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의 역사 *..역........사..*



티베트. 지금 독립을 위해 피흘리고 있는 땅.
그 땅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기로 합니다.

1. 티베트인의 기원
티베트인이 어디서 기원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 몽고에서 왔다는 북래설
- 인도나 말레이 반도, 미얀마 등에서 왔다는 남래설
- 중원에서 왔다는 한장일원설 ("장"은 티베트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중국은 티베트를 "서장"이라 부릅니다.)
- 강남에서 왔다는 묘장동원설 ("묘"는 중국 남부에 살던 묘족을 가리킵니다.)
- 요동에서 왔다는 선비기원설
- 청해에서 왔다는 장강동원설 ("장"은 티베트인, "강"은 강족을 가리킵니다.)
- 위짱에서 발원했다는 토착설

오늘날 가장 설득력 있는 설은 위짱의 얄루장푸강 유역에서 발원한 토착인들이 청해 등지의 강족과 융합하여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2. 티베트의 역사
티베트 어로 군주를 "짠포"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영무英武한 군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제1대 짠포는 "냐치짠포"라는 사람이었는데, 그 스스로는 천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답니다. 그래서 그런 뜻의 "보데쀼걔"를 성으로 삼았습니다.

33대를 내려가 6세기말~7세기 초에 냐치짠포의 후손인 송짼감포(재위 620~649)는 티베트 고원을 통일했습니다. 송짼감포는 라싸로 천도하고 포탈라 궁을 세웠습니다. 중국은 이 왕국을 토번이라고 불렀습니다.

송짼감포는 637년에 네팔 공주와 결혼했고, 641년에는 당의 공주와 결혼했습니다. 이 당과의 결혼은 중국이 티베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데 중요한 근거로 작용합니다. 티베트는 중국의 사위 나라로 이때부터 중국에 복속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티베트 인들은 송짼감포가 당을 위협하여 얻어낸 것으로 이야기하는, 정반대의 시각을 보여줍니다. 아무튼 단지 당의 공주가 티베트에 시집갔다고 해서 티베트가 당에 복속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몽고가 고려를 부마국으로 만들었을 때, 고려에는 몽고의 통치기구인 정동행성이 설치되었죠. 그러나 당은 티베트에 아무런 관청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런 논리는 지나치게 억지를 부린 것입니다.

토번과 당은 이후 8차례나 회맹을 갖습니다. 다시 말하면 8차례나 화평이 깨진 바 있다는 거죠. 심지어 양국 사이에는 책봉-조공 관계도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사신만 오갔을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책봉-조공 체제 안에 들어가 있는 우리나라의 조공 문제에 대한 시각은 정밀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이 글의 주제는 아니므로 그냥 넘어가죠.)

심지어 763년에는 토번군이 당의 장안을 함락시키는 사건까지 있었습니다.

10세기에 당이 멸망하던 시기에 토번도 멸망해 버렸습니다. 티베트 고원 지대는 그후 300년간 주인이 등장하지 못했습니다. 여러 지방세력으로 분할된 티베트는 그 지배층과 불교가 결합한 정교일체의 정권들이 여러개 발생하게 됩니다. 이 무렵 중국도 오대를 거쳐 통일국가 송이 등장하는데, 송은 대외적으로 취약한 나라여서 티베트에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습니다.

14세기에 이르러 몽고가 발흥하고 그 위협이 티베트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때 티베트 사캬파 불교(라마교) 영수 팍빠(파스파)가 몽고의 쿠빌라이를 만나 단월 관계를 맺습니다. 단월 관계란 신도가 시주하고 승려가 그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티베트의 라마교가 몽고의 왕실을 보호하는 국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고, 몽고는 팍빠의 티베트 통치를 인정해 주게 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중국은 원대부터 티베트가 중국의 일원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당시 고려가 중국의 일원이 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티베트도 중국의 일원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후 몽원제국이 붕괴했을 때, 몽원제국에 의지했던 사캬파의 티베트 정권도 몰락했습니다. 이후 티베트에는 5대법왕과 5왕이 등장해 각기 지역을 점거했죠. 이름에서 짐작이 가겠지만 이들도 사캬파처럼 정교일치의 정권이었습니다.

