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신화 - 취유부벽정기 *..역........사..*



김시습은 세조 때 생육신 중 한 명이다. 그가 쓴 금오신화에는 취유부벽정기라는 것이 있다. 부벽정을 취하여 유람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 시작 대목이 이렇다.

평양은 옛 조선의 서울이었다. 주나라의 문왕이 은나라를 정복하고 난 뒤에 기자를 찾아갔을 때, 무왕이 정치하는 법을 물으니, 그는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가지 법을 알려주었다. 이에 무왕은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고 신하로 삼지 않았다.

이곳의 명승지로는 금수산, 봉황대, 능라도, 기린굴, 조천석, 추남허 등이 있는데 이것이 모두 고적이며 영명사의 부벽정도 그 고적 중의 하나다.

영명사는 곧 고구려 동명왕의 구제궁 터이다. 이 절은 평양성 밖 동북쪽 20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긴 강을 굽어보고 평평한 들판을 멀리 바라보며 아득하기 끝이 없으니, 참으로 경기가 좋은 곳이다.


위 글로 볼 때, 조선 초에 평양을 고조선의 도읍지이며 고구려의 도읍지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 중 기린굴, 조천석, 구제궁 터라는 것은 모두 동명성왕과 관련되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후대에 붙여진 전설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였다는 이야기도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주장할 수 있을까?

그렇진 않다. 평양에 동명성왕의 전설이 남은 것은 평양이 훗날 고구려의 수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 관련도 없다면 당연히 전설도 생길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평양이 어느 시점에서는 고조선의 수도였다는 사실 정도는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