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항쟁 - 한일회담 반대운동 *..역........사..*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은 전쟁 패배를 선언한다. 이날 조선, 대만 등의 식민지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일본 땅에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200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이들 조선인의 귀국을 돕지 않았고, 이들이 일본에서 가지고 갈 수 있는 재산에도 제한을 두었다. 이 결과 귀국하지 못한 조선인이 6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일본은 자국 내의 조선인을 단속하기 위한 외국인등록령을 1947년 5월, 새로운 헌법 발효 전날 칙령 - 따라서 이것이 구헌법에 기초한 최후의 칙령이었다 - 으로 발표했으며, 1949년 9월에는 북한을 지지하는 재일조선인연맹을 강제해산시키기도 했다. 한민족 교육을 철저히 탄압하여 민족학교를 폐쇄시키고 이에 항의하는 조선인들을 탄압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에서는 남북한 간에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은 한국의 배후 기지가 되는 일본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에 양국의 수교를 주선하고자 했다.

1951년 10월 동경에서는 제1차 한일회담 예비회담과 본회의가 열렸다. 한국 측은 재일교포의 영주권 문제, 강제퇴거 문제, 생활보호 문제에 있어 특별대우를 요구했고, 일본 측은 이를 거부했다. 이때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따른 정신적, 물질적 피해 보상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한국에 남겨놓고 온 재산반환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1953년 4월 제2차 한일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7월이 되자 회의는 다시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한국 측은 일본이 과거에 대한 반성을 문서로 발표할 것을 요청했고 일본은 이를 무시했다.

1953년 10월 15일 제3차 한일회담이 열렸다. 일본은 이번에도 일본이 한국에 남겨둔 재산의 반환을 요구했다. 한국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청했고, 이에 대해 일본은 식민지 시절에 철도, 항만, 농지 조성 등 한국에 많은 투자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유명한 구보다 망언이다. 한국 측은 이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고 일이 거부해서 회담은 6일만에 결렬되고 말았다.

일본은 1957년 12월 구보다 발언은 구보다의 사적인 발언이라고 변명하고, 한일회담의 재개를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여 1958년 4월에 제4차 한일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역시 진전은 없었다.

1958년 8월, 일본에서 북송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일본은 불경기로 인해 재일교포의 80%가 실업상태였다. 이때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북한은 매력적인 땅이었다. 한국 정부는 이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싶어했으나, 북송운동은 일본의 묵인 아래 진행되어 1959년 12월, 975명을 태운 선박이 북한을 향해 떠났다. 약 10만 명의 재일교포가 이때 북한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고 그해 10월 제5차 한일회담이 열렸다. 일본 경제는 한국이라는 시장이 필요했고, 한국은 경제발전을 위한 자금 - 일본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배상금이 필요했다. 이해관계가 합치하여 회담은 빠른 속도로 진행될 듯 했으나, 5.16쿠데타에 의해 중지되었다.

1961년 10월 제6차 한일회담이 열렸다. 한국 측은 김종필, 박정희가 모두 도일하여 협상에 열의를 보였다. 한국은 4억 달러를 요구했으며 이것을 배상금이라 부르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일본은 수천 달러 이상은 낼 수 없다고 튕겼다. 

1962년 11월, 김종필과 대평정방大平正芳(오하라)은 무상원조 3억 달러, 유상 원조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를 지불키로 합의했다.

1964년이 되자 한일수교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3월 24일부터 27일에 걸쳐 연일 수만 명의 군중이 시위에 나섰다. 결국 4월 4일로 예정되었던 회담이 중지되기에 이르렀다.

3월 24일 고려대의 상대 학생회장 이명박, 정경대 학생회장 박정훈 등이 이끈 학생들은 안암동에서 출발해 국회의사당을 점거해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때 국회의사당은 여의도가 아니라 서울시청 건너편 서울시 의회 건물에 있었다.)

"우리는 종주국 없이 한번 살아보자. 이것이 우리의 피맺힌 절규다. 일제의 망령을 박멸할 때까지 우리는 영원한 투쟁의 대열에 참여할 것을 여기서 엄숙히 선언한다."

3월 30일 박정희는 각 대학의 학생회 대표들을 불러 면담했다. (오늘날, 이명박은 왜 이런 노력도 안 하는 거지?)

4월 1일 김종필과 대평이 주고받은 메모가 공개되고 11일, 학원사찰이 이슈로 떠오르며 박정희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시위는 다시 대학가를 휩쓸었다.

5월 21일 무장군인 13명이 법원에 난입해서 시위 참가 대학생들에게 영장을 발부하라고 압력을 행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다. (무리한 수를 놓을수록 시위는 더 커진다는 것을 왜 아직도 모르지?) 이날 <한일굴욕회담 반대 학생총연합회>이 결성되었다.