3. 달라이 라마의 등장
명나라는 티베트의 불교 지도자들에게 책봉을 하고 조공을 바치게 하는 등 노력하지만 티베트는 중국보다 몽고를 더 중시하고 있었습니다. 티베트의 지도자들은 영락제의 부름에는 응하지 않았지만 몽고 칭기즈칸의 17대 후손인 투무트 부의 알탄칸의 부름에는 응했습니다. 1578년 티베트 겔룩파의 활불 소남갸쪼가 청해에서 알탄칸을 만났고, 그때 "달라이 라마"라는 존호를 받았습니다. (달라이 라마라는 말은 "큰 바다같은 스승"이라는 몽고어라고 합니다.)

지금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끄는 달라이 라마의 시작이 여기있는 것이죠.

5세 달라이 라마(위대한 5세)는 티베트를 통일합니다. 1641년 티베트를 통일한 위대한 5세는 1652년 중국을 정복한 청의 순치제를 북경에서 만납니다. 이때 과거 팍빠와 쿠빌라이가 맺었던 일이 되풀이 됩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를 다스리며 청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교 지도자가 된 것이죠.

5세 달라이 라마가 죽은 뒤 6세 달라이 라마가 세워졌으나 내분에 의해서 폐위되고 새로운 달라이 라마 6세가 옹립되었습니다. 이런 내분의 틈을 이용한 청의 강희제는 1713년에 5세 판첸에게 금책금인을 내려 달라이 라마에 버금가는 활불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또한 1720년에는 7세 달라이 라마를 책봉하기도 했습니다.

청나라는 달라이 라마의 요청에 의해 4차례나 티베트에 출병합니다. 몽고 준가르 부의 침공을 무찌르기 위해서 두 번, 네팔 고르카 군의 침공을 무찌르기 위해서 한 번, 내부 정변을 진압하기 위해서 한 번입니다. 이들 청군이 티베트에 주둔하게 되면서 티베트는 내정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고 맙니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티베트가 독립국이 아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티베트는 여전히 달라이 라마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청군을 티베트인들은 싫어했는데 이들로부터 "중국인 병", 즉 매독이 전파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매독은 흔히 이웃나라의 병이라고 불립니다. 영국은 이것을 프랑스병, 프랑스는 영국병이라 불렀고, 우리나라도 중국에서 온 병이라고 "당창"이라고 불렀죠.) 물론 이런 이유가 전부는 아니죠.

1792년 네팔의 침공을 막아준 이후 청의 위세는 드높았지만(이때 청은 총 세수의 1/4을 이 전쟁에 투입했습니다.) 그 이후 청이 쇠퇴하면서 티베트에 미치는 영향력도 점차 감소하였습니다. 청조가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된 이후에도 티베트는 네팔과 분쟁을 계속 했는데 결국 1856년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네팔 측에 여러 권리를 대폭 양보하고 말았습니다. 네팔은 티베트의 보호자를 자처했지만, 사실은 단 한 번도 티베트를 도운 적은 없었습니다.

4. 티베트와 제국주의
1894년 티베트는 13세 달라이 라마 투텐 갸쪼(1876-1934)가 등장했습니다. 이 무렵 티베트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영국이 티베트의 변경을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1904년 영국은 라싸를 점령하고 티베트와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에서 영국은 청의 어떤 권리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일본이 청에게 누차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하겠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이때 외몽고로 달아나 청의 도움을 요청했으나 청은 판첸 9세에게 섭정을 명할 뿐 달라이 라마를 돕지 않았습니다. 판첸 라마는 청의 섭정 지시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1906년 청은 영국과 북경 조약을 맺어 티베트에 대한 지배권을 천명했습니다. 또한 1907년 페테르스부르그 조약에서도 청의 티베트에 대한 지배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무렵의 일련의 행보는 서구 제국주의와 만난 청의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1908년말 달라이 라마는 북경을 방문합니다. 하지만 이미 청은 티베트를 독립국으로 대우하지 않고 있었죠. 크게 실망한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로 돌아옵니다. 1909년 12월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에 돌아온 직후 청은 티베트를 침공합니다.

