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이의 이夷는 대궁大弓의 결합자이다. 활을 잘 쏘는 동방 민족을 가리키는 글자다.
위 말은 후한 때 만들어진 <설문해자>에 나온다. <설문해자>는 최초의 한자 사전이다. 그래서 매우 그럴 듯하게 보이는 설명이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갑골문과 금문에서 夷는 사람이 허리를 앞으로 굽히고 쪼그리고 앉아있는 형태로 시尸와 인人과 비슷한 글자로 나타난다. 이 글자가 동이족을 뜻하게 된 것은 전국시대 중기 이후로 알려져 있다. 즉 글자가 먼저 있었고, 그 뒤에 동이족을 가리키는 글자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2. 산동 일대의 동이족은 우리 민족의 갈라진 일파다.
김산호의 <대쥬신제국사>를 보면 처음에 다음과 같은 지도가 나온다.

나는 오래전부터 대체 산동의 동이가 우리와 북방에서 갈라진 종족이라고 누가 주장한 것인지 궁금했는데, 최근에서야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았다.
주인공은 김상기金庠基(1901-1977) 선생. 설마? 일본 와세다 대학 사학과를 나온 "친일사학자"의 학설을 저 "강직한" 재야사학자들이 냉큼 주워먹었다고? 그러나 사실이다. 김상기 선생의 주장은 간단하게 말하면 아래와 같다.
동이 중 한, 예, 맥이 기주岐周의 서쪽으로부터 섬서의 한성현 방면으로, 다시 하북 고안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가 주가 동천할 때 한반도와 남동만주 일대로 이동했으며, 이때 일파가 산동 지방으로 내려가서 우이嵎夷, 래이萊夷, 회이淮夷, 서융徐戎이 되었다고 한 것이다. - 동이와 회이, 서융에 대하여, 동방학지 1-2, 1954-55
재야의 역사인식이라는 것이 1950년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3. 산동 반도와 회수 일대의 동이족은 우리 민족이고, 그 땅은 우리 영토였다.
4. 공자는 동이족을 흠모해서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
산동 반도의 동이는 선진시대의 동이로, 이들은 우리 민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오류가 지적되어 온 것인데, 이성규 교수의 논문 이래로는 이의의 여지가 없는 정설로 굳어졌다. (이성규, 선진문헌에 보이는 '동이'의 성격, 한국고대사논총1, 1991)
산동 지방에 있던 동이족에 대한 기록이 있던 시절, 중국 북방에는 맥貊족이, 중국 동북방에는 예濊족이 기록에 남아있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의 직계조상으로 간주해도 된다. 이들은 한나라 시절로 접어들면서 "동이"로 취급되는데, 그 이유는 산동-회수 일대의 동이족이 진시황에게 접수되어 흡수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즉 본래 동이족이 사라진 뒤에 한족은 동쪽에 있는 종족들을 또 다시 동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다. 문헌적으로 살펴보아도 이 점은 명백하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살펴보아도 명확해진다.
산동지방의 북신-대문구-산동용산의 신석기 문화를 거친 청동기문화인 악석문화와,
요동지방의 홍산-소하연의 신석기문화를 거친 청동기문화인 하가점 하층 문화는 서로 독립적인 관계라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이미 증명되어 있다. (홍산문화가 우리민족문화인지 여부를 떠나서 산동과 요동 지방의 문화가 독자적이라는사실에 주목할 것)
또한 산동지방에서 발견된 인골과 요동지방의 인골을 비교해본 결과, 양 지역의 인골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 밝혀져 있으며(기수연, 고대동이연구, 1994, 단국대 사학과 석사논문)
산동 일대 동이족에게는 이를 뽑는 발아풍속이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요동 지방에는 이런 풍속이 발견되지 않으며,
요동에서는 곤두髡頭의 풍속이 발견되지만 산동 동이족에게서는 곤두의 풍속이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요동지방에서는 적석총, 석관묘, 지석묘가 주된 매장 형태인데, 이 형태들은 산동 지방은 물론 중국 전역에서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산동 지방에서는 대문구 문화 중기에 이르러 목관묘가 등장하는데 요동지방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묘제이다.
