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대마도를 정벌하다 2 *..역........사..*

3. 고려, 왜구에 거덜나다

충숙왕 10년(1323)에 있은 왜구의 전라도 침공에 이어 충혜왕 후즉위년(1339)에도 그들의 변란을 걱정하는 상주가 있었다. 공민왕 즉위년(1351) 11월에 왜구는 남해현에 침입했다. 그후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 된다. 고려는 1350년부터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되었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우왕 3년(1377) 6월에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알 수 있다.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안길상(安吉祥)을 일본에 보내어 해적(海賊)을 금지할 것을 청하니 글에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당신 나라와 더불어 이웃이 되어 비록 큰 바다를 끼고 있으나 혹 때로 통호(通好)하였는데 경인년(庚寅年 1350)으로부터 해적(海賊)이 처음으로 일어나 우리 도민(島民)을 어지럽게 하여 각기 손상됨이 있으니 매우 안타깝도다. 이로 인하여 병오년(丙午年1366=공민왕 15년)에 만호(萬戶) 김룡(金龍) 등을 보내어 이 일을 보고하여 곧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금지하겠다는 약속을 얻어 조금 편안한 휴식을 얻었다. 근래에 갑인년(甲寅年 1374=우왕 즉위년)으로부터 그 도적(盜賊)이 또 방자하게 창궐하므로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나흥유(羅興儒)를 보내어 자문(咨文)을 가지고 온 당신 나라의 답신에 의하면 말하기를 이 도적(盜賊)은 우리 서해(西海)의 일로(一路)인 구주(九州)의 난신(亂臣)이 서도(西島)에 할거(割據)하여 무지하게도 구적(寇賊)이 됨에 원인이 있는 것이며 사실은 우리의 행한 것이 아니므로 곧 금지하겠다는 약속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하니 이로 자세히 알게 되었거니와 백성을 다스리고 도적(盜賊)을 금지하는 것은 나라의 상전(常典)이니 앞에서 말한 해적(海賊)도 다만 금약(禁約)만을 좇지 아니할 수 없으니 두 나라의 우호(友好)와 바닷길의 안정이 귀국(貴國)의 처리 여하(如何)에 있다.”


확실히 왜구는 공민왕 대에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중앙 조정의 인식을 말하는 것이고, 그 이전에 왜구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공민왕 대에 이르러 왜구는 경상, 전라 연해를 벗어나 강화도, 강릉까지 출몰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침입은 고려의 조운선을 노리는 것도 많아서 고려는 왜구 때문에 조세를 제대로 거둘 수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공민왕 3년(1354) 4월 왜(倭)가 전라도(全羅道)의 조선(漕船) 40여 척을 노략하였다.
공민왕 6년(1357) 9월 녹봉(祿俸)을 지급하는데 때에 왜(倭)로 말미암아 조운(漕運)이 통하지 아니하므로 9품의 녹과(祿科)를 지급하지 아니하였다.


왜구의 침탈 때문에 조운창을 옮기기도 했다.

공민왕 7년(1358) 4월 정유(丁酉)에 왜(倭)가 한주(韓州 한산(韓山)) 및 진성창(鎭城倉)에 침구(侵寇)하니 전라도(全羅道) 진변사(鎭邊使) 고용현(高用賢)이 연해(沿海)의 창고를 내지(內地)에 옮기기를 청하거늘 이를 청종(聽從)하였다.

왜구는 식량 뿐만 아니라 배도 약탈했다.

공민왕 4년(1355) 4월 신사(辛巳)에 왜(倭)가 전라도(全羅道)의 조선(漕船) 200여 척을 약탈하였다.

왜구는 연해 뿐만 아니라 점차 내륙으로까지 침입하기 시작했다.

공민왕 7년(1358) 8월 기묘(己卯)에 왜(倭)가 화지량(花之梁 수원)을 불태웠다.

공민왕 13년(1364) 3월에는 왜구가 불과 한 달 동안 다섯 군데를 약탈하기까지 했다. 공민왕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공민왕 15년에 일본에 검교 중랑장(檢校中郞將) 김일(金逸)을 보내 왜구 근절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 결과 공민왕 17년(1368) 1월에 일본은 승려 범탕, 범류를 보내왔으며 7월에는 일본 사신과 대마도의 도주 종경(宗慶 조케이)의 사신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기도 했다. 공민왕도 강구사(講究使) 이하생(李夏生)을 보내 화친을 도모했다. 그해 11월에는 대마도에 쌀 1천석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거제도에 왜인들이 거주할 수 있게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왜구를 근절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공민왕 18년(1369) 11월에 왜구는 대대적으로 침공을 재개했다. 천안, 예산, 당진의 조운선을 약탈한 것이다. 이때부터 왜구의 침입은 다시 활발하게 일어났다. 또한 공민왕 21년(1372) 부터는 그동안 침공하지 않았던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며 약탈을 시작했다. 왜구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불행한 선택이었는데, 이 약탈로 인해 왜구의 악몽이라 불릴 이성계가 전선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공민왕 21년(1372) 6월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화령(함흥)부윤으로 삼아 왜구를 막게 했다.

왜구는 공민왕 대에 115회, 우왕 대에 278회 침입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고려는 왜구에 의해 거덜나고 있었던 것이다. 왜구가 이렇게 설치고 일본 막부가 이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것은 일본 내부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1336년부터 1392년(이 해는 조선이 건국된 해이기도 하다)까지 일본은 남북조로 나뉘어 내전이 진행 중이었다. 천황도 둘로 나뉘어졌다. 이런 상황이어서 정상적으로 경제가 돌아가지 않았고, 물론 정치적으로도 통제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신흥국가 명도 왜구 때문에 골치가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명은 일본 실정막부室町幕府(무로막치 막부)의 3대 쇼군 족리의만足利義滿(아시카가 요시미츠)에게 조공무역을 허용하였고, 막부는 이를 위해 왜구 단속에 나섰다. 이로써 왜구 토벌에 대한 실마리가 잡혀나가기 시작했다.



