완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 등이 지금 합방 토의를 배척한다 하여도 송병준과 일진회 일당이 내각을 조직하여 신들을 대신하여 이 일을 단행할 것이 자명하니 폐하께서는 대세를 살펴 신의 말을 용납하소서."

불과 몇 달 전에 합방을 반대하던 이완용이 합병안을 들고 나타났으니 고종으로서는 참담하고 놀라운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윤허한 고종은 이완용이 물러가자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앞서 일진회가 합방을 제의했을 때 신 등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매국의 거사는 하지 않겠다고 강개격월한 말을 한 것이 바로 이완용 아니더냐! 그렇거늘 그가 무슨 낯으로 짐을 본단 말인가!"

다음날, 8월 22일 오후 1시 합병안을 놓고 어전회의가 열렸습니다. 학부대신 이용직에게는 이 사실을 통보하지 않고, 심복을 보내 주의를 돌려놓았습니다. 아무 반대없이 일사천리로 합병안을 처리한 이완용은 오후 4시 사내정의를 만나 합병안을 체결했습니다. (합병안 전문은
일본국과 대한제국의 합병조약문 [클릭]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합병조약 사실은 일주일간 발표를 유보했다가 8월 29일에 대내외에 공표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8월 29일을 국치일이라고 부르죠. 이때 이완용의 나이 52, 나라를 팔아먹었습니다.


그는 백작 작위를 받았고 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됐습니다.

1911년 10월 28일에는 일본의 명치(메이지)천황을 알현하기도 했죠. 1912년 7월 30일 명치가 죽었을 때 일본에 건너가 있다가 조선귀족대표로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이런 공로 덕분인지 그는 8월 12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됩니다. 식민지 조선인으로는 최고의 관직에 오른 것입니다. 이완용은 죽을 때까지 15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킵니다.

그는 한국인이 영원히 일본인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손자를 일본 유학에 보내면서 "75년 후에는 이씨 성을 가진 일본 총리가 나올 것"이라는 같잖은 예언도 하지요.

고종이 죽고 3.1운동이 일어납니다. 3.1운동 때 거사 주체들이 이완용에게 참여를 권유했으나 이완용이 자신은 이미 매국노로 찍혀서 이를 거부했지만 당국에 신고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출전이 어딘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있었다고는 별로 생각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이완용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맹렬한 비난을 가합니다.

4월 5일 매일신보에 [황당한 유언에 미혹치 말라]는 경고문을 발표합니다. 사리를 분별치 못하는 천박한 이들의 선동에 넘어가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4월 7일에도 협박성이 가득한 경고문 [돌이켜 자신을 구하고 다복을 구하라]는 글을 발표합니다. 그는 3.1운동이 가라앉고 있던 5월 29일에 또 글을 발표해서 조선 독립은 허망한 꿈이며 총독 정치 아래 복지가 증대했고 지금은 실력양성에 힘쓸 때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은 이완용은 후작으로 작위가 올라갔습니다. 1924년에는 아들도 남작 작위를 받아서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부자 귀족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완용의 재산은 300만원 이상이었는데, 조선에서는 민영휘 다음 가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물려받은 재산이 거의 없으므로, 그 재산은 모두 벼슬살이를 하면서 축재한 결과인 것입니다. 이완용은 한국인답게 돈이 생기면 땅에 묻었다고 합니다. 그는 집도 여러번 옮기면서 집투기도 했다는 혐의가 있습니다. 그는 부동산 투기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68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한 임종을 맞았다고 합니다. 이런 욕 나올 일이... 그러나 그가 죽자 모두들 통쾌해 했던 모양입니다. 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에는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 하에,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살아서 누린 것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이제부터 받을 일이 진실로 기막히지 아니하랴. 문서는 헛것을 하였지마는 그 괴로운 갚음은 영원한 진실임을 오늘 이 마당에서야 깨닫지 못하였으랴. 어허, 부둥켰던 그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았지. 앙탈하던 이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라는 기사가 실려있지 않겠습니까!

살펴본 바와 같이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 조선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부자로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조선인으로는 최고의 지위에 올라섰고 오만가지 단체의 장을 역임했지요. 그가 황실에 대해서 해준 일이라고는 왕이라는 칭호를 유지시켜준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사실 일본 측에서는 한국인의 반발을 의식해서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지요.

