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대마도를 정벌하다 1 *..역........사..*

글이 삼수갑산으로 가더라도 일단 써놓고 보기로 마음먹고, 추후 수정보완키로 함.



1. 고려, 왜구의 침탈을 받다

대마도對馬島 정벌은 조선이 처음 한 것이 아니다. 고려말에 이미 원정이 있었다.
물론 왜구의 침입 때문에 일어난 원정이었다. 왜구에 대한 첫 기록은 고려사 고종10년(1223) 5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갑자(甲子)에 왜(倭)가 금주(金州)에 침구(侵寇)하였다.

금주는 김해를 가리키는 말이다. 대마도와 가까운 이곳이 첫 침입지로 기록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마도는 땅이 척박해서 그곳의 물산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고, 그 때문에 해적질에 나섰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이후 왜구의 침입에 대해서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종 13년(1226) 1월 : 왜(倭)가 경상도(慶尙道) 연해 주군(沿海州郡)에 침구(侵寇)하므로 거제 현령(巨濟縣令) 진용갑(陳龍甲)이 주수(舟帥=수군)로 사도(沙島)에서 싸워 2급(級)을 참살(斬殺)하니, 적(賊)이 밤에 도망하였다.

고종 14년(1227) 4월 : 갑오(甲午)에 현성사(賢聖寺)에 행차하였다. 왜(倭)가 금주(金州)를 침구(侵寇)하므로 방호 별감(防護別監) 노단(盧旦)이 군사를 발(發)하여 적선(賊船) 2척을 포착(捕捉)하고, 30여 급(級)을 베고 또 노획한 병장(兵仗)을 바쳤다.

고종 14년(1227) 5월 : 경술(庚戌)에 왜(倭)가 웅신현(熊神縣=김해 안의 현))에 침구(侵寇)하므로 별장(別將) 정금억(鄭金億) 등이 산간(山間)에 잠복(潛伏)하였다가 뛰어나와 7급(級)을 참살(斬殺)하니, 적(賊)이 도망하였다.

원종 4년(1263) 2월 : 계유(癸酉)에 왜(倭)가 금주(金州) 관내(管內)의 웅신현(熊神縣) 물도(勿島)에 침구(侵寇)하여 여러 주현(州縣)의 공선(貢船)을 약탈(掠奪)하였다.


이렇게 초기 왜구는 대체로 김해 지방에만 출몰했다. 1231년부터 몽골군과 싸우고 있던 고려(살리타이의 침공)는 왜구에 대해서 수동적인 방어 이상의 조치를 취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록상 고종 대의 왜구 침입 기사 이후 고려가 몽골에 항복한 1259년까지 사이에는 왜구에 대한 내용이 없는데, 이것은 그들이 침입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거기까지 고려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기사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원종 즉위년(1259) 7월 : 경오(庚午)에 감문위 녹사(監門衛錄事) 한경윤(韓景胤)과 권지 직 사관(權知直史館) 홍저(洪貯)를 일본에 보내어 해적(海賊)을 금(禁)하도록 청하였다.

사신을 보내 해적을 금하게 해달라고 한 것은 그 전에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기록에 없을 뿐이다. 고려는 고종14년의 왜구 침입 때도 일본 조정에 해결을 요청했고, 일본 측은 해적 토벌에 앞장선 전례가 있었다.

이들 왜구의 본거지가 대마도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 조정의 요청으로 일본은 왜구 토벌에 나섰는데 그 결과에 나타나는 곳이 바로 대마도다.

원종 4년(1263) 8월 : 무신(戊申) 삭(朔)에 홍저(洪泞)·곽왕부(郭王府)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와 아뢰기를,
“해적(海賊)을 궁추(窮推)하니 이것이 곧 대마도(對馬島)의 왜(倭)인지라. 미곡(米穀) 20석(石)과 마맥(馬麥) 30석(石)과 우피(牛皮) 70령(領)을 징수(徵收)하여 왔나이다.”
라고 하였다.

원종 10년(1269) 3월 : 신유(辛酉)에 흑적(黑的)과 신사전(申思佺) 등이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왜인(倭人) 2명을 잡아 돌아왔다.


이렇게 김해 지방에만 출몰하던 왜구는 점차 영역을 넓혔다. (원종 1년(1260)에 왜를 대비하여 제주에 방호사를 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역시 고려가 몽골과 싸우던 중에는 왜구에 신경쓸 수 없었다는 방증이 될 것이다.)

원종 6년(1265) 7월 : 정미(丁未) 삭(朔)에 왜(倭)가 남도(南道)의 연해 주군(沿海州郡)에 침구하거늘 장군 안홍민(安洪敏) 등에게 명하여 삼별초 군(三別抄軍)을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고려는 1270년부터 1273년까지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274년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다.