지석묘의 경우는 유일하게 산동반도 동단에서도 발견이 되는데, 물론 그 숫자는 매우 적다. 이것으로는 당시 요동지방과 산동반도 사이에 문화적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 이상으로 확대해석할 수는 없다.
또한 비파형단검도 산동 지방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문화적 차이를 고려해볼 때 산동지방의 동이족과 요동지방의 제종족 사이에는 종족적 혈연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음이 명백하다. 이제 이런 헛소리는 제발 좀 그만.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1. 하은주 시대로부터 춘추전국시대에 걸쳐 산동반도와 회수 일대의 해변가를 중심으로 살던 여러 종족을 "동이"라 불렀었다.
2. 이들 동이족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점차 한족에 동화되었으며 진시황에 의해서 중국에 편입되어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한 동이족도 바로 이들이다.)
3. 그후 한나라 시대가 되자 한족들은 요서 이동의 제종족을 "동이"라 호칭하기 시작했다.
4. 따라서 산동반도에 살던 동이족은 현재 우리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5. 그들은 현 중국인들의 조상 중 하나일뿐이다.
추가 : 공자의 고향인 곡부도 산동이고 동이도 산동이면 어찌 되는 것인가 질문한 분이 계셔서 추가해놓는다. 아래 지도를 보면 어느 정도 거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덧글
선진 시대의 동이족 거주지와 당시의 한족 거주지가 달랐던 건가요?
아무튼 저런 지도를 보면 참 정신이 멍해집니다.
게다가 "산동성"이라는 것 자체가 명나라 때나 가서야 처음 생긴 행정 구역이기 때문에, 오늘날 같은 산동성에 속해 있다고 해서 고대에도 같은 권역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에러입니다.
경주와 김해가 오늘날 같은 경상도라고 해서 고대에도 신라와 가야가 같은 나라(내지는 같은 민족)였을 거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지요.
선진시대의 동이가 살았다는 "산동"은 현재의 산동성 전체가 아니라 "산동 반도" 일대, 즉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가 있던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리고 초록불 님, 여기부터는 개인적으로 의문이 생겨서 질문 드리는 것인데,
그렇다면 제나라 자체를 동이라고 볼 수 있는 건가요, 아니면 당시 제나라의 영역 안에 "동이(9이)"라 불리던 다른 종족이 제나라의 지배 아래 함께 섞여 살고 있었던 건가요?
그리고 제나라 = 동이라면, 공자가 동이(구이)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한 것은 제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한 걸까요?
왜 그랬을까요? 공자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제나라와는 그다지 좋은 인연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제나라는 공자가 살던 노나라와 인접국이라 전통적으로 이래저래 사이가 별로 안 좋았고, 특히 공자가 집권했을 때 노나라를 더욱 경계했었죠.
뿐만 아니라 공자의 일생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안자(안영)도 제나라 사람이고, 공자가 잠시 제나라에 머물 때 제나라 대부들의 모략으로 등용되지 못하고 돌아온 일도 있었고, 훗날 계략을 써서 공자의 공직 생활을 완전히 끝장 내는 원인을 제공한 장본국(?)도 결국 제나라인데, 어째서 공자는 그런 제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한 걸까요?
*P.S - 공자는 자기 조상이 은나라 사람이라고 했는데, 어쩌면 공자 본인도 자신을 동이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요? (은나라는 확실히 동이라는 기록이 있으니...)
그리고 그냥 사견으로, 공자가 말한 "동이에 사는 군자"는 당시 제나라의 안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건 그렇고, 궁금증이 생겨 네이버에 올라와 있는 이성규 교수의 논문 <선진문헌에 보이는 동이의 성격>의 요약본(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167879)을 찾아보니(원본은 아직 못 읽어봤습니다 ^^;), 이런 구절이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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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의 멸망 이후, 동이는 서주 왕조에 있어서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서주 시대 초기의 소위 “삼감(三監)의 난”에서 은의 잔존세력과 결합한 그들을 정벌하기 위해 주공(周公)이 대대적인 동정을 수행하였다는 것은 서주 시대 초기의 금문에서도 입증된 바입니다.