그는 일본어 교육을 도입하고 사법권을 대신들을 속여가면서 일본에 넘겨주었고, 을사보호조약, 한일신협약 등을 맺을 때 아무 주의주장도 없이 이등박문이 내미는 대로 날인한 인물입니다. 거기에 자기 안전을 위해 나라를 파는 일에 앞장 서고, 반대하는 대신을 속여서 한일합방을 성사시키죠. 또한 부정축재를 하고 3.1운동을 폄하하고 일제에 충성하여 작위도 올라가죠.

이완용만 나쁜 놈이 아니다, 이런 주장도 있습니다. 그렇겠죠. 이완용만 나쁜 놈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완용이 나쁜 놈이 아니다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더군요.

긴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3.1절에는 이런 글 하나쯤 인정상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써봤습니다.
더불어 민족대표 48인 [클릭] - 예전 포스팅이지만 안 보신 분들은 꼭 읽고 가세요. (꾸벅)

이완용에 대한 연작 포스팅
일본국과 대한제국의 합병조약문
이완용 - 그 친일 행각 - 본 포스팅
이완용, 종묘에 모셔지다?
이완용, 그의 재산과 치부

이 문제에 대한 어떤 역사크랙폿의 이완용 옹호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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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쟈쟈는 대여용이 아닙니다(....) : 도덕적이지 않아도 유능하기만 하면 오케이? 2008-03-01 21:57:06 #

    ... 미루어 짐작되지 않습니까?-화신뿐만 아니고 대부분의 간신역적모리배중에서 지적인 부분이 부족해서 모리배질을 했던 놈은 없습니다. 유명한 이완용(개새끼)의 경우는 http://orumi.egloos.com/3641250 를 참조하시면 유능한데 개념은 시궁창에다 팔아처먹은 전형을 볼수가 있지요 요즘 이완용 충신론까지 돈다는데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_-;-도덕 ... more

  • 초록불의 잡학다식 : 이완용 옹호라는, ㄱ과 ㄴ도 구분 못하는 글 2008-03-07 10:16:13 #

    ... 않는다. - 이완용이라는 특정인물에게 뒤집어씌워야 조선이 비정상국가였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기 때문에 그랬다. 그런데 GREENBAUM이 문제로 삼는 제 포스팅 이완용 - 그 친일 행각 [클릭]은 포스팅 제목 그대로 "이완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포스팅이지, "대한제국의 멸망", "조선왕실의 친일"과 같은 제목의 글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 ... more

  • 초록불의 잡학다식 : 일본국과 대한제국의 합병조약문 2008-03-09 11:22:45 #

    ... 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갑자기 망해도 싸다는 생각이 들어버렸습니다...-_-;; 이완용에 대한 연작 포스팅 일본국과 대한제국의 합병조약문 - 본 포스팅 이완용 - 그 친일 행각 이완용, 종묘에 모셔지다? 이완용, 그의 재산과 치부 ... more

  • 초록불의 잡학다식 : 이완용 - 그 친일 행각 2008-03-09 11:24:02 #

    ... 써봤습니다. 더불어 민족대표 48인 [클릭] - 예전 포스팅이지만 안 보신 분들은 꼭 읽고 가세요. (꾸벅) 이완용에 대한 연작 포스팅 일본국과 대한제국의 합병조약문 이완용 - 그 친일 행각 - 본 포스팅 이완용, 종묘에 모셔지다? 이완용, 그의 재산과 치부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http://bloggernews.media.da ... more

  • 초록불의 잡학다식 : 이완용, 종묘에 모셔지다? 2008-03-09 11:24:39 #

    ... 되거나 하는 사람은 있지만 우리가 뚜렷하게 친일파라고 인식할 사람은 없다. 이 점이 작은 위안이라고나 할까. 이완용에 대한 연작 포스팅 일본국과 대한제국의 합병조약문 이완용 - 그 친일 행각 이완용, 종묘에 모셔지다? - 본 포스팅 이완용, 그의 재산과 치부 Daum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 ... more

  • 초록불의 잡학다식 : 이완용, 그의 재산과 치부 2008-03-09 11:25:23 #

    ... 오래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완용에 대한 연작 포스팅 일본국과 대한제국의 합병조약문 이완용 - 그 친일 행각 이완용, 종묘에 모셔지다? 이완용, 그의 재산과 치부 - 본 포스팅 Daum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 ... more

덧글

  • anaki-我行 2008/03/01 01:08 #

    (삼국지에 대해선 저보다 전문가이시지만)삼국연의에서 조조가 백만대군을 휘몰아와서 손권에게 항복을 요구하자 장소를 비롯한 동오의 문신들이 항복을 권할 때 노숙이 손권에게 이렇게 말했다죠.

