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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가객과 이문열의 금시조
비교를 하기 전에 [금시조] 연대상의 문제점부터 지적한다.

나는 소설이 그 안에서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을 참기 힘든데, [금시조]가 그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금시조]의 주인공 고죽이 스승 석담 선생에게 맡겨졌을 때, 그는 열 살이었다.
그의 숙부가 상해 임시정부에 망명하고자 했으므로 이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1919년 이후가 된다.
그의 딸 추수秋水는 고죽이 72세로 죽을 때, 33살이었다. 그녀는 중일전쟁이 임박하였던 때에 전주 기생을 어미로 태어났으므로, 1930년대 후반생이 된다.

만일 고죽이 1919년에 10살이었다고 하면, 그래서 72살에 죽었다면 그는 1981년에 죽은 것이다. (이 소설은 1981년에 발표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추수는 1949년에 태어난 것이 된다. 해방 후에 태어난 것이 되므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문열은 본래 고죽이 1970년대쯤에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쓴 것이 틀림없다. 추수의 어미인 매향을 중일전쟁 직전에 만난 것으로 가정하면 대충 연대가 맞는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석담에게 맡겨졌을 때 이미 스무 살이어야 한다. 이런 건 쓰기 전에 좀 맞춰주었으면 좋겠다. 이외에도 여러 연대가 도무지 한쪽을 맞추면 한쪽이 어그러지기 때문에 읽는 내내 거슬렸다.


그럼 본격적으로 두 작품을 비교해보자. 두 작품은 모두 예술,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먼저 [가객](1975)을 살펴보자.

가객의 화자는 문둥이 깨꾸쇠다. 마을에서 쫓겨나 강밖에서 산다. 그는 가객 수추壽醜를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을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수추를 기다리고 있다. 수추는 음악에 미친 사람이었다.

너무도 오랫동안 신묘한 가락을 찾아내느라고 이제는 내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내 본명이 무엇인지, 내 부모는 누구인지, 내 나이는 얼마인지, 내 친구는 누구였는지. 내 동네 사람은 어떠했는지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완전한 음율을 찾아냈다. 아니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완전한 음률을 부른 사람인 자기 자신의 얼굴에 음악을 완성한 성취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불만을 가졌다. 자기 얼굴을 미워하게 되었다.

나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내 얼굴이 추악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나의 음률을 완성했던 그 순간부터였다.

그가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얼굴에 모여든다. 아니,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까지도 그 노래에 취해 다가온다. 하지만 음악이 끝나는 순간 그들은 모두 돌아선다. 아니, 돌멩이를 집어던진다. 세상에 더 할 수 없이 추한 그 모습에 진저리를 치는 것이다.


수추의 얼굴이 미워진 것은 그 자신이 자기를 미워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예술만으로는 사랑받을 수 없다는 건, 어쩐지 오늘날 이문열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럼 여기서 [금시조]를 들여다보자.
이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을 가지고 있다. 즉 작가가 신의 노릇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고죽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가출했으며, 심지어 삼촌조차도 그를 버리고 떠난다. 그는 시작부터 미움을 받는 아이였다. 그는 나쁜 피를 받아서 태어났다.

거기다가 그때까지 억눌리고 절제당해 왔던 그의 피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역시 그 무렵에 고향엘 들러 알게 된 것이지만 그의 부친은 천석재산을 동서남북 유람과 주색잡기로 탕진하고 끝내는 건강까지 상해 서른 몇에 요절한 한량이었고, 그의 모친은 망부(亡夫)의 탈상을 기다리지 못해 이웃집 홀아비와 야반도주를 해버린 분방한 여자였다. 소년시절에는 엄격한 스스의 가르침과 그 길밖에는 달리 구원이 없으리라는 절박감에, 그리고 청장년(靑壯年)시절에는 스스로 설정한 이상의 무게에 눌려 잠들어 있었지만, 한번 깨어난 그 피는 걷잡을 수 없게 그를 휘몰았던 것이다. 그는 미친 듯이 떠돌고, 마시고, 사랑하였다.

이문열 소설의 주인공들이 대개 그렇듯이 고죽도 "운명적으로" 그릇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었다. 그는 석담으로부터 이유도 없이 경원시된다. 한참 정이 그리운 나이에 그는 차갑고 기계적인 대접밖에 받지 못한다. 그냥 느낌 때문에!

그 어떤 예감에서였는지 석담선생은 처음 그를 숙부에게서 떠맡을 때부터 차가운 경계로 대했다.

그 이유를 나중에 석담은 이렇게 말한다.