동이가 평정된 이후 서주 왕실은 이 지역에 대규모의 봉건을 실시하여 은족을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주민 구성을 복잡하게 만든 뒤, 동이Ⅰ의 토착 세력을 와해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위 소호(小昊)의 후예라는 담(郯) 거(莒) 서(徐) 기(㠱=紀?) 등의 동이Ⅰ은 정치적인 독립을 강하게 유지하였으며, 각각 희성(姬姓)과 강성(姜姓)이 봉건되어 주변의 토착 세력과 투쟁하며 성장한 제(齊)와 노(魯)의 경우도 토착 문화를 완전히 파괴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로(齊魯) 지방의 토착 문화는 현저하게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토착 종족 동이Ⅰ은 전국시대말까지도 독자적인 문화를 간직하면서 소위 제로(齊魯) 문화의 형성에 기여하였으며, 진(秦)의 통일 이후에 비로소 완전히 해체되어 군현 지배에 편입[散爲民戶]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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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의하면 제로 지방의 토착민은 원래 이(夷)였고, 제와 노는 중원 지방에서 이주해 온 화하(華夏)라 불리던 사람들[당시에는 한족(漢族)이란 개념이 없었으니까]이 이들을 지배한, 소위 "정복 왕조"라는 것인데, 당시 제나라나 노나라가 중원으로 분류된 것은 공가(公家)를 비롯한 지배층이 화하족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이들과 요동-요서 지방의 종족들과는 별다른 인종적 공통점이 없다는 것은 고고학 조사에 의해서 증명되어 있습니다. (http://orumi.egloos.com/3959839)
그러고 보니, 제 환공이 공위(公位)에 오르기 전에 망명했었던 거(莒)나 담(郯, 譚) 같은 소국들이 바로 이러한 동이족의 나라였군요.
환공이 병탄한 나라들의 수가 <한비자>에 의하면 30국, <순자>에 의하면 35국이나 되었다고 하니, 바로 이러한 나라들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동이족의 정치 결사체가 아닌가 합니다.
생각해 보니, 산동 반도 전역이 처음부터 제나라의 영토였다고 보는 것도 에러겠군요. 따지고 보면 제나라의 수도 임치도 산동 반도에서 보면 상당히 내륙 쪽이고, 당시의 국가라고 해 봐야 작은 도시국가 수준이었을 테니...
그나저나 저 지도는 비슷비슷한게 참 많은데 볼 때마다 참 깝깝합니다.
...그런데 항상 저딴 식으로 해석하니 캐좌절 Orz
잘 쳐줘봤자 다른 민족들과 병렬적으로 대등한 관계 밖엔 안 되는 것 같습니다만 어째서 반도인들이 그렇게 뻔뻔스럽게 바이칼 호수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지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동방예의지국은 좀 다릅니다. 근본적인 오해는 있지만, 저런 식의 것은 아니죠. 기자가 조선으로 와서 예의범절을 가르쳐서 동방의 예의바른 나라가 되었다는 전설이죠. 이것은 중국인과 한국인이 동시에 믿어버린 케이스입니다.
산동 동이에 대해서는 전근대학자들도 믿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 그리고 이 부분은 사실상 저언혀 중요시되지도 않았답니다. 저 땅이 우리거라는 재야 망상사학이 등장하기 전에는요.
원래 있던 덧글: 동이+공자 떡밥의 진상이 그런 것이라면 동방예의지국이란 것도 지어낸 말이 되는 것이군요.(어릴때부터 속았었다는 느낌입니다.)
추가하려 했던 것: 인터넷에 동방예의지국의 유래라며 돌아다니는 동이열전(공빈이 썼다는...)은 이것으로 완전히 믿지 못할 것이 되는군요. (당시 읽었을때 글 내용이 좀 이상해서 믿음이 안갔었거든요.)
그 공빈의 동이열전은 말도 안 되는 낚시입니다. 이미 그 거짓말을 여러분들이 논파한 바 있습니다...^^
심지어 윤내현도 구분할 줄 아는 선진시대의 동이와 이후의 동이 아닙니까.