    자신과 같은 신하들은 조조에게 항복하면 시골로 내려가 그곳에서 작은 벼슬이라도 하며 살아가면 되지만, 손권은 조조에게 항복해도 쫓겨날 곳도 없고 기껏 제후로나 봉해질 뿐이다. 지금 항복을 권하는 자는 손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하려는 수작일 뿐이다.

    요즘 친일파(이런 표현을 싫어한다는 분도 계시지만) 관련 글을 보면 문득문득 저 대목이 생각나더군요.
  • 시글 2008/03/01 01:10 #

    정말 최근 친일파 후손들의 뻔뻔한 행동들을 보면 분노가 올라옵니다..
  • 초록불 2008/03/01 01:15 #

    anaki-我行님. 시글님 / 그런데 저는... (모 집단에 의해서) 친일지식인에 친일주구로... 친일파를 싫어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있죠...^^;;
  • 길잃은고래씨 2008/03/01 01:20 #

    불과 며칠전에 이완용을 옹호하는 글을 읽고 내가 잘못 알았나보다 생각했는데 이런 진실이 있었군요. 이완용 옹호론에 귀가 솔깃했던 제가 부끄럽습니다.
    어째서 이완용이 매국노인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초록불님께 참 많은 것을 배웁니다.
  • 다스베이더 2008/03/01 01:21 #

    저놈은 과연, 자기 한일을 후회하거나 죄책감에 시달린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을까요...후...
  • 푸른화염 2008/03/01 01:21 #

    저.. 저런 괴악한 소리마저.....(하긴.. 한사에서는 이완용이 조선의 충복이라(심지어 같은 가문, 같은 화교라고도 하더군요.) 나라 팔아먹었다.. 뭐 이런 Dog Sound도 역설하는 듯 합니다만....) 따지고 보면 요새 괴악한 떡밥들이 꽤나 많이 돌아디는군요....
  • 비안네 2008/03/01 01:21 #

    대한제국이 어떻게 망했는지를 되돌이켜 보면, 오백 년 왕조가 너무나 허망하게 무너져서 읽는 사람이 다 한숨이 나올 정도지요. 저 자신은 아나키스트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역사를 보면서 서글픔을 느낄 때면 어쩔 수 없는 소속감을 확인한답니다.
  • 레오 2008/03/01 01:27 #

    초록불님. 사료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에 대한 자료를 구할 수 있을까요? (책이나 관련 사이트) 한가지를 놓고 토론을 하는 것을 보면 결국은 사료를 최대한 치밀하게 분석하는 사람이 설들력을 얻네요. 2학년 수업에 사료의 이해 과목이 있는데 그걸 수강 못해서리.. 아이고 어느덧 벌써 근대를 다루는 3학년 1기입니다. 에구에구
  • 시퍼렁어 2008/03/01 01:39 #

    29만원 아저씨가 떠오르면 잘못된건가요... 아직 멀었다고 봅니다만.
  • 페이퍼 2008/03/01 02:19 #

    음, 이완용의 행적과 언행을 보아하니 관직과 출세가 인생의 기준인 전형적인 인물이긴 하군요. 75년 후에는 이씨 성을 가진 일본 총리가 나올 것이라니... 그의 출세와 권력에 대한 의지와 포부 하나만은 인정해줘야 될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론 그가 그렇게까지 나라 팔아먹은 대도가 되기까지의 사상적 기반도 궁금하군요. 단순히 일신의 영화와 출세욕망만으로 그가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보기엔 좀 석연찮은 점이 있는 것 같아서요(물론 그 이유도 크긴 크겠지만). 특히 미국에 다녀왔던 다른 이들과 달리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고 오히려 유교와 불교 등 동양적 가치를 더 가치있게 여겼다고 들었는데요... 그가 단순히 조선민족이란 정체성이 아닌 동아시아 몽골인종이란 좀 더 넓은 범위의 정체성에 더 비중을 두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아무튼 젊은 시절엔 나름대로 촉망받던 조선의 수재가 그렇게까지 타락한데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등박문을 스승으로 모신다고 했던 대목이 좀 걸리네요... 단순히 줄을 잘 서기 위해서 한 말이었을까요? 언제한번 이에 대해서도 언제 한번 자세히 다뤄주시면....^^
  • 누리 2008/03/01 02:29 #