달라이 라마는 세계 열강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반응이 없었습니다. 청군은 비무장 민간인들을 학살하며 라싸로 진군했고 달라이 라마는 이번에는 인도로 망명하게 됩니다. 청은 1910년 2월 25일 달라이 라마 13세의 책봉을 철회하고 새 달라이 라마를 찾는다고 공포합니다.

달라이 라마가 도망친 인도는 대영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죠. 당연히 달라이 라마도 영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을 빌미로 중국은 티베트가 독립 의지를 가지고 행동했다는 것은 영국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지요. 영국의 등장 이전에는 티베트에 독립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런 개념 자체(즉 독립이라는 용어)가 서구의 인식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하지요.

1910년부터 1912년까지 티베트는 청의 직접 지배 아래 들어갑니다. 하지만 신해혁명의 여파로 청의 지배는 흔들리게 되고, 달라이 라마도 라싸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에 있는 중국인들을 모두 쫓아내고 티베트와 중국 간의 모든 관계가 끝났다는 것을 천명하죠.

5. 중국의 티베트 침공
중화민국은 티베트와 과거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했지만 달라이 라마 13세, 그리고 그 뒤를 이은 14세도 모두 거부하고 맙니다. 13세는 1933년 58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그 환생은 1937년에 발견되었고 1940년 새 달라이 라마가 등극하죠. (달라이 라마는 환생하는 존재라고 하죠. 달라이 라마가 죽으면 다시 환생하는데 여러가지 검증을 받아 환생을 증명한 뒤 새로운 달라이 라마가 됩니다.)

2차세계대전 동안 티베트는 철저한 중립을 유지했습니다. 중국-인도간 수송로의 제기가 계속 되어 미국까지 중재에 나섰지만 티베트는 어떤 도로 개설도 허용하지 않았죠.

1949년 국민당 정부는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물러났습니다. 중국의 공산화는 티베트에게 충격을 주었죠. 달라이 라마는 중국인들을 다시 티베트에서 몰아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종교가 탄압받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으니까요.

1950년 10월 중국은 티베트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티베트 해방이 그들의 목표였죠. 불과 15세였던 달라이 라마 14세(지금 달라이 라마가 바로 14세입니다)는 세계에 티베트의 사정을 호소하였습니다. 하지만 티베트에게는 불행하게도 세계의 이목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습니다. 극동에서 벌어진 한국전쟁이 바로 그것이었죠. 중국군을 감당할 수 없었던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의 지위 보전을 조건으로 티베트 점령을 승인하였습니다.

이후 티베트를 점령한 중국군은 티베트에 사회주의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런데 이 개혁은 티베트 인민의 광범위한 반발에 부딪칩니다. 개혁을 위해서는 종교 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티베트 인민의 종교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해 있었던 것이죠. 1956년 티베트 무장 항쟁이 막을 올렸고 중국은 진압을 위해 15만 이상의 군사를 파견해야 했습니다. 중국은 광범위한 저항 때문에 결국 양보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티베트 인들의 사기를 올려주기만 했을 뿐이었죠. 1959년 3월 10일, 라싸에서도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터져나오게 되었고, 최소한 8만7천 명의 티베트 인이 사망하게 됩니다.

6. 티베트 망명 정부
달라이 라마와 각료들은 3월 17일 밤 인도로 도피하고 만여 명의 피난민이 그 뒤를 따라 인도로 갑니다. 달라이 라마는 1951년 북경에서 맺어졌던 17조 협약을 무효라고 선언하고 인도 북부 달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웁니다. 중국은 1965년 티베트에 서장자치구를 건립하죠.

그리고 1969년 문화대혁명의 미친 바람이 티베트를 휩씁니다. 티베트의 거의 모든 사찰들이 파괴당했고, 59만의 승려 중 11만명이 박해로 죽고 25만명은 강제로 환속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1949년부터 1979년까지 6백만 티베트 인 중 86만4천 명이 총에 맞아죽었고, 32만4천 명이 기아로 죽었다고 하는군요.

중국이 티베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택한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방법은 티베트를 한족 거주 구역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법은 조선족 거주 구역에서도 유효하게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이미 티베트 지역에 거주하는 한족은 7백만이나 되어서 티베트 인들보다 많은 형편이지요. 결국 티베트를 중국에서 분리시킨다는 방안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중국의 계획이 아닌가 싶습니다.

