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설이다 - 악플러 버전 *크리에이티브*



이 패러디는 영화가 아니라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당연히 스포일러 만땅입니다. 원작을 보실 분들은 읽지 마세요.



회선이 좋지 않은 날이면 로버트 네빌은 접속하는 시간을 놓치곤 했다. 그럴 때면 1등 리플을 딴 놈들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조금 더 분석적이었다면 놈들이 나오는 시간 정도야 쉽게 계산해낼 수 있겠지만 그는 뉴스가 새로 올라오는 시간을 추측하는 옛 습관을 고수하고 있었다. 회선이 좋지 않은 날이면 하등의 보탬도 되지 않는 습관 말이다. 아무튼 그런 날이면 그는 프록시를 돌리는 것을  포기하고 차라리 자기 ip로 접속하는 것을 택했다.

그는 논리학 사전을 다시 꼼꼼히 읽고 오늘 달 논리오류 공격자료들을 준비했다. 악플러들이 잠자고 있는 이 낮시간 동안 악플러 사냥을 나가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악플러들의 정체를 밝혀내고 팩트와 논리로 그들을 깐 다음 그들이 남의 아픔을 짓밟은만큼의 회개 요청으로 되갚아준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악플병이라 불린 이 괴이한 병이 지구를 휩쓸었고, 모든 것은 실명제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PC방은 다 없어졌고, 1인 1회선의 원칙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악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네빌은 그들을 공격하고 멘탈을 털어버려 재기불능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의 공격에 걸려 회선을 닫아버린 악플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점점 악플러들의 공세도 거세졌다. 악플러들은 프록시를 뚫고 네빌의 집으로 몰려와 해킹을 시도했다. 방화벽에 남는 그 수많은 흔적들. 하지만 하나같이 바보들이라 네빌의 방화벽을 뚫지는 못했다.

어딘가에는 네빌과 같은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믿었지만 수 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네빌과 같은 일을 하지 않았다. 이 악플러들을 무찌를 정의의 용사가 정녕 이 세상에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일까?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테라 바이트의 악플을 담은 하드뿐이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신념을 이해할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너무나 외로웠다. 지독한 고독. 이 모든 것이 악플러들 때문이었다. 그들의 악플 때문에 아내와 딸이 모두 자살하고 말았던 것. 그 생각만 하면 그의 가슴은 오그라지듯 타들어갔다.

하지만 그도 슬슬 지치고 있었다. 아무리 방어해도 악플러들은 끝없이 생겨나고 있었다. 하나를 해치우면 열이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던 날 그를 이해하는 리플러가 등장했다.

- 당신을 이해해요. 나도 악플에 상처를 받았지요.

진짜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외로웠기에 그가 왜 악플러들을 사냥하는지 털어놓았다. 그의 아내와 딸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는 쪽지 하나를 받았다.

- 이제 나는 당신을 진짜 이해하게 되었어요. 악플로 그런 상처를 입었다면 악플러들을 공격하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요. 하지만 그거 아세요? 악플은 이제 하나의 문화에요. 악플을 달지 않는 사람은 전세계에 한 명도 없어요. 그리고 우리는 악플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혔지요. 하지만 당신은 팩트와 논리를 이용해서 악플러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있어요.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을 용납할 수 없어요. 당신의 인터넷 선을 단절시킬 거예요. 그동안 당신의 정체를 알 수 없었고, 방화벽도 뚫지 못했지만 이제는 당신이 말한 사건 기록을 통해서 당신의 주소를 알아냈어요. 곧 공격이 시작될 거예요. 접속을 계속 하려면 빨리 새로운 회선을 신청하세요. 그것만이 당신이 살 길이에요. 그리고 우리와 같은 악플러가 되세요.

네빌은 믿음이 배반당한 것을 알았다. 하지만 회선을 바꾸고 사라지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제와서 그의 모든 신념을 배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도 알았다.

모두가 다 악플러가 된 이 세상. 그러니 악플러는 더 이상 악플러가 아닌 것이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 없다. 이제는 오히려 그가 악플러였다. 팩트로 무장한 그가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낸 사람이었다. 방화벽이 무너지고 프록시가 해체되고 컴퓨터가 침입자에게 장악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래 또다른 시작이야.  악플러들을 잡아먹고 있었던 자신. 프록시로 무장하고 방화벽 속에서 군림한 댓글러. 그리고 그를 응징한 새로운 인터넷의 신화!

이제 나는 전설이야.

덧글

  • TheKid 2008/05/17 07:28 #

    바로 어제 소설을 읽었는데..
    완벽한 압축 패러디군요 ^^

  • 어릿광대 2008/05/17 07:50 #

    이해가 빨리 되는 소설이네요 하하.
    (그렇다고 저는 악플러는 아닙니다 덜덜;;)
  • 마기스뗄 2008/05/17 08:00 #

    초록불님의 패러디 소설은 언제봐도 멋집니다 :-)
  • 초록불 2008/05/17 08:59 #

    TheKid님 / 절묘한 타이밍이었군요.

    어릿광대님 / 선플러십니다...^^;;

    마기스펠님 / 고맙습니다.
  • 잠본이 2008/05/17 09:06 #

    너무나 한국적(?)인 각색이라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 초록불 2008/05/17 09:22 #

    잠본이님 / ^^;;
  • 아브공군 2008/05/17 10:31 #

    초록불님 만만세.
  • catnip 2008/05/17 11:32 #

    원작을 읽어보고싶은 생각이 안들었는데,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고 있습니다!
  • 나루 2008/05/17 12:28 #

    소설 영화 둘다 안봤는데 이상하게 이해가 되는군요..... ㅋㅋㅋ
  • 南海雙雄 2008/05/17 13:31 #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란 말이 비로소 살떨리게(!) 이해가 되고 있습니다. ^^^;

    과연 전설이십니다. b^^^
  • 초록불 2008/05/17 15:10 #

    catnip님 / 원작은 한 번 읽어볼 가치가 있는 소설입니다.

    나루님 / 안 본 분도 이해야 당연히 할 수 있어야죠. 기껏 포스팅했는데, 이해 못하면 섭섭할 겁니다.

    南海雙雄님 / 원작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찬사는 원작자 리처드 매디슨이 받아야지요...^^;;
  • 장재천 2008/05/17 16:47 #

    이거 좀 무섭네요... 너무 적절한 패러디 -_-;;
  • 南海雙雄 2008/05/17 16:51 #

    원작, 영화 이미 모두 섭렵했습니다.

    초록불님은 당연히 받으실 수 있습니다. :)
  • 초록불 2008/05/17 17:02 #

    장재천님 / 원래 원작도 좀 무서운 분위기죠.

    南海雙雄님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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