    읽으면서 괜시리 화가 나네요.
    저런 놈의 후손이 땅을 돌려받겠다고 소송이나 걸고 있으니 그 후손들은 낯짝이라도 있긴 한건가요.
  • matercide 2010/08/28 11:36 #

    그때 후손의 편을 들어준 판사가 오늘날 딴나라당 의원인 나경원입니다. 일본이 자위대 창립 50주년 기념행사를 신라호텔에서 대대적으로 열때(그 전에는 대사관에서 작게 치뤘습니다. 신라호텔에서는 미국의 고급장교도 오더군요.) 참석한 사람이기도 하죠.
  • 제갈교 2008/03/01 02:36 #

    연좌제같은거야 싫지만, 나라 팔아먹는데 일등공신인 이완용의 후손들이 지금도 떵떵거리면 잘 산다면 정말 싫을 것입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요.)
  • 스칼렛 2008/03/01 06:21 #

    요즘 일각에서 알려진 것처럼 '방관'이나 '절망했다 조선'이 아니라, 그냥 대놓고 매우 적극적인 친일이군요. 송병준이하고 별 다를 바 없는 인간이네요...
    그런데 이병주 "남작" 등 이완용 아들네미를 비롯, 그 후손 여럿은 이미 재산 싹 다 정리해서 미국이나 기타 다른 나라로 진즉에 이민을 갔다고 알고 있는데, 설마 저 집구석 후손도 소송을 걸고 있었나요? 송병준이 집안은 소송 걸고 있다는 뉴스를 보긴 했습니다만....
  • 초록불 2008/03/01 09:59 #

    레오님 / 사학방법론에 대한 책들을 보셔야 하겠죠(가령 차하순의 역사의 인식과 본질 같은...) 도서관에 가셔서 해당 번호대에 있는 책들을 보면 될 것 같은데요. 이쪽도 글쓰기와 비슷해서 좋은 논문들을 자꾸 보면서 학자들이 말하는 방식을 몸으로 익히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주장과 배치되는 사료를 꼭 언급해 주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들을 디펜스하지 못하면 설득력이 없어지거든요.
  • 초록불 2008/03/01 10:00 #

    페이퍼님 / 안 그래도 긴 글이 그러면 밑도 끝도 없이 길어질 위험이 있어서 거기까지는 다루지 못했습니다. 정말 나중에 한번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친일파들은 몇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으니까요.
  • 아롱쿠스 2008/03/01 10:12 #

    김완섭이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완용이 '애국자'가 되려면 이완용은 적어도 1900년 이전에 죽어야 합니다.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이 안돼겠기는 하지만, 그 자신에게는 구원(?)이겠죠^^)

    하긴 이완용이 모든 친일을 다한듯 치부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이젠 대중의 인식이 달라져서 많은 친일파들이 그 죄를 나눠갖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완용의 죄가 덜어지는건 아니죠^^

    *하지만 엉뚱한 사람까지 '친일파 후손' 운운하는 요즘의 세태는 보기 좋지 않네요.

  • 초록불 2008/03/01 10:16 #

    제갈교님 / 직계 후손들은 다 떠난 걸로 압니다. 캐나다에 고손자가 살고 일본에 귀화한 후손도 있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스칼렛님 / 1992년인가에 이완용의 고손자가 재산을 찾겠다고 소송을 걸었지요. 1997년 고법에서 패소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소송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활동과는 관련이 없는 일입니다.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활동으로 이완용 후손들이 재판을 걸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군요.
  • 초록불 2008/03/01 10:18 #

    아롱쿠스님 / 그렇죠. 진짜 친일파, 즉 부역친일도배와 그 시대를 살면서 어쩔 수 없었던 사람들을 모두 묶어서 매질하는 자세는 당연히 사라져야 하죠.
  • matercide 2010/08/28 11:38 #

    그럼요. 그런 자세는 친일파의 정신적 후예들이 그때 일제강점기를 산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니까 친일파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는 물타기(우물에 독 뿌리기 오류인가?)에 쓰이니까요.
  • 케야르캐쳐 2008/03/01 10:51 #

    정치하는 사람들 보면 분통 터지는 것도 전통이 있군요. 어휴
  • 오우거 2008/03/01 11:14 #

    동아일보 이때만 해도 좋았는데...
  • matercide 2010/08/28 11:39 #

    처음부터 울산김씨는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때는 이런게 울산김씨에게 이익을 안겨주기 때문이지요. 나중에 일장기말소사건은 기자들이 임의로 한 거고 김성수는 노발대발 했습니다.