티베트의 망명 1세대인 달라이 라마도 73세의 고령입니다. 이미 판첸 라마가 죽었을 때, 그 임명을 놓고 중국 정부와 티베트 망명 정부는 각기 새 판첸 라마를 지명했고, 현실적으로 권력을 쥔 중국은 자기네 마음대로 판첸 라마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죠. 이제 달라이 라마도 그럴 위험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달라이 라마 14세는 15세를 자기 생전에 뽑겠다고까지 말하고 있는 형편이죠.

티베트 인의 저항은 계속 이어졌고,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은 대부분 김한규 교수의 [티베트와 중국](소나무, 2000), [천하국가](소나무, 2005)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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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와 중국의 역사적 관계 - 10점
김한규 지음/혜안

천하국가 - 10점
김한규 지음/소나무

티베트와 중국 - 10점
김한규 지음/소나무

덧글

  • 제너럴 2008/03/22 18:12 #

    티베트도 참 다사다난한 역사를 가진 나라군요.

    지금 중국 하는짓 보면 올림픽 끝나고 나서 터널공사 한답시고 핵폭탄 써서 쓸어버릴것 같습니다.(실제로 89년 시위이후 할려고 했다가 국제사회의 비난으로 무마됬습니다.)
  • PolarEast 2008/03/22 18:13 #

    손첸캄포는 재위기간이 두번인데, 그 사이에는 쿤손쿤첸이라는 아들이 집권했던거 같습니다.
    문성공주는 그 중간 기간에 티벳으로 시집을 갔는데, 그래서 쿤손쿤첸과 결혼했다가, 아들이 죽은후 아버지의 소유가 된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는듯 하더군요.
    그 외에는, 문성공주가 불교를 유입시켜서, 오늘날의 티벳 라마교를 형성했다는 이야기도 있고요.(문성공주는 숭배의 대상인거 같더군요.)

    이걸 가지고 소설을 쓴 것도 있는데 '바람의 왕국'이란 라이트 노벨입니다. 뭐, 글의 수준만 가지고는, 추천하기가 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만.

  • 아브공군 2008/03/22 18:20 #

    달라이 라마는 "외교권하고 군사력은 필요 없다. 그저 우리의 문화를 지키게 해 주고, 자치권만을 바랄 뿐이다. 자원 개발 같은 것 해도 좋다." 라는 입장이시죠.
  • 초록불 2008/03/22 18:24 #

    PolarEast님 / 그런 이야기는 저도 본 적은 있지만 역사적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치오네 2008/03/22 18:34 #

    문성공주가 송짼감포에게 시집가는 이야기는, 외국인을 위한 언어연수용 책에도 나오더군요... (중국의 언어연수용 책 내용은 대부분 중국 선전이죠;;)

    칭짱 철도가 놓여졌을 때, 아무 생각 없이 티벳 가기 쉽게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이번 사태를 보니 티벳 사람들에게 미안하더군요. 정말 생각이 없었구나 싶어서 참...
  • rumic71 2008/03/22 19:04 #

    칭짱 철도야 중공판 만철 아니겠습니까.
  • 이준님 2008/03/22 19:25 #

    1. 사실 2차 대전 연간의 중국-인도 수송로 문제에서는 당연히 티벳 부분은 전략상의 목표로 제외되었습니다. 다만 유명한 둘리틀 도쿄 공습때-영화 진주만에 나온 그 사건- "우리 폭격대는 티벳(샹그리라)에서 출격했다"는 류의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습니다

    2. 공주와의 결혼이 복속의 의미라면 흉노는 이전에 이미 복속되었겠지요. 몽골도 청에 일찌기 복속되었구요 -_-;;;

    3. 문혁때의 문제야 아주 유명하지요. 내지에서 공자상과 불상들이 파괴되던 바로 그때에 티벳이 무사히 남아있으리라고 볼수는 없었을겁니다. -한국의 어린이 잡지에도 나오는 일본발 괴담이 바로 이때 나온겁니다. 모씨는 서구의 티벳 독립운동에 대한 심정적 지지조차도 까던데. 그 근거 자료라는게 문혁때 나온 "중국 기록"이라는게 압박이지만요

  • 제갈교 2008/03/22 20:23 #

    티벳(藏族)의 다사다난한 역사... 잘 보았습니다. :)
  • 풍신 2008/03/22 22:50 #

    공주와의 결혼의 의미가 복속이라니...신선한 관점(?)이군요.(억지도 이만하면 예술?) 역사속에서 공주를 보내는것은 대등한 화합의 의미, 또는 강제로 어쩔수없이 인질로 보내는 것 둘중에 하나라고 알고있었는데 말이죠.

