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 교과서 개편안을 보고 *..역........사..*



국정인 국사교과서의 편찬기준이 확정 발표되었다. 국사교육심의회는 앞서 시안을 작성하여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였고, 나아가 국사편찬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오늘의 준거안을 확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기준은 학계의 공인된 학설을 적용한다는 신중성을 보인 것이고, 또 이미 확정된 것이고 보면, 그 내용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는 것이 옳겠다.

물론 필자 개인의 의견을 말한다면 불만스러운 점이 전혀 없는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고조선을 문화권이 아닌 국가로 보는 경우에, 초기에는 요녕 지역이 그 중심지였다는 것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제왕운기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필자가 우둔한 탓인지 아무리 읽어봐도 그러한 대목을 발견할 수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추측컨대 하권 맨 처음에 "요동에 따로 한 건곤乾坤(天地)이 있다"고 한 것을 들어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 전체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지 요동이 중심지였다는 말은 아니다. 곧 이어서 "큰 파도가 널리 삼면을 둘러쌌다"고 한데서 이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지리기"라고 이해한 것(박두포 역, 동명왕편 제왕운기, 을유문고 p159)은 옳은 해석이다. 고조선(전조선, 단군조선)에 대한 서술은 행을 달리하고 시작하는데, 여기서 단군은 아사달(이를 구월산으로 보았다)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런 경우와 같이 아마 다른 사람들도 입장에 따라서 불만인 부분을 지적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보다 융통성이 주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상당히 신중을 기하면서 작성된 이 편찬 기준은 대체로 학계의 중지를 모은 것으로 인정해서 좋다고 생각한다.

이제 요강이 확정되었지만 아직 구체적인 집필의 문제가 남아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 많은 애로가 가로놓여 있다고 믿는다. 가령 구석기 시대를 전기, 중기, 후기로 세분한다고 하였는데 어느 구석기 유적을 전기의 것으로 보느냐 하는데는 아직 의견의 일치가 되어있지 않다. 교과서의 첫 페이지에 들어갈 구석기 시대부터 이러고보면 실로 집필과정에는 산더미같이 많은 문제가 쌓여있다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우선 집필에 충분한 여유가 주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또 일단 작성된 원고를 검토하는데도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과거의 예를 보면 검토하는 기간이 너무 짧아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경우가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는 결코 바람직스러운 교과서가 되기 힘들다. 애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이 점을 거듭 강조해 두고 싶다.

집필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과장되고 선전적인 사실 해석을 삼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역사의 기원이 오래라든지, 영토가 넓었다든지 하는 것이 민족의 위대성을 말하여 준다는 식으로 서술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우리보다 역사가 더 오래고 우리보다 영토가 더 넓은 나라는 많이 있다. 그렇다고 그런 나라들이 우리보다 위대한 국가요 민족인 것은 아니다. 그 기준은 결코 역사적 진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이 점을 강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굴레를 쓰는 결과가 될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옛날 넓은 만주까지를 포함한 넓은 영토를 가진 위대한 국가였음을 강조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입장에서는 세종대왕 때의 민족문화의 융성을 설명할 수 없으며, 세계 무대에 도약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는 커다란 정신적 타격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옛 고토였던 만주를 회복해야 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옛 연고권을 주장하다보면, 세계는 온통 전란의 도가니 속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이러한 역사관이 정당한 것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우리는 이같은 생각이 싹틀 것을 두려워하여 오늘의 한국사학이 역사적 진리에 충실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해왔던 것이다.

해방 후 우리의 역사학은 크게 발전하여 세계의 역사학계에서 어엿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국사교과서가 국정이 된 것은 유신정치의 산물이며 바람직스럽지 못하다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그러나 한편 그것이 국정인만큼 실제로 우리 역사학의 수준을 단적으로 세계에 드러내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교과서 서술이 비과학적인 것이 된다면 그것은 안으로 우리 국민을 오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조소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원컨대 끝까지 신중하게 작업이 진행되어 훌륭한 교과서가 되기를 비는 마음이 간절한다.

끝으로 이 기회에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언론계가 학문적인 진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교과서와 관련하여 오늘의 한국사학에서 널리 논의되고 있는 문제는 단순한 학설의 대립에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역사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관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점의 차이에는,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다른 어느 문제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성이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우리 언론계의 일부에서 이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지 못한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 이기백(한림대교수, 한국학) 동아일보 1987년 6월 8일자 기사

우리 사회는 20년 동안 얼마나 발전했을까요? (위 기사 내용 중 강조와 채색은 제가 했습니다)





[사족]
위 기사에 나오는 일부 언론은... 조선일보를 가리킵니다.