4. 이성계의 활약

우왕 3년(1377) 6월 일본에 왜구 근절을 요청했으나 일본 측은 그들을 잡기 어렵다는 회신을 보냈다. 다급한 고려는 9월에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왜구 근절을 요청했다. 이때 사신으로 간 사람은 무려 정몽주鄭夢周! 고려가 이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쯤 되자 일본도 성의를 보여야 했을 것이다.

우왕 4년(1378) 6월 왜구가 청주를 침입했을 때, 일본은 원군 69명을 보내오기까지 했다. 생색내기에 불과한 숫자지만 일본으로서는 자신들과 왜구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했어야 했던 모양이다. 10월에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왜구 근절을 요청했으며 우왕 5년(1379) 5월에도 일본에서 군사 약간 명이 건너왔던 것 같다. 일본 막부는 아무튼 성의를 보여 잡혀간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등의 일을 했지만 왜구의 침입은 그치지 않았다.

한편 이성계는 우왕 3년(1377) 5월 지리산에서, 8월에는 해주에서 왜구를 쓰러뜨렸으며 우왕 4년(1378) 4월에는 김포에서, 우왕 6년(1380) 9월에는 황산에서, 우왕 11년(1385) 9월에는 함흥에서 왜구를 물리쳤다.

이중 1380년의 싸움이 바로 그 유명한 황산대첩이다. 1380년 8월 왜구는 5백여 척의 배를 가지고 충청도 금강 어귀에 상륙했다. 이때 최무선이 화포를 이용하여 적선을 모두 격침시켜버렸다. 돌아갈 배를 잃은 왜구는 내륙으로 들어가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는데, 그 피해가 극심했다. 이성계는 함양을 향해 집결하고 있던 왜구들과 황산에서 싸워 대승을 거두고 말 1,600 필을 노획했다. 조선 선조때 이 사실을 기려 황산대첩비를 세웠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부서졌다가 다시 세워지기도 했다.

이렇게 전국에서 활약을 하니 이성계의 위명이 천하에 떨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왕 14년(1388) 위화도 회군을 통해 이성계는 정권을 손에 넣게 된다.



5. 고려의 2차 대마도 정벌

그러나 국왕 즉위는 이성계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조민수와 이색이 힘을 합해 창왕을 즉위시켰으며, 창왕 원년(1389) 2월에 경상도 원수慶尙道元帥 박위朴葳가 대마도를 공격했다.

이미 대마도를 치자는 의견은 우왕 13년(1387)에 있었다. 정지鄭地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대마도와 일기도에 일본의 반민叛民이 웅거하고 있어 그들이 늘 침략해 오니 이곳을 쳐야 근본적인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정지는 전함을 건조해 왜구를 막았던 인물이라 배를 몰고 대마도를 정벌할 생각을 쉽게 했던 것 같다.)

박위는 전선 1백척을 동원하여 대마도를 들이쳤다. 김종연金宗衍, 최칠석崔七夕, 박자안朴子安 등이 종군했다. 정지상鄭之祥의 아들 정종鄭從도 군사 백여 명을 거느리고 참전했는데, 그의 어머니가 정지상 사후 홀로 지내다가 왜적들에게 참살되었던 복수를 위해서 종군했던 것이다.

박위는 정박해 있던 왜선 3백여 척을 불태웠고, 해안가에 있던 집들도 모두 불살랐다. 잡혀가 있던 본국인 남녀 백여 명을 찾아내 구출했다. 창왕은 크게 기뻐하여 "국가의 수치를 씻고 신민의 원수를 갚았다"라고 말하며 포상했다. 그러나 박위가 포로를 잡지 못한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실제로 박위의 원정은 충렬왕 때의 원정과 같은 효과가 없었다. 원정 이후에도 왜구의 침입은 계속 되었다. 박위는 위화도 회군 때 이성계와 뜻을 같이 해 개국공신이 되었으나, 왕자의 난 때 정안대군 이방원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이제 공은 조선이 이어받게 되었다. 태조 5년 조선의 첫 대마도 정벌이 있었으며 세종 원년에 두번째 대마도 정벌이 있었다. 두번째가 유명한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다.

그러나 박위의 정벌이 아무 효과도 없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런 일도 생겼기 때문이다.

창왕 1년(1389) 8월 : 처음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보고(報告)하기를,
“유구국왕(琉球國王)이 우리 나라가 대마도(對馬島)를 토벌(討伐)한다는 말을 듣고 사신(使臣)을 보내어 순천부(順天府)에 이르렀다.”


또한 창왕이 기뻐했던 것처럼 늘상 적의 침탈에 당하고 있다가 공세로 전환한 것 역시, 자신감을 가지게 하는데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박위가 대마도 정벌을 했을 때 이방원의 나이는 스물 셋. 그는 30년 후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게 될 것을 그때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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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어릿광대 2008/04/28 08:53 # 답글

    고려시대때에도 대마도 정벌이 있다는걸 몰랐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 이야타 2008/12/11 23:09 # 답글

    조선 태조때도 대마도 정벌이 있었군요~!

    몰랐던 사실들이 너무 많아서 쬐큼 부끄럽네효 ^^;
  • 초록불 2008/12/12 00:15 #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죠...^^;; 그냥 배워나가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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