5월 31일, 이명박은 고려대 구국투쟁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다.

6월 3일, 3만 명에 이르는 시위대가 국회의사당 앞에 운집했다. (그러니까 지금 시청앞 광장에 시위대가 모인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라는 것) 이날, 박정희는 비상계엄령을 발동했다. (이명박은 6월 15일에 체포되었다.)
계엄을 통해 국민의 입과 손발을 묶어버린 박정희 정권은 12월 제7차 한일회담을 열었다. 이때도 일본측 대표의 망언이 있었지만 군사정권은 그것을 은폐했다.

1965년 6월 한일회담이 타결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조약에는 일본의 사과가 없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는 그후로도 여러차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조약에는 청구권 문제를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명시해 놓아서 이후 일본군 성노예 문제와 같은 사안에 있어서 일본이 발뺌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 시간 이명박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계엄을 통해 국민을 찍어눌렀던 박정희를? 자신도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때로부터 44년이 지났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할까?

핑백

  • 절대적이며 상대적인 공간 : 시위 관련 링크 정리. 2008-06-03 04:35:38 #

    ... 를 좀.이에 대해 제 이야기를 좀 써야 하는데,정신이 없다보니까계속 제 머리로 들어오기만 하고나오질 않네요.뭐, 쥐어짜낸다고 나오는 게 아니니. http://orumi.egloos.com/3769176시위에 대해 넓게 바라보기. http://news.egloos.com/1764299웃음 고민하기. http:// ... more

덧글

  • 死海文書 2008/06/03 01:19 #

    두고보면 결과가 나오겠지요.
  • FreeMan 2008/06/03 01:43 #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갑자기 무서워지네요... 자신이 앉았던 저 자리에 아무개의 시민을 앉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버렸습니다...
  • 이준님 2008/06/03 04:51 #

    1. 일본의 경우는 외국에 있는 자국인의 귀환마저도 어려웠습니다.(거의 폐선이나 다름없는 일본 최초의 항모까지 동원해서 싣고 왔지요) 그나마 동북3성에 있던 사람들은 소비에뜨의 손아귀에 떨어져서 온갖 고생을 하는 것도 방치할 정도였지요. 그러니 "조선인"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2. 미 귀국 교포중 상당수는 강제징용이기보다는 일종의 이민의 성격이 짙어서 약간이나마 재산을 축적한 일본을 버리고 오기는 어려웠지요.

    3. 4.19 멤버들이나 6.3 멤버들의 이후 삶을 본다면 쯧쯧이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ps: 강원용 목사님의 회고록에 보면 6.3 즈음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사람이 윤보선이었다고 하지요. 시국이 어떻게 될지 걱정되서 찾아갔더니 졸개들이랑 "누가 장관하냐"고 싸움이나 하고 있었다는 -_-;;(그러니까 이렇게 시위가 격화되면 어차피 박정희는 물러날거니 윤보선은 대통령이 될걸 기정 사실화 하고 조각에 골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 어릿광대 2008/06/03 09:12 #

    뭐라고 할말이 안나오네요..
  • 아롱쿠스 2008/06/03 09:46 #

    헌데, 공판사진에서 왜 서승만씨만 런닝차림이죠?
  • 초록불 2008/06/03 10:34 #

    역사의 미스테리입니다. ^^
  • 措大 2008/06/04 01:59 #

    저 당시에는 미결수의 경우에 흔히 수의를 입혀서 재판정에 내보냈는데, 옥바라지로 가족들이 해서 들여보내는 것들이죠. 결국 돈이 듭니다.

    어쩐지 사정은 잘 모르지만, 이명박씨가 가난했다는 점에서 왜 저런 차림으로 혼자 앉아 있는지 알거 같아요. 저는 저 사진만은 굉장히 짠하더군요.
  • 진성당거사 2008/06/03 22:10 #

    위의 이명박 사진을 보고, 저희 사학과 선배님께서 글을 쓰신 게 있는데, 긴 글이지만 여기에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44년전 어느 한 청년의 이야기>



    5.16 쿠데타로 집권한 우리나라의 모 육군 소장이 1963년 직선제를 통해 대통령이 된 이후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부터 단절되어있던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였습니다.