덧글

  • Shaw 2008/11/01 09:19 #

    아니 이럴수가. 마지막 네 줄을 남겨 놓고 깜짝 놀랐습니다.
  • 하늘이 2008/11/01 09:22 #

    제 기억으론 저 때가 한참 조선일보에서 고정 코너를 만들어서 고조선을 비롯한 고대사를 재해석(...) 하던 시기였지요. -ㅅ-
  • 회색인간 2008/11/01 09:59 #

    지금 쓴 말이래도 믿겠군요.....어떻게 독재치하랑 틀린 게 없답니까?
  • 초록불 2008/11/01 10:13 #

    이기백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 을파소 2008/11/01 10:02 #

    요즘 얘기인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대반전이 있군요.

    지금은 일부 언론이 인식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일부 언론만 인식을 하는 거 같습니다.
  • 초록불 2008/11/01 10:12 #

    야당지라고 할 수 있는 경향신문도 환빠들에게 낚여서 퍼덕이는 꼴을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 Hadrianius 2008/11/01 10:13 #

    국가가 역사에 개입하는것만큼 꼴불견도 없어 보입니다.
  • 야스페르츠 2008/11/01 10:37 #

    털썩... 초록불님이 쓰신 줄 알았다는...ㅠㅠ 가슴이 답답한 현실입니다.
  • 위장효과 2008/11/01 10:42 #

    과연 그 분 답습니다.
  • ⓧA셀 2008/11/01 10:52 #

    뭐랄까, 어디서 본 듯했더니만 역시 이기백 선생님 글이었군요.

    시간을 달리는 정권을 따라 과거로의 회귀가 유행하는 요즘 ㅠ.ㅠ
  • 炎帝 2008/11/01 11:33 #

    신중해야 한다는것과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건 공감입니다.

    우리나라는 정권 교체되면 너무 물갈이가 심한 탓에
    몇십년, 백년단위로도 가야 할 경제나 교육 분야가 마구잡이로 흔들린다는 글이 기억나네요.

    그래도 동아엔 저런 사람들이 있던 때가 있었군요.
    듣기론 동아일보에서 한컷 만화 올리던 분도 꽤 풍자적인 분이었는데
    동아에서 잘랐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습니다.
  • 로리 2008/11/01 11:39 #

    진짜 반전에 당했습니다...
  • catnip 2008/11/01 11:54 #

    맨윗줄의 경우 어젠가 그제 뉴스에서 교과서어쩌고하길래 잠깐 귀담아 들었던 부분인가 했는데 뭔가 약간 다른데..하면서도 계속 읽어나가다가 마지막줄에선 그야말로 당했다.라는 기분인이네요.
    그런데 언론사가 낚인다기보다 사실이건 아닌건 자극적인 제목의 헤드라인과 같은 개념으로 일부러 이슈화하는건 아닐까 라는 의심도 해봅니다.-_-;;
  • 玄月 2008/11/01 11:58 #

    1987년이란 말을 보고는 털썩, 뻗어버렸지요. 정말 이기백 선생님이 그리워집니다.
  • dunkbear 2008/11/01 12:01 #

    마지막 반전이군요... 헐헐. 20년 지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인지... 에휴.
  • 어부 2008/11/01 13:26 #

    무려 20년 전........... -.-
  • 초록불 2008/11/01 16:31 #

    10년 후에 또 이런 포스팅을 하게될까 걱정입니다.
  • 아무로 2008/11/01 15:12 #

    <이기백(한림대교수, 한국학) 동아일보 1987년 6월 8일자 기사>를 보는 순간 마시고 있는 커피 뿜을 뻔 했습니다. 허억...
    첫 줄의 '국사교육심의회'를 보면서 80년대 국사 교과서 파동을 전혀 생각해내지도 못했어요.
  • 초록불 2008/11/01 16:32 #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요(아니긴 뭐가 아니냠!) 아이쿠... 도주...
  • 카구츠치 2008/11/01 17:45 #

    반전이 대박인데요 ;;;;
  • 행인1 2008/11/01 17:56 #

    마지막이 너무 반전이군요....
  • 아르핀 2008/11/01 18:01 #

    -_-;;;;;;;;;;;;;;;;;;;;;;;;;;;;;;;;;;;;;;;;;;;;;
    마지막 네줄 읽기 전까진 최근에 초록불님이 쓰신 글 or 사설인줄 알았습니다.
    토시하나 안틀리고 지금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말이네요..
    으윽... 어쨌거나 낚였으니 추천하겠습니다.
  • 무휘無輝 2008/11/01 18:34 #

    20년전이었군요ㅠㅠㅠㅠㅠㅠ
    무섭다 못해 소름끼치는 일입니다...orz
  • 에톤 2008/11/01 18:45 #

    20년전... 반전이군요 정말로
  • draco21 2008/11/01 19:23 #

    마지막까진 요즘 이야기 하시는줄 알았습니다. OTL
  • 미스트 2008/11/01 19:43 #

    "잃어버린 xx년"을 정말 부득불 챙겨내려 하는 저들의 모습이 참... .... ....
  • 나인테일 2008/11/01 19:58 #

    아예 그냥 2028년으로 똑같은 포스트 하나 지금 당장 예약 포스팅 하시면 수고가 줄어들지도요..;;
  • Mr술탄-샤™ 2008/11/01 20:12 #

    걸프전 당시 아랍합동군 사령관이었던 사우디의 칼레드 빈 술탄의 저서인 <사막의 전사>에 보면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잘 말하고 있죠.