    중국을 이웃에 둔 나라는 정말 피곤하죠.(만약 6.25때 북한이 적화 통일을 성공했다면 지금쯤 티벳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을지도...)

    그나저나 티벳이 서장, 서역이었군요.(어렴풋이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 초록불 2008/03/22 22:52 #

    풍신님 / 티베트는 서장인 것은 맞는데 서역이라고 하면 좀 곤란합니다. 서역은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포함되는 (멀리는 유럽까지도) 개념입니다.
  • dunkbear 2008/03/22 23:27 #

    티베트 지역에 한족을 거주시킨다고 티베트가 영원히 중국에서 벗어나지 못할거라고
    중국 지도층이 믿는다면 잠 깨라고 권하고 싶네요. 티베트에 살게 되면 티베트인이
    되는 겁니다. 영국이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독립전쟁을 했을 때 적군은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피부색을 가진 독립군들이었죠. 한족이라고 무조건 어딜가든 중국정부에
    충성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어리석은 자만입니다.
  • 초록불 2008/03/22 23:35 #

    dunkbear님 / 그건 좋은 비교가 아닌 것 같습니다. 미국 땅에 살던 이들이 인디언이 된 게 아니니까요. 오히려 식민지에 살던 백인들은 인디언을 대량학살했죠. 그렇게 생각하면 좀더 아찔해지는데요?
  • dunkbear 2008/03/23 00:09 #

    초록불님 / 저는 그냥 동부의 13주로 대표되는 식민지 세력과 본국인 영국의 충돌이라는 개념으로 단순하게 비교한 것인데 아무래도 적당한 비교는 아니었네요. 말씀처럼 티베트에 거주하는 한족들이 토착 티베트인들을 배척할 가능성도 생각했어야 하는데...

    결국 어느 영화의 홍보문구처럼 누가 이기던 티베트인들은 끝장나게되는 것인지... 이번 저항운동이 제발 어느 정도의 결실이라도 낳았으면 좋겠습니다.
  • 비안네 2008/03/23 02:34 #

    중국정부는 명분상으로든, 실리상으로든, 후속타를 염두에 두든, 티베트 독립을 저지하리란 결론밖에 안 나오지요. 티베트가 분명 도덕적으로 옳지만, 중국정부 눈치를 보느라 한다 하는 강대국들도 쉬 입을 열지 않으니... 참 부조리하지요.
  • PolarEast 2008/03/23 11:52 #

    dunkbear/그것보다는, 아일랜드의 예를 드는게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영국에서 이민온 사람들이 아일랜드 인들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결국 아일랜드는 독립하게 되었고, 그 지역에 살던 영국 이주민에 대한 보상문제가 되려 영국의 발목을 잡았죠. 티벳이 독립한다면 비슷한 결과가 될지도 모릅니다.
  • 네오바람 2008/03/23 17:15 #

    그러고보니 바람의 왕국이 티벳 배경의 소설이었군요
  • 시언 2008/03/23 21:00 #

    네팔이 엤날에는 잘 나갔나 보네요.
  • Scott 2008/03/24 17:23 #

    아^^; 실례지만 댓글들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인디언분들에 대해서는 네이티브 아메리칸이라 불러드려야 예우가 아닌지.. 싶습니다. 물론 실제로 그분들께 인디언이라고 불러드려도 속으론 언짢아하셔도 이해하시고 넘어가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저는 항상 네이티브 아메리칸이라 불러드리는 것이 그분을 존중하는 길이라 생각해서 매일 잊지 않고 그렇게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부탁이나 조언 그런것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불러드리는 것이 아메리카 본토에서 오랫동안 살아오신 분들에 대한 예우가 아닐까 생각해서 꺼내보았습니다.
  • 초록불 2008/03/24 17:35 #