2. 고려의 1차 대마도 정벌

원종 15년(1274)에 고려는 원(1271년 몽골은 원으로 국명을 고쳤다)에 의해서 일본 정벌에 동원된다. 원은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게 대선 300척을 포함하여 총 900척의 전선을 만들게 한다.

기술자 3만 5백명을 동원해서 급히 배를 만들라고 재촉한 까닭에 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고려는 원의 감독 홍다구洪茶丘를 달래서 절반은 농사를 짓게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 배들은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고려 식으로 만들어졌는데, 1월 보름에 시작하여 5월 그믐에 모두 만들어냈다. 실로 엄청난 공사였을 것이다.

이 일로 노심초사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원종은 6월에 자리에 눕더니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 세자는 원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는 국왕이 없는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그러나 원의 출정 명령은 시급해서 7월 김방경金方慶은 선발대로 출발해야 했다. 원은 일본정토 도원수日本征討都元帥 홀돈忽敦, 동정 부원수東征副元帥에 홍다구洪茶丘, 좌부원수左副元帥에 유복형劉復亨을 임명했다.

일본 원정군은 합포合浦(마산)에서 출발했다. 그 규모는 다음과 같았다.

몽한군蒙漢軍(몽골과 한인 연합군) 2만 5천.
고려군 8천.
초공(梢工 키잡이), 인해(뱃길잡이), 수수(水手 뱃사공) 6천7백.
총 3만9천7백 명에 전함 9백척.


고려군의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삼익군(三翼軍)
도독사(都督使) - 김방경(金方慶) : 중군 통솔
              지병마사(知兵馬事) - 박지량(朴之亮) 김흔(金忻=金綬)
              부사(副使) - 임개(任愷)
좌군사(左軍事) - 김신(金侁)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지병마사(知兵馬事) - 위득유(韋得儒) 
              부사(副使) -  손세정(孫世貞)
우군사(右軍使) - 김문비(金文庇) 상장군(上將軍)
              지병마사(知兵馬事) - 나유(羅裕), 박보(朴保) 
              부사(副使) -  반부(潘阜)


여기에 본래 여진군도 포함될 예정이었으나 여진군이 기일에 대지 못한 관계로 바로 출발하였다. 이들의 일차 목표는 당연히 대마도였다. 고려사 김방경 열전에는 이 상황이 매우 간단하게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진군(女眞軍)을 기다리니 여진군(女眞軍)이 기일(期日)에 늦을까 하여 이에 발선(發船)하여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가서 쳐서 죽임이 심히 많았다.

그동안 왜구에게 쌓인 원한이 꽤나 깊었을 것이고 당연히 대마도 초토화로 보복했을 것이다. 의외로 대마도 정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전투ㅡ 즉 여몽원정군의 대마도 정벌을 이야기하지 않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일본 측도 대마도 정벌로 여몽원정군의 위세를 깨달았을 것이다. 이들은 일기도一岐島에서 설욕전을 노렸다. 이 일기도 전투를 보면 대마도 전투에 대한 단서도 찾을 수 있으므로 이 전투를 조금 자세히 보자.

일본군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여몽원정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봉에 선 것은 고려군이다. 선봉에 나선 장수는 박지량朴之亮과 김방경의 사위인 조변趙抃이었다. 왜군은 일패도지한 후 항복을 청하다가 불시에 기습을 꾀했다. 그러나 홍다구가 박지량과 조변과 더불어 왜군을 몰아쳐 천여 명을 격살했다.

여몽원정군은 일기도를 휩쓴 뒤에 일본에 도착했다. 구주(九州 큐슈) 박다만(博多灣 하카다만) 삼랑포三郞浦에 상륙했다. 당시 일본군은 대포도 본 적이 없어 포성이 울리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여몽원정군은 상대가 되지 않는 일본군을 여지없이 격파했다. 그러나 일본군도 손을 놓고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김방경의 중군을 노리고 좌우 협공을 가했다. 김방경의 중군을 노렸다는 이야기는 이 전투에도 선봉을 고려군이 맡았다는 증거라 하겠다.

일본군의 돌격이 살벌했지만 김방경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김방경은 효시(소리가 나는 화살로 군사 지휘용으로 사용함)를 쏘아 올려 장수들을 부르는 한편 크게 고함을 내지르니, 왜병은 놀라 달아나고 말았다. 박지량, 김흔, 조변, 이당공李唐公, 김천록金天祿, 신혁新奕 등이 왜군을 파죽지세로 수수깡 넘어뜨리듯이 쓸어버리니 몽골 도원수 홀돈도 "몽골인이 싸움에 익숙하다 하지만 고려군에 비할 바가 아니로다."라고 감탄하고 말았다. 해가 진 후에야 전투가 끝났다.