    "이라크 인들이 50년대부터 꾸준히 주장해 온 것은, 쿠웨이트는 과거 오스만 제국 시대에 바스라 성에 속했다는 것이며 그것을 근거로 그들은 쿠웨이트가 이라크의 영토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점을 똑같이 적용해서, 지금 터키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영유권을 주장한다면 그들은 터키의 영토가 되는 것 이외에 과연 어떠한 선택이 가능하겠는가?"

    비슷하게 지금 시리아까지 이란이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였음을 주장한다면 또 그렇죠.
  • GATO 2008/11/01 21:02 #

    마지막 날짜....소름이 돋네요.
  • Riblet 2008/11/01 23:40 #

    마지막 급반전; 정말 20년 넘게 뭐한건가요ㅠㅠ
  • 스카이 2008/11/02 01:30 #

    이기백 선생님... ㅠ_ㅠ... 사학계는 아직 이 모양이랍니다.
  • 소하 2008/11/02 12:36 #

    저도 현재의 개편안을 논하는 것으로 알고, "이런 내용이 아니었던 같았는데....."라고 생각하다가, ㅡ.ㅡ 마지막에 펼쳐지는 대반전에 놀랐습니다.
  • mattathias 2008/11/02 21:34 #

    요즘 애기인 줄 알았습니다. ...아, 역사는 반복되는 것. ...영원회귀의 신화네요(by 미르치아 엘리아데).
  • 소울오브로드 2008/11/02 22:04 #

    이것이 바로 무한 루프의 역사!!!????
  • 자그니 2008/11/03 00:39 #

    ....뭔가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을뻔 했습니다..;;;;
  • 들꽃향기 2008/11/03 10:37 #

    '자랑스러운 것만을 가르쳐야 한다.'로도 모자라서, '자랑스럽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그러한 역사관은 환*나 교과서**나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건전한 상식의 부재가 안타까운 시절입니다.

    그나저나 이기백 선생님 글은 역시나 명문이군요. 이러한 글을 상기시켜주신 것에 작은 감사를 표합니다. ^^
  • 온푸님 2008/11/03 14:21 #

    역시 그들은 평생 그대로군요...
  • Skibbe 2008/11/03 18:24 #

    하하,,,제가 태어났을때부터 지금까지 변한게 없는거군요;....

    어떤의미로 보면 참 대단한데요;....
  • 나루 2008/11/04 01:20 #

    허허허허.....
    할 말이 없네요..
  • 大望 2008/11/04 13:03 #

    한참 읽다가 "국정"이라는 말에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털썩~~

  • jianke 2009/05/14 17:40 #

    어제 시간이 좀 있어서 소위 환빠들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홈들에 좀 들어가서 주욱 읽어 보았습니다. 하도 오래 동안 그런 쪽의 이야기를 안 읽어봐서 어떤 말들이 오가나 보았지요.

    초록불님 글을 보면서 조금은 소극적이다라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물론 대부분의 내용을 너무 공감하며 잘 보고 있습니다^^) 어제서야 이유를 알았습니다. 신라촌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대륙을 아주 우리 것으로 도배를 했더군요. 제가 1987년 경에 환단고기를 처음 보고 민족 사학이라고 위장한 그들의 책을 보았을 때는 없던 이야기 들인데 넘어도 너무 넘어섰더군요.

    천진에 대구장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럼 여기도 혹시 경북의 대구??? 대구장이란 말은 말 그대로 大邱庄으로 큰 언덕위에 있는 장원이란 뜻이겠지요. 그럼 산동 일부 지역이었던 청주(靑州)와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漢陽)은 어쩌나.....

    그들 홈페이지들이 대부분 선명한 컬러와 울긋 불긋한 글짜들, 성의없이 찍어진 저렴한 사진들을 보면서 마치 독재정부 시절이나 공산 정권 치하의 그리고 20-30년전 중국 선전물 같은 느낌이 들어서 섬찟 햇습니다.

    학문이나 민족을 넘어서서 이미 사이비 종교로 변한 느낌이 들더군요. 걱정입니다. 이상하죠? 한국에 있는 제일 큰 종교(불교,기독교,천주교 등)들을 합하면 인구수 보다도 신자가 많은데 왜 이런 사이비 종교형 집단이 나타나는지.....

    초록불님의 글을 이젠 좀 더 객관적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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