첫째로 저 아이에게는 재기(才氣)가 너무 승하오. 점획(點劃)을 모르고도 결구(結構)가 되고, 열두 필법(筆法)을 듣지 않고도 조정(調停)과 포백(布白)과 사전(使轉)을 아오. 재기로 도근(道根)이 막힌 생래의 자장(字匠)이오. (중략) 너무 허물하지 마시오. 실은 나 자신도 왜 저 어린아이가 마음에 걸리는지 알 수 없소. 웬지 저 아이를 볼 때마다 이건 악연(惡緣)이다. 이런 기분뿐이오.


이처럼 특별한 이유도 없이 스승의 사랑은 커녕 늘 홀대만 받은 고죽이 비뚤어진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인 셈이다. 이문열은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재단한다. 고죽이 결국 나빠졌기 때문에 석담이 옳았다는 것이다. [가객]에서 수추가 미움을 받은 것이 그 자신에게 이유가 있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방법이다. 그럼 [가객]으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수추는 어느날 거문고의 줄이 끊어지면서 일어난 불협화음 때문에 깨달음을 얻는다.

수추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밤 가운데서 진실로 오랜만에 평화로운 잠을 잤다. 그는 노래로부터 놓여난 것이었다. ... 수추는 이 죽음과 같은 휴식 안에서 비로소 노래만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미워했던 제 모습이 이제는 변화된 것을 알았다.

그는 오직 예술만을 위한 예술로부터 벗어났다. 그는 숲을 떠나 마을로 돌아왔으며,

잔치가 있는 집이나 슬픈 일이 일어난 집을 찾아가서 주인께 공손히 청하여 조심스럽게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었다. 그의 노래는 아늑하고 힘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한 정과 말할 수 없는 용기를 돋아나게 했다. 수추는 제 추했던 얼굴을 이제는 모두 잊었다.

위처럼 변화했다.


[금시조]에서 고죽은 이런 변화를 얻지 못한다. 그는 마지막 순간 자신이 그간 행해온 모든 것을 부정한다. 자기 작품 모두를 불태워버리고, 그 불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그러나 그때 고죽은 보았다. 그 불길 속에서 홀연히 솟아오르는 한 마리의 거대한 금시조를. 찬란한 금빛 날개와 그 험한 비상을.

보았다고 한다. 대체 이것은 무엇이었을까? 진보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보수우익은 종종 반대를 통해 자신들의 가치관을 확립한다. 80년대가 끝날 때까지 우리 사회 보수의 주장은 "반공"이었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을 가치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그런 반대하는 가치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가령 과격불법 촛불시위반대 시민연대라든가...) 고죽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잿더미에 불과했고, 그 홀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인생을 마쳤다. 이문열은 그 "깨달음"을 신의 위치에 서서 독자들에게 받으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스승 석담은,

그렇지 않다. 물에 충실하기로는 거리에 나앉은 화공이 훨씬 앞선다. 그러나 그들의 그림이 서푼에 팔려 나중에는 방바닥 뚫어진 것을 메우게 되는 것은 뜻이 얕고 천했기 때문이다. 너는 그림이며 글씨 그 자체에 어떤 귀함을 주려고 하지만, 만일 드높은 정신의 경지가 곁들여 있지 않으면 다만 검은 것은 먹이요, 흰 것은 종이일 뿐이다.

라고 하여 자못 드높은 의기를 보여주는 것 같으며, 또한 고죽이 마지막 순간에 자기 자신을 부정하기 때문에 마치 이런 석담의 가치가 인정받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문열의 속내는 따로 있다. 석담을 빼닮았던 충실한 제자, 초헌의 행동을 보라.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초헌이었다. 그 역시 까닭 모르게 노한 얼굴이 되어 잠깐 고죽을 노려보더니, 말리려는 사람을 거칠게 제쳐 버리고 불을 질렀다. 뒷날 고죽을 사이비(似而非)였다고까지 극언한 것으로 보아, 그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석담선생적(的)인 기질이 고죽의 그 철저한 자기부정(自己否定) 또는 지나친 자기비하(自己卑下)에 반발한 것이리라.


고죽의 뜻은 제자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오직 혼자만의 깨달음. 그것이 결국 이문열이 바라본 예술의 극의였던 것이다. 그럼 [가객]은 이 점을 어찌 말하고 있는가?

수추가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것을 안 거리의 지배자 - 장자는 그를 잡아와 노래를 부르지말라고 말한다. 수추는 살아있는 한 노래를 부를 것이라 대답한다.