김방경은 승세를 몰아 계속 싸우기를 원했지만 홀돈은 좌부원수 유복형이 유시에 맞아 다친 것을 핑계로 무리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하며 배로 돌아갔다. 그날 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통에 전함이 암벽에 부딪쳐 상당수가 파손되었다. 고려군 좌군사 김신도 배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사고를 당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다.

11월 여몽원정군은 합포로 귀환했다. 3만9천700 명 중 1만3천5백여 명이 수중고혼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전투를 문영지역(文永之役 분에이노에키)이라고 부른다.

여몽원정군은 충렬왕 7년(1281)에 다시 한 번 출동한다. 김방경은 3월에 합포에 도착하였고, 4월에는 충렬왕이 직접 합포로 행차하였다. 5월 1일에 다시 원정군이 떠났다. 이달 26일에 일기도를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조정에 들어왔다. 이것은 대마도를 정벌하고 일기도를 향해 가고 있었다는 뜻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때 대마도는 재차 정복되었던 것이다.

본 주제와는 관계 없지만 잠깐 이때 여몽원정군이 어찌 되었나를 간략히 적어보자.

일본은 적들이 또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이들은 선공을 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원은 사신을 보내 항복을 재차 권했으나 일본은 사신을 참수해 결전의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코케닌(御家人)이라 불리는 영주들을 동원해 방비에 나섰다. 이들은 배가 상륙하기 힘들게 방루防壘를 쌓았다.

여몽원정군은 5월 26일 일기도에 상륙했다. 일기도의 지휘관 소이자시(少貳資時 쇼니 쓰케토키)는 19세의 나이로 항전 끝에 사살되었다. 일본 측 기록을 따르면 적군은 부녀자를 강간하고 손에 구멍을 뚫어 밧줄로 묶어 끌고 다니는가 하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문제는 일본에 도착한 날짜가 너무 일렀다는 점이었다. 6월 15일에 합류하기로 한 강남군(중국 강남에서 출발하여 오기로 한 10만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들은 이미 6월 6일에 박다만(博多灣 하카다만)에 도착해 버렸다. 첫 전투가 벌어져 김방경의 고려군은 3백여 급의 수급을 얻었으나, 홍다구는 대패하고 말았다. 일본측 기록에는 천여 명을 죽인 것으로 나오며, 고려 측 기록을 보아도 진중에 역병이 돌아 3천여 명이 죽었다고 나온다. (전쟁에서 진중 역병이란 전사자의 다른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강남군은 예정보다 보름 늦은 7월 초에야 일본에 도착했다. 강남군과 합류한 여몽원정군은 상륙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그러나 상륙작전을 펼치기로 한 7월 30일 태풍이 불어닥쳤다. 수많은 배가 침몰했다. 고려배 일부만이 돌아올 수 있었다. 이 태풍으로 고려군도 7천여 명이 익사했다. 원과 강남군 역시 대부분 수장되고 말았다. 이것을 일본에서는 홍안지역(弘安之役 고안노에키)이라고 한다. 일본 땅에 상륙한 사람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일부는 노예가 되기도 했었다.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충렬왕 8년(1282) 12월 : 병신(丙申)에 상장군(上將軍) 인후(印侯)를 원나라에 보냈다. 동정(東征) 때에 봉성(峯城 파주(坡州))땅의 백성들이 왜(倭)에 몰입(沒入)되었다가 도망하여 원나라의 명주(明州)에 이르렀더니 황제가 이름을「갱생(更生)」이라 하사하고 백호(百戶 벼슬)를 주어 돌려보냈다.

이 뒤에도 일본 정벌은 꾸준히 추진되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왜구에 대한 기록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충렬왕 16년(1290) 1월 : 정미(丁未)에 대장군(大將軍) 원경(元卿)을 원나라에 보내 일본이 변방(邊方)을 침범한 것을 아뢰었다.

이 뒤 한동안 왜구에 대한 기록이 없다. 약간 애매한 기록이나 충렬왕 28년(1302)에 원이 요양성과 고려를 하나로 합한 뒤 수도를 요양으로 옮기고자 할 때, 고려는 일본을 방비하기 위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한다. 이때, 일본해적을 잡아서 바쳤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아직 왜구가 출몰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무튼 충렬왕 시기에는 왜구는 거의 보이지 않는데 아무래도 이것은 대마도가 일본 원정으로 정벌되었던 여파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구에 대한 기록은 한세대 후인 충숙왕 때 다시 등장한다.