    Scott님 / 인디언을 만나면 그렇게 부르도록 하고, 영문 표기를 할 일이 있을 때면 그렇게 하도록 하죠. 저는 인디언 분이 방문할 리 없는 제 블로그에서 그렇게 표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 블로그의 외래어 태그를 살펴보시면 제 이런 태도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 Scott 2008/03/24 17:37 #

    아^^; 실례지만 댓글들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인디언분들에 대해서는 네이티브 아메리칸이라 불러드려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인디언은 그분들을 비하하는 성향이 짙어서 쓰는 것을 지양해야한다더군요. 물론 실제로 그분들께 인디언이라고 불러드려도 속으론 언짢아하셔도 이해하시고 넘어가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저는 항상 네이티브 아메리칸이라 불러드리는 것이 그분을 존중하는 길이라 생각해서 매일 잊지 않고 그렇게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근데 네이티브 아메리칸이라는 말도 미국원주민뿐만 아니라 미국 태생도 그런 말을 쓸 수 있어서 상례화에 있어서는 좀 문제가 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대체적으로 그분들을 호칭하기에는 인디언이라고 하기보다는 네이티브 아메리칸이나 부족명 그 자체로 불러드리는 것이 적합하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부탁이나 조언 그런것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불러드리는 것이 아메리카 본토에서 오랫동안 살아오신 분들에 대한 예우가 아닐까 생각해서 꺼내보았습니다.
  • Scott 2008/03/24 17:38 #

    아.. 빼먹은 부분이 있어서 수정하려고 했는데 이미 다셨군요.
  • Scott 2008/03/24 17:49 #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걱정 된게 위에서도 썼듯이 대체적으로 인디언이란 호칭이 그분들을 비하하는 성향이 짙어서 쓰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들었었습니다.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주인장님께서 그분들을 비하하는 뜻으로 쓰는것인가 하고서 오해를 할 경우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주인장님께서 비하하시려는 의도로 쓰시는 것도 아니니.. 그리고 주인장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어쩔 수 없구요. 아무튼 말씀 잘 들었습니다.
  • Scott 2008/03/24 18:06 #

    아; 타이밍이 너무 어긋나버려서 혹여 제가 지웠던걸 읽어버리시고서 제가 후에 고쳐쓴것은 안 읽으신건 아니신지 불안하네요.
  • 도2008 2008/03/24 19:20 #

    티베트의 역사군요. 저녁 먹고 좋은 글 읽고갑니다.
  • 쑴쑴쑴 2008/03/24 20:54 #

    바둑(BADUK)의 기원이 티벳이라는 설도 있지요.
  • 초록불 2008/03/25 00:59 #

    Scott님 / 잘 보았습니다. Scott님의 자세도 휼륭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빌게이츠 2008/03/25 12:13 #

    어디 티벳 뿐이겠습니까? 저런 나라들이... 쩝...

    동북공정이니, 뭐니 하는 식으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자들이 응당 겪어야 할 과정이죠.

    중국은 이것을 '성장통'이라 생각할테고, 티벳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 생각할테고...

    ---------

    그나저나... 이 나라는 눈치보기 때문에 '동병상련' 조차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쩝...
  • 이야타 2008/12/09 13:08 #

    올해초의 글에다가 뒤늦게 이렇게 웃기긴 하지만

    아무튼 글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달라이라마를 인터뷰한 서양인이 쓴 티벳역사책을 잠깐 읽다가

    지루함에(-_-; 정신연령이 매우 어리다보니;;) 끝까지 다 못 읽은 것이 아쉬웠는데

    이렇게 티벳 역사를 알기쉽게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티벳의 역사를 보니 그 나라도 기득권층은 그저 자기살길 찾기 바쁘고

    오직 민중들만 힘없고 백없고 가난한 백성들만 고통받아왔군요.

    이래나저래나 세계국가의 역사는 다 비슷한 모양입니다.
  • 초록불 2008/12/09 14:21 #

    옛날 글을 챙겨서 보아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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