    결론 : 울산김씨 족벌을 平夷해야 합니다.
  • 머미 2008/03/01 11:34 #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주장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 아롱쿠스 2008/03/01 11:36 #

    머미님 그렇습니다. 명징풍풍에서도 글씨전문 감정가 김선원 선생님이 직접 감정해주셨죠-_-;;
  • H나오토 2008/03/01 11:42 #

    이완용이 매국노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글루수의 몇몇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 초록불 2008/03/01 11:51 #

    머미님 / 사실입니다. 이완용은 당대 조선 최고의 명필로 소문나 있었습니다. 이완용의 초창기와 후반기는 한 자리에 놓고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 초록불 2008/03/01 11:51 #

    H나오토님 / 제 욕 하겠죠, 뭐...^^;;
  • 어릿광대 2008/03/01 12:07 #

    어느책에서 보니 이완용의 무덤이 훼손됐다는 애길 본듯합니다./.
    아근데 왠지모르게 욕나오는 사람이 이완용이네요 나참--;;
  • 뚱띠이 2008/03/01 12:58 #

    어느 미친 인간이 이완용을 충신이라고 합니까!!!!

  • 푸른도화선 2008/03/01 13:33 #

    법이란 것이.. 세분화되고 복잡해질수록 오히려 빠져나갈 구멍이 많아지나 봅니다.
    차라리 고조선의 8조법같이 단순무식(?)한 것이 일벌백계로 좋은것이 아니었는지..
    물론, 현실 불가능이지만 답답해지네요.

    物神의 시대에 정의로운 권력과 명예를 기대하는 것은 멍청한 것인가요.
    세상에는 사라져야 할 사람들이 참 많다는걸 느낍니다.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 광한지 2008/03/01 13:34 #

    님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짝짝짝.
  • 운다인시언 2008/03/01 13:45 #

    국사책에 이런 내용이 더 자세하게 나왔으면 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 잠본이 2008/03/01 13:49 #

    정말로 영어를 가르치기 이전에 이런 것부터 교육에 반영해야 하는데 국사책에선 '일본이 조선 먹었다. 끝' 수준이라 눈물나죠 OTL
  • sulzip 2008/03/01 14:41 #

    과연 체계적이군요. 그사람 주장이 워낙에 친일 반민족적이길래 더 길게 끌 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제가 어설프게 찌른것이 길잃은 고래씨 같은 분을 만들어냈군요. 그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_-;;
  • 치오네 2008/03/01 15:37 #

    얼마 전에 중국에서 사실 악비는 중화민족(-_-)의 통일을 막으려고 획책한 나쁜 놈이고, 진회는 평화주의자였다는 설이 나왔었죠. 물론 이 설은 완전 무시당했지만요. 이완용 충신설을 보니 저런게 생각나네요. =_=;
  • 2008/03/01 16:1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이준님 2008/03/01 17:42 #

    트랙백하겠습니다
  • 재팔 2008/03/01 17:54 #

    이완용 충신설... 웃다가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앗습니다.-_-;;
  • 比良坂初音 2008/03/01 18:07 #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북한이 한게 부럽습니다....쓰읍
  • 매드박살 2008/03/02 11:53 #

    ....읽다가 지칠정도군요... 군데 이게 줄일만큼 줄인것이라니....(덜덜)
  • 스와티 2008/03/02 16:57 #

    권력이나 부는 참 무상한 건데 그걸 노리고 나라를 파는 저 인간의 행태가 참 무섭기까지 하군요.

    그깟 안위의 보신과 권력...부때문에....무서워라...
  • matercide 2010/08/28 11:42 #

    과연 무상할까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친일파들이 "손에 피를 묻혀서 권력과 부를 세습"하는(중앙일보가 '사법부 내 이념단체' 인 "우리법 연구회"의 자료를 인용한 글입니다. 중앙일보는 이걸 근거로 법원 내 좌파이념단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건 중앙일보가 "손에 피를 묻혀 권력과 부를 세습'하는 친일파의 언론이란 걸 자백하는 바보짓이죠.) 게 50년이 넘는 걸 보면 유상할 지도
  • Eclipsia 2008/03/02 17:14 #

    ...ㅇ_ㅇ...진지하게 이완용 충신설을 주장하는 분들의 여권을 확인하고 싶군요. 아- 정말- 우리나라는 일제시대의 역사를 좀 더 긴 시간을 들여서,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태도가 국가를 살리고 어떤 태도가 국가를 죽였는지- 두번다시는 없어야할 뼈아픈 교훈을 철저하게 되새기고 배우도록요!
  • 한단인 2008/03/02 17:16 #

    음..한참 후에 이글루에 들어와서 뒷북치는 얘기지만..