동이 타령은 이제 그만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은나라 갑골문에는 夷라는 글자가 없으니 동이라고 부르지도 않았겠죠. 夷라는 의미로 人을 사용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그리고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접어들어서야 발견된 갑골문을 제외한 금석문, 전서 등은 이미 예전부터 잘 알려져 있었고 이에 대해서는 심도 깊은 연구가 예전부터 유학자들 사이에 있었고 특히 청나라 때 극도로 발달하게 되고 이미 청나라 시대에 웬만한 금문은 거의 해독이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갑골문과 금석문의 형태 차이는 의외로 크지 않아서 금석문을 해독 가능한 사람은 갑골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도 그 자리에서 절반 정도는 해독 가능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갑골문의 최초 발견자도 바로 그런 금석문에 조예가 깊은 유학자였고 실제로 그 사람도 바로 그 자리에서 절반 정도를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갑골문과 현대 한자가 서로 심하게 달라보이는 것은 이런 변화 과정을 몰라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이런 변화 과정을 조금만 공부해보면 갑골문이 현대 한자의 직계 조상이라는 건 너무 당연헤서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아닙니다. 파파라치님의 말씀도 충분히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좀 더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물론 2천년 가까이 정치적 통일체를 이루어 온 중국은 오늘날에 와서는 분명 하나의 국가이지만, 문명사적으로 볼 때에는 그렇게 보기 어려운 면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가졌던 생각도 비슷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저는 역사에 완전 문외한 입니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관심이 들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여기까지 왔고요, 덕분에 잘못된 인식을 조금씩 수정할 수 있게되어 기쁘기도 합니다. 며칠에 걸쳐 많은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역사와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현재의 사람들의 역사를 모든 사학자들이 묶어서 생각하려는 것이 아닌가란 점입니다. 백악기에 공룡들이 뛰어 다니던 한반도에 먼저 자리 잡은 구석기인들은 과연 어디서 왔는가? 그들이 우리의 조상인가? 아님 후대에 들어온 신석기인들(배달국 사람이라 해야 되나요??ㅋㅋ)이 우리의 조상인가? (물론 이 부분은 2010(?), 2012(?)년 쯤 되면 어느정도 밝혀기젰죠? 지금 한창 조사중이니) 그리고 청동기 시대부터 먼 바다로 나가 고래를 잡고, 일본과 무역을 하면서 키운 해상세력들, 신라, 고려까지 왕성한 활동을 한 해상제국에 대한 역사는 참 찾기 힘들군요. (여기서조차...ㅠ.ㅠ)
아~~ 죄송합니다.. 몇 가지 의문이 있어 글을 올리는데, 첫 댓글이라 잠시 인사한다는 것이 조금 장황하게 이야길 해 버렸네요.
의문점, 1) 초록별님이 소개한 '최초의남자'(예전 네셔널지오그래픽에서 그 분이 돌아다닌 영상은 보았는데, 책으로 나온 줄 몰랐습니다. 조만간 사서 볼 예정입니다.)의 내용에 따르면, 중국의 산둥반도쪽 사람들이 우리의 조상과 같은 계보가 되지 않을까요?
의문점. 2) 요동에 있었던 풍습 중 '곤두'라는 것이 어릴 때 큰 돌로 이마를 눌러 머리를 ^ 키워서 외계인 형상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맞나요? 이 풍습은 신라 초기에 있었고, 헝가리의 훈족 무덤 발굴에서도 나왔다는데,(KBS 역사스페셜, 유인촌씨가 했던 것이니 상당히 오래 전의 적입니다.) 이것으로 신라왕족이 중앙아시아 내륙의 훈족(흉노족)에서 파생되어 왔다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인가요? (아직 이것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글은 환단고기 쪽에서도 없는 듯 한데?) 머리키우는(?) 풍습이 목숨을 담보하는 풍습인데 고려시대 때 원나라의 영향으로 복식이나, 머리모양의 변화만을 따라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고, 그 풍습이 아래계층에서 있었던 것이 아닌 왕족의 풍습이니 막강한 권력자들이 왔다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단일민족이라는 것은 절대 반대이고요, 큰 땅 찾아 북으로, 북으로를 외치는 땅투기꾼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바다로 바다로를 외치는 새로운 신흥 해빠라고 할까요??ㅋㅋ
아직 여기글을 다 읽지 못하고 성급히 질문을 드려봅니다. 부디 이 글이 쥔장에서 틀켜 답글이 달릴 행운이 있길 기원하며 정말 두서없는 질문을 올려 봅니다.(정리하지 못하고 올려서 죄송합니다.)