"그러면 이곳을 떠나 아무도 없는 데로 가서 혼자 노래를 부르는 것은 용서해주지."
"저는 제 노래를 원하는 사람들 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장자는 그를 가두고 그의 악기를 밥상으로 만들었다. 예술의 도구를 식욕의 도구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옥에 갇힌 수추는 굴하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장자는 그의 혀를 잘라 높은 감나무 가지에 매달았다.

나무에 앉는 까마귀마다 수백번씩 그 혀를 쪼았으나 너무도 견고해서 먹질 못했고, 혀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허공에서 싱싱한 선홍의 빛깔로 펄떡이며 살아있었다.

아, 대학 시절 나는 저 구절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수추는 혀가 잘렸음에도 굴하지 않았다.

수추는 목구멍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의 안으로 꽉 잠긴 노랫소리가 또 저자 바닥에 깊이깊이 스며들었고, 사람들은 몰래몰래 그것을 따라 불러 꿈만이 떠도는 밤에도 잠꼬대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결국 장자는 수추의 목을 베었다. 수추를 기억하는 모든 것을 없애게 했다. 마치 고죽이 자신의 모든 작품을 없애듯이. 그리고 고죽은 홀로 깨달음을 얻고 가버렸지만,

그러나 장터 사람들의 소문에 의하면 수추의 노래는 여전히 불려지고 있으니 그가 죽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얘기였다.

이처럼 수추는 죽어도 죽지 않은 불멸의 예술혼으로 살아남았다.


[가객]은 단지 소설 상으로만 보면 [금시조]에 비해 조금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 바로 적대자인 "장자"의 성격이 드러나지 않는 것인데, 이 소설이 쓰인 1975년이라는 한계가 "장자"를 드러내지 못하게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종종, 이문열의 [금시조]에 대한 찬사를 들었는데, 실로 수긍하기 어려웠다. 이문열이 예술을 비웃는 이런 소리가 그 글 안에 들어있는 한 나는 [금시조]를 유미주의 소설로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글씨 쓰는 일이며 그림 그리는 일이 한낱 선비의 강개(慷慨)를 의탁하는 수단이라면, 그 얼마나 덧없는 일이겠읍니까? 또 그렇다면 장부로 태어나 일평생 먹이나 갈고 화선지나 더럽히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모르긴 하되 나라가 그토록 소중한 것일진대는, 그 흔한 창의(倡義)에라도 끼어들어 한 명의 적이라도 치고 죽는 것이 더욱 떳떳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만히 서실에 앉아 대나무잎이나 떼어내고 매화나 훑는 것은 나를 속이고 물(物)을 속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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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가객]은 아래 단편집에 들어있습니다.

몰개월의 새 - 10점
황석영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by 초록불 | 2008/07/04 16:19 | *..문........화..* | 트랙백 | 덧글(6) | ▲ 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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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유로스 at 2008/07/04 18:14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고나니 김동인과 이광수에 대해서도 써주시면 좋을 것 같다는 욕심이 납니다.
Commented by 어릿광대 at 2008/07/04 21:04
어째 이문열씨의 금시조는 좀 암울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쩝..
Commented by 검은머리요다 at 2008/07/04 21:24
잘 모르지만 이해하고 싶어지네요. 중학교때 금시조를 읽고 '한국단편소설은 이상해' 하고 결론 내렸었는데요..
Commented by 양과알 at 2008/07/04 21:50
어린 시절 높은 경지는 정상과 같이 고독한 줄만 알아 그 당시 아름답게 보인 듯 합니다.
글이란 읽는 이가 있어야 하고 노래는 듣는 이가 있어야 함을 안 다음에는 달라 보이지만 말입니다.
Commented by 나루 at 2008/07/04 23:15
고등학교때 이 소설들을 수업시간에 보고 소설이 다 쉽고 재미있는건 아니고 어려운 것도 있구나....... 그정도의 생각을 하고 지나갔던 생각이 나네요..
그나저나 독후감이라;;; 어려운 과제군요 ㅠㅠ 대학와서 저 자신에 대해 다른 재주도 별로 없지만 글쓰는 재주는 정말 바닥이란걸 느꼈거든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요? ㅠㅠ(갑자기 난데없는...ㅡㅡ;;)
Commented by 초록불 at 2008/07/04 23:32
글을 잘 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글쓰기라면, 주어와 서술어를 일치시키고, 올바른 접속사만 사용하면 됩니다. 그 이상의 것을 원하시면 시중에 널려있는 글쓰기 책을 한 권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글을 잘 쓰는 것보다는 생각을 바로 하는 것이 훨씬 어렵고, 중요한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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