    일본은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하여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미국을 비롯하여 서구 승전국들에게 전쟁책임을 인정하고 사죄와 배상을 약속한 상태였습니다만,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침략사실에 대해서는 책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당연히 배상문제도 언급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한국 전쟁에 휘말려 있던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또한 꽤 입장이 매우 곤란한 처지였습니다. 중국 본토에서 쫓겨나 겨우 상임이사국 지위를 유지하던 대만의 국민당과 본토의 중국 공산당 정부 모두 분열로 인해 승전국임에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특히 제2차 국공내전 승리 직후에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있던 중국 공산당 정부는 당시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국민당 정부에 밀려 중국 본토의 공식적인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기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외교적 항의조차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렇게 일본은 아시아 각국에 대한 전쟁범죄에 대한 부분에서는 면죄부를 받은채로 다시금 국제사회에 편입하게 된 것입니다.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고자 했던, 만주 주둔 일본 관동군 소속 장교 출신의 이 대통령은 그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한일국교정상화를 생각했다고도 전해집니다만 이보다는 또한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한일간의 안보협력을 통해 중국과 소련을 견제하는데 골몰했던 미국과 이해관계가 맞았던 것이 더 큰 이유로 보입니다. 사실 1950년의 한국전쟁 발발 이후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위한 자본주의 진영의 최후 방어선으로서 한국과 일본이 위치한 극동이 꼽혔고 그런면에서 동북아시아에서 자국 세력의 강화를 추구하는 미국에게 있어서 한국과 일본의 파트너십 구성은 매우 매력적인 부분이었습니다. 미국은 본래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한일 국교수립을 요구했었으나 보수적이나 비타협적 민족주의 경향의 이승만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서 답보상태였던 실정이었습니다. 그런만큼 쿠데타로 집권하여 정통성에 큰 약점을 갖고 있었던 당시 한국의 군부출신 신정부의 집권은 미국에게 있어서는 호재나 다름없었지요. 또한 한국전쟁이라는 경제적 호기를 활용하여 54년부터 57년까지 거듭된 진무((神武 )경기를 통해 전쟁의 후유증을 털어내고 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던 일본 또한 대규모 상품시장으로서 한국 진출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실정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시기 대통령의 지시로 신정부 권력의 핵심이었던 김종필이 전권을 가지고 한일 수교 회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본측 대표 오하라와 협상을 진행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양국 간의 이해관계가 엇갈린 탓에 협상은 해를 넘기게 됩니다. 그 중에 가장 갈등이 심했던 분야가 바로 독도 영유권 문제였습니다 .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김종필-오하라 메모, 특히 협상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독도를 아예 폭파해 버릴까라고 물었다고 전해지는 김종필의 발언은 진위여부를 떠나서 독도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등장하는데, 무서운 것은 협정문서가 민간에 공개된 지금도 김종필-오하라 메모라 불리는 독도 영유권과 관련한 문제는 아직 전문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역사가에 따라서는 이 때 김종필이 비공식적으로 합의한 사항 중 대한민국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데 심각한 제약이 있는 조항이 있었으며 바로 이 조항을 통해 일본정부가 수십년간 독도문제를 놓고 국제재판소에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근거가 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시기 일본으로부터의 어떠한 사과나 배상도 없는 상태로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의 불행한 경험을 고스란히 겪은 바 있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국교정상화시도를 굴욕외교로 규정짓고 전국민적인 협상 반대운동을 펼칩니다.

    1964년 6.3일, 분노한 국민들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훗날 6.3운동이라고도 불리는 이 대규모 군중집회는 서울 소재 대학생들이 주도하였습니다. 당시 이 운동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내란소요죄의 명목으로 체포된 사람들 중에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스물 네살의 청년이 있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여를 복역한 이 청년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후에야 풀려났습니다

    그가 감옥을 들락거리는 시기였던 1965년 마침내 한일국교가 수립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모두 무상 3억달러의 "독립축하금"과 경제협력 자금의 명목으로 유상 3억달러, 그리고 2억달러의 상업차관을 알선할 수 있도록 지원받고 일제강점기동안 일본이 조선에게 가했던 모든 피해와 1931년 만주사변으로부터 시작되는 일제의 전쟁기간동안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전쟁범죄에 대하여 식민지 침략행위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협정문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는 평화선(어족자원보호선) 철폐, 독도문제 회피, 징용·징병·정신대·원폭 피해자 보상 회피, 징용·징병자의 강제 저축금 반환 불청구, 문화재 반환 포기, 재일동포 법적 지위 보장 포기가 전제된 것이었지요. 그나마 일시불도 아닌 10년 지급에 대한민국 정부는 동의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나마도 전쟁 혹은 피해 배상금이 아닌 독립축하금의 명목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명목의 공식적 사과 성명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무상 3억달러는 상당부분 현물로 지급된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 경제개발 과정에서 일제 플랜트 등을 독점적으로 도입해야한다는 조건이 포함된 "계약"이었습니다. 이는 3년간 식민통치를 겪었던 필리핀이 일본으로부터 무상으로 5억5천만달러의 전쟁배상금과 2억 5천만 달러의 유상차관을 받아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참고로 이 시기 한일협정을 일정까지 조정하면서 주도했던 미국 CIA보고서에 따르면 대략 61년부터 협정이 종결되는 65년까지의 4년간 군정에서부터 집권공화당에 이르는 군부 집권세력에게 일본의 6개 대기업으로부터 약 6600만불의 정치자금이 유입되었습니다