<최초의 남자>는 간략한 책입니다. 개념을 잡는 정도의 책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한국인의 이동 경로는 아직 정립되지 않은 가설들만 존재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곤두"가 아니고 "편두"겠지요. 이런 풍습의 유사성 정도로 어떤 연관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한두 가지의 유사성을 가지고 논한다면 갖다 붙이지 못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보다 풍부한 증거와 자료들이 필요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결론을 유보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사실 동이 떡밥(?)에 많이 자랑스러워했다는;;
물론 그 당시에도 증산도와 같은 종교는 싫어했습니다만, 제가 귀가 얇은 편이라 동이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우리 종족의 분파가 여러군데 있다라는 떡밥에 가슴이 떨리곤 했습니다만...
이글과 초록불님이 올리신 다른 글들을 보니 그러한 글들이 확실히 떡밥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종종 들러서 글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매우 비슷하네요. '치우의 전사들이여 깨어나라' 라는 문구에 끌려서 들어가봤었는데 야설록 이란 사람이 전체적으로 스토리 잡은 거 같던데... 전 중국인에 걍 무협작가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 ㅋ 또 치우천황기도 맥이 비슷한 거 같고 다 같은데서 출발한 이야기인가요?
무협소설가로 유명하고요. 뫼라는 출판사를 세워서 무협소설을 많이 출판하기도 했지요.
또, 초나라도 비록 강국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중원제국으로부터 蠻夷라 불리며 멸시당한 점으로 보아, 중원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문명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른 질문으로는 김한규교수님에 의하면 제나라는 발해만을 통해서 고조선과 교역을 했다고 하시는데, 공자 이전에 이미 제나라가 산동 곶에서 (이름을 잊은)열도를 타고 고조선과 교역했다면, 이미 산동반도가 제나라에 의해 제패된 상황이라 봐도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공자가 말한 '이'가 더 동쪽의 종족을 뜻하지는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유립쨔응의 학통이어받은 환십덕쨔응들은 환웅의 태백산을 백두산이라고 하더라군요
여기서 태백산은 현재의 묘향산으로 지정된거같은데..
유립쨔응이 바보여서 그랫을까요?
우리 과학 역사 쪽으로 신뢰할 만한 책이 있나요?
"...옛 중국문헌에는 이 문화권의 주민들을 동이(東夷)라 호칭하였다. 이(夷)라는 글자는 '큰 활을 가진 사람' 즉 활을 잘 만들고 잘 쏘는 동방인들의 특성을 드러낸 것이다."
- 다시찾는 우리역사, 한영우, 경세원, 2003. pp-64
이후 하은주 시대의 동이족에 대한 이야기, 36개 소국을 거느리는 동이족이 주나라와 자웅을 겨룬다는 얘기, 공자가 뗏목을 타고 군자의 나라인 구이로 가고 싶어했다는 이야기 등 동이족에 대한 이야기가 주욱 나오고..
이후 개정판들에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진한에 의해 통일국가를 수립하면서 중국 동북 지방의 동이족은 대부분 화하족으로 흡수 동화되었으나 그 일부는 한반도로 파상적으로 이주해와 고조선과 삼한사회의 발전에 큰 자극을 주었다.. 는 식의 설명도 들어있네요.
서울대 사학과의 명예교수면 재야사가는 아닌 것 같은데, 이런 교수의 책에서마저..
다만 이 경우에 주의해야 하는 것은, 지금도 혼동이 있는 것처럼 고대에도 혼동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후한서에서 이야기하는 동이가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런 착각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여하는데 일조를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이 문제는 제가 천착한 바가 없어서 이 정도만 언급하고 마쳐야 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