충숙왕 10년(1323) 7월 경자(庚子)에 내부 부령(內府副令) 송기(宋頎)를 전라도(全羅道)에 보내니 왜(倭)과 싸워 100여 급(級)을 참(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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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록불의 잡학다식 : 대마도는 누구 땅인가? (96/08/22) 2008-07-19 20:36:31 #

    ... 영유권을 이제와서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긴 글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마포에서 대마도에 대한 이야기를 더 알고 싶은 분은 아래 포스팅도 읽어보세요. 고려, 대마도를 정벌하다 1 [클릭] 고려, 대마도를 정벌하다 2 [클릭] ... more

덧글

  • 나아가는자 2008/04/26 15:35 # 답글

    제 기억에 고려후기와 조선초기를 통틀어 대마도정벌이 5번 있었다고 알고있었는데, 그 정벌중 처음이 몽골의 일본침공과 관련되어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 제갈교 2008/04/26 16:14 # 답글

    음력 7월에 태풍이 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은 없네요. ;;;
  • 슈타인호프 2008/04/26 20:12 # 답글

    그러고 보니 여원연합군의 원정이 대마도를 두들겼다는 사실은 전혀 끼워넣을 생각을 못하고 있었군요. 전 포스팅 제목만 보고, 박위의 정벌을 이야기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 초록불 2008/04/26 21:01 # 답글

    슈타인호프님 /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저도 이 점을 짚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 네비아찌 2008/04/26 21:46 # 답글

    제 생각에는 고려 스스로 대마도를 친 게 아니라 몽골군에 배속되어 전쟁을 했었다는 점이 낮부끄러워서 점차 잊혀진 거 같습니다만......임진왜란 때 히데요시가 조선 정벌의 명분 중 하나로 여원연합군의 침공에 대한 복수를 든 점으로 봐서 피해자인 일본에서는 잊지 않았던 듯 합니다.
  • 초록불 2008/04/26 21:48 # 답글

    네비아찌님 / 그런 점도 있고, 원정 자체가 실패인 점도 한몫 했을 것 같습니다.
  • 自重自愛 2008/04/26 21:52 # 답글

    조금 다른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만, 김성호의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맑은소리, 1996)을 보셨습니까? 고종, 원종 대의 왜구와 충정왕 이후의 왜구에 대한 기원을 달리 잡고 있던데.
  • 초록불 2008/04/26 22:08 # 답글

    自重自愛님 / 저는 그 사람의 저작은 거의 신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김성호 이외에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 중 하나가 고종 대에서 원종 대까지 오랜 기간 기록이 없는 점, 그리고 다시 원종 대에서 충숙왕 대까지 기록이 없는 점을 이유로 듭니다만, 저는 그런 전제가 모두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고독한별 2008/04/27 12:19 # 답글

    제 생각도 같습니다. 작전권이 고려군이 아닌 몽골군에게 있었다는 사실과,
    그 뒤에 결과적으로 태풍으로 정벌이 실패해 버리는 '시원스럽지 못한' 결말
    때문에 자연스레 묻혀버린 게 아닌가 싶네요.
  • Dataman 2008/04/27 21:51 # 답글

    그도 그렇지만 조선조 자체가 고려조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보통 아니겠는지요.

    여담이지만 대마를 자전거로 종단한 적이 있습니다만, 과연 섬은 크지만 어부들의 정박지 이상으로는 전혀 쓸 수 없을 정도로 지형이 거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인구가 늘면 당연히 궁해질 수밖에 없고, 그런다고 일본이 (한반도 역대 정권과 달리) 섬을 비울 만한 행정력을 갖춘 게 고작 150년도 되지 않았으니 왜구가 나오는 건 필연적이라는 느낌이 오더군요.
  • 이야타 2008/12/11 22:59 # 답글

    아, 저도 제목만 보고선 첨엔 박위장군의 대마도 정벌을 말씀하시는 건줄 알았네요.

    고려후기와 조선초기를 통틀어 무려 5번이나 대마도정벌이 있었군요!

    박위장군과 이종무(병신 ㅅㅂㄻ -_-)밖에 몰라서;;; 무식의 소치를 달리고 있었군요 헛.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어느나라든지 민중들만 고생이군요.

    여몽or 여원연합군에 의해 강간당하고 ㅜㅠ 손이 뚫리고 등등(더이상 적는게 고통이네요;;)

    참혹한 일을 당한 일본 백성들이나(당연 특권층은 큰 피해없었겠죠...)

    몽골과 고려정부에 의해 억지로 끌려나가 배 만드는 부역에 시달리고

    군졸로 차출되어 부모형제와 헤어져 결국 낯선 땅 낯선 바다에 수장되고

    ㅜ_ㅠ 힘없고 백없는 서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서글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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