    전 이완용도 근대로 접어들던 구한말 지식인 중에서 스스로 갈 바에 대해 혼동하던 사람 중 한명으로 생각해야되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이 글을 보고나니 단순한 기회주의 쓰레기일 뿐이었구나를 알게 됐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 근현대사는 꽝인가봐요. 쩝...
  • 초록불 2008/03/02 19:40 #

    한단인님 / 나름대로 확신범일수는 있을 겁니다. 29만원이 자기를 높이 평가하듯이...
  • 耿君 2008/03/02 20:06 #

    음, 충신설은 아무래도 아니죠 ^^ 이완용과 송병준이 일종의 세트였다고 생각합니다.
  • 민찬 2008/03/03 01:32 #

    여기 와서 삼일절을 마무리하는군요^^ 그 당시 사건들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아요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초록불 2008/03/03 01:34 #

    민찬님 / 고맙습니다.
  • 2008/03/03 21:2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8/03/03 22:25 #

    비밀글 / 그 문제가 쉽지 않습니다. 간략하게 정리할만한 내공이 아직 부족합니다...^^;; 차근차근 이 문제에 대한 포스팅을 해나갈 생각이긴 합니다.
  • 2008/03/04 04:5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8/03/04 07:34 #

    비밀글 / 고맙습니다.
  • Alpha 2008/03/04 10:07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223349&page=1
    NAZ는 끊임없이 글을 싸지르군요
  • 초록불 2008/03/04 10:20 #

    Alpha님 / 기본적으로 "논리"라는 게 탑재가 안 된 사람이네요. 김일성도 한때는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니까 한국전쟁에 책임이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죠.
  • 데이빗 2008/03/04 16:39 #

    저분한테 어떤사람이 3.1운동때 이완용 찾아갔다가 이완용이 거절하고 당국에 신고하지않았다는
    이야기의 출전이 어디냐고 물어보니까 출전은 손병희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의암손병희전기"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답변하더군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이완용평전'과 한국사시민강좌(글이 지워져서 한국사시민강좌가
    맞는건지는 모르겠군요)에도 나오는 내용이라더군요.
  • 초록불 2008/03/04 17:07 #

    데이빗님 / 이완용 평전은 [중심]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지요. 지은이가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했을 뿐입니다. 이완용 평전에도 저 이야기의 출전은 나오지 않습니다. 의암손병희전기는 [의암 손병희 선생 전기]를 가리키는 것이겠군요. 1967년에 나온 책인데...

    저도 그 책은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군요. 그거 확인하려고 거금 들여서 살 수도 없고... 국립도서관이나 가야 볼 수 있을 책이군요. 저로서는 여전히 신뢰도가 낮은 이야기입니다. 이완용이 밀고할까 고민했다고도 하는데, 밀고할까 고민할 정도의 사람에게 참여를 권유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으니까요. 이런 종류의 떡밥은 조심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2008/03/06 23:4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8/03/07 01:18 #

    비밀글 / 그렇겠지요.
  • 플로리몽 2017/03/20 05:02 #

    더불어서 요즘 인기 있는 이야기가,,,
    고종과 순종은 오히려 합방후 일본천황에게 감사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이죠.
    이게 상식적으로 저는 이해가 잘 않가지만....뭐 그 분 말씀으로는 일본이 뒷돈 엄청나게 대줬으니 고마웠을것 아니냐?
    이런 말씀하시더군요...허허허
    (물론 저 역시 반민특위때까지 위 두 사람이 살아있었다면 제일 먼저 끌고갔어야 한다고 믿긴 합니다.)
  • 초록불 2017/03/20 09:51 #

    증거도 없는 자기 상식에 기반한 이야기군요. 뒷돈이라... 참...
  • 플로리몽 2017/03/25 18:45 #

    아..제가 표현을 좀 잘 못했군요.
    뒷돈이라기 보다는 합방후 생활비라던가 이런 일제가 재정적으로 이왕직을 후원해 준 것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 초록불 2017/03/26 15:35 #

    그런 논리라면, 김정은에게 돈 많이 줄테니까 북한 넘기라고 하면 좋다고 넘기겠네요. 한나라의 국왕 자리와 월급쟁이 신세 되는 것과 어느 쪽이 좋겠습니까. 그 분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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