    한일협정 반대를 외쳤던 그 청년은 당시 이러한 굴욕적인 협상결과를 보면서 무엇을 느꼈을지 아직까지도 궁금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간 그의 행적은 꽤 정확히 알려져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시위운동주도 경력으로 그 어떤 곳에서도 취직할 수 없었던 그 청년은 자신의 반정부 운동경력에 대해 스스로 변호하면서 국가 경제발전을 위한 역군으로서 일하겠노라는 강력한 의지를 내보인 청원서를 청와대에 넣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 이 청년을 얼마나 갸륵히 여겼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만 아무튼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사회진출이 허용된 이 청년은 건설회사가 주력이던 모 중견기업에 입사하게 됩니다.

    여담입니다만 그 때의 청원서를 기억하고 있던 당시 대통령이 이후 청와대를 방문했던 그 중견기업의 오너에게 문득 그의 근황과 안부를 물었다고 합니다. 건설사의 오너는 이 청년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나 청와대에서 돌아온 직후 대한민국 제1의 권력자와 안부를 묻고 지내는 사이로 여겨진 이 청년을 즉각 사장실로 불러올렸다고 하지요.

    훗날 입사 5년만에 이사, 12년만에 사장자리에 올랐다는 이 청년의 신화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지금 그는 자기가 청원서를 보낸 수신지였던 바로 그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며칠 전의 일입니다. 스물네살의 젊음으로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 반대를 외쳤던 바로 그 입이 예순여덟이 되자 "우리가 일본도 용서하는데, 친일 문제는 공과를 균형있게 봐야 한다"라고 했다고 하네요. 사실 그간 한일 역사를 되돌이켜 본다면 우리 쪽에서 아무도 용서한 기억이 없을 뿐더러, 또한 그 쪽에서도 용서를 청한 사례가 없는데 말입니다

    피끓는 청춘이 40년을 넘기면 기억이 가물거릴 수도 있겠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이 40년간 같은 생각과 뜻을 가지고 그 자리에 머문다는 것이 더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겠지요, 다만 피끓는 청춘을 바쳐 민족과 조국의 정의를 구현하고자 했던 한 청년이 이처럼 극적으로 변하여 같은 입으로 정반대의 다른 말을 내뱉을 수 있다는 것 또한 20세기 한국 현대사가 가지는 비극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1964년에 스물 네 살이었던 그 청년이 누구인지는 굳이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라 보입니다. 다만 피끓는 젊음으로 정의를 외친 한 청년이 노회하기 그지없는 노인이 되어, 자신이 외치던 정의와 정확히 대척점에 서있는 불의에 대하여, 한반도 내에서 그만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권력으로서 면죄부를 주고자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지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 2008년의 대한민국입니다. 약관 스물 네살의 청년이던 시절의 그가 지금 바로 이 시대로 돌아온다면 이순을 넘어 종심에 다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느낄지가 궁금합니다. 참으로 궁금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현 정부의 지속적인 실정과 일국의 지도층으로서 한심하기 그지없는 작태들을 지켜보면서도 그저 울분만 내고있을 뿐인 저 자신의 현재를 종종 부끄럽게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을 알아가고 현실을 인식할 뿐이라는 미명 하에 작금의 불의를 방관하거나 세월만 축낸다면 아직은 이십대의 끝무렵에서 맴도는 저 또한 40여년이 지나면 제가 아는 바로 그 청년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게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명제를 수행한다는 것 조차도 두려워지는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한 청년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신임하던 심복의 총탄에 의해 술자리에서 사살된 후 지금은 경상북도 자기 고향의 어느 체육관 이름으로 남은 모 대통령이 군복을 벗으시던 날의 어록을 잠시 빌려서 말하자면,

    다시는 이 땅에 그와 같은 불행한 청년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말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 아슈 2008/06/04 03:45 #

    자신은 박정희를 담고자 소망하며 강력히 닮음 정책으로 선거운동을 했지요.
    박정희 사진 앞에서, "제가 좀 닮았죠 허허." 란 발언을 한 걸 보고 기절했었죠..
  • 2008/06/04 08:27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8/06/04 11:45 #

    어떤 것 말씀이신지...
  • 사과향기 2008/06/04 22:12 #

    아 지워졌네요. 아침에 보니 이상한게 있더라구요. 스팸성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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