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평의 독약 *..역........사..*



삼국지 - 만약에 내가 길평이었다면? 슈타인호프님 글에 링크

댓글 중에 이런 것이 있어서 일용할 양식으로 삼습니다. - 월광토끼님께 감사...

먼저 말씀하신 해당 구절을 찾아보지요. 판에 따라 위치는 좀 다른데, 제가 가지고 있는 이문열 삼국지 신조판의 경우에는 4권 15쪽에 해당구절이 나옵니다.

그 말과 함께 길평도 몸을 일으켜 약사발을 조조의 귀에다 쏟으려 했다. 귀로 쏟아부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맹독이 들어있는 약인 까닭이었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조조가 가만히 서서 당할 리가 없었다. 손으로 약사발을 밀쳐내니 약이 땅바닥에 쏟아져 버렸다. 얼마나 독이 맹렬한지 약물이 떨어진 곳은 벽돌이 다 갈라질 정도였다.

이미 이 오류는 리동혁의 <삼국지가 울고있네>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가령 귀에 넣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약이 있고, 땅에 쏟으면 벽돌이 쩍쩍 갈라지는 약이 정말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무서운 약이라면 귀찮게 귀에 넣을 것 없이 얼굴에 끼얹어도 목숨을 빼앗을 만하지 않을까? (p113)

저 대목의 원문은 이렇습니다.

平知事已洩,縱步向前,扯住操耳而灌之。操推藥潑地,磚皆迸裂。

平知事已洩 : 길평은 일이 이미 새어나갔음을 알고 (平 - 길평)
縱步向前 : 앞으로 걸어나가
扯住操耳而灌之。: 조조의 귀를 붙잡고 약을 들이 부었다. (扯住 - 붙잡다 / 操耳 - 조조의 귀)
操推藥潑地 : 조조가 약을 밀어 (약이) 땅에 뿌려지니 (潑 - 뿌리다)
磚皆迸裂。: 벽돌이 모두 쪼개졌다. (迸裂 - 쪼개지다)


영문 번역을 구해주신 분이 있어서 첨가해 놓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뜻이 좀더 명확해지죠.

But he guessed now the conspiracy had been discovered, so he dashed forward, seized Cao Cao by the ear, and tried to pour the potion down his throat. Cao Cao pushed it away, and it spilt. The bricks upon which it fell were split asunder.

직역을 해놓으면 이문열의 번역이 틀린 것이라 이야기하기도 좀 그렇죠? 이 점은 리동혁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원래 나관중 본에서는 귀를 붙잡았다는 부분이 없었고, 벽돌이 쪼개진 것도 조조가 길평을 밀어냈을 때 길평에게 밟힌 벽돌이 쪼개졌다, 즉 그렇게 심하게 밀었다는 것으로 묘사된 것을 모종강 본에서 구체적 묘사를 하면서 이렇게 바뀐 것이었습니다.

모종강 본의 새로운 묘사가 한글판에서 새로운 오해를 살 소지를 만들었다지만 책을 보면서 진실과 픽션을 가려보는 눈은 꼭 키워야 하지 않을까? (p 113)

조조의 귀에 약을 부으려는 것은 (리동혁의 지적대로) 햄릿을 떠올린 이문열의 오역이 맞겠지만 - 귀를 잡아서 얼굴을 당기고자 했거나, 귀를 비틀어서 입을 벌리려 했다는 것이 옳겠습니다. 이 점은 영문 번역을 보아도 명백하죠 - 그 약이 떨어져서 벽돌이 갈라졌다는 것은 모종강도 이문열처럼 맹독이어서 그랬다는 식의 픽션을 넣은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겠습니다.

물론 그 정도라면 이미 약이 아니라 강산强酸일 것이고, 그냥 염산테러하듯이 뿌려버리면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이 약의 가공할 위력에 대한 오류 책임은 모종강에게 있는 것으로 보아야겠지요. 그러나 가령 요시가와 에이지와 같은 경우는 이런 대목은 가볍게 무시해버리고 있다는 점도 감안은 해서 생각해야겠지요.

흠, 근데 이걸 어느 밸리에 보내야 할까요? 진짜 역사 이야기는 아니니 역사 밸리로 보내긴 좀 그렇군요.

진짜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좀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군요.

길평 이야기는 삼국연의의 허구입니다. 저 모델이 된 사람은 태의령 길본吉本으로, 그는 218년에 경기, 위황과 모의하여 아들 길막, 길목과 함께 허도 책임자였던 왕필을 죽이고 관우를 끌어들이려 반란을 획책했던 자였습니다. 1천여명의 무리를 모았으나 왕필을 죽이는데 실패했고, 왕필은 전농중랑장 엄광과 함께 이들을 붙잡아 참수형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삼국연의 길평의 이야기는 199년에 있었던 것으로 나오죠. 또 삼국연의에서는 69화에서 경기, 위황의 반란을 다루며 길평의 아들 길막과 길목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가담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원 글이 역사 밸리에 있는 것으로, 이 글은 그 글에 대한 트랙백이니 같은 카테고리에 놓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덧글

  • 슈타인호프 2008/12/20 11:54 #

    크,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실존인물이다 보니 길평도 실존인물인 줄 알았습니다. 공부가 부족한 티가 이렇게 나는군요. 애초에 길평이 가공의 인물인 줄 알았으면 역사가 아니라 창작이나 도서밸리로 보냈어야 했는데--;;

    덧 : 그 일 관련해서, 계속 신경 써 주시는 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__)
  • 초록불 2008/12/20 12:00 #

    그만큼 나관중이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엮고 있는 거라 할 수 있죠...^^
  • 기불이 2008/12/20 11:59 #

    어차피 당시 그릇도 다 흙으로 만들었을텐데 벽돌이 녹는 독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란....
  • 초록불 2008/12/20 12:07 #

    이 당시에 사용된 그릇은 물론 흙으로 만들었지만, 토기(土器 clayware)...는 아니고 도기(陶器 earthernware)인데, 유약을 바른 토기라고 해야하겠지요. 산을 담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유약을 바르면 유리질의 껍질이 씌워지는 것이라 산을 담을 수도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주제와는 큰 관련은 없지만...^^
  • 슈타인호프 2008/12/20 12:12 #

    조조 정도의 세력가면 청동기를 일상용구로 사용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 sakulove 2008/12/20 14:18 #

    유리(사기인 도자기도 마찬가지)는 규산염이 주가 된 안정된 구조라 산과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산성 용액을 담아도 부식되지 않습니다.
  • 초록불 2008/12/20 14:25 #

    그렇군요. 그럼 도기에 산을 담는다는 설정은 가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기불이 2008/12/20 16:14 #

    근데 산성용액이라면 벽돌은 왜 녹나여...?
  • 초록불 2008/12/20 16:24 #

    하긴 산성 용액이라도 벽돌이 녹는지, 안 녹는지는 모르겠네요. 에일리언에서 에일리언의 피가 쇠갑판을 녹이는 장면이 인상적이어서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던 모양입니다.

    sakulove님 말씀으로는 시멘트나 대리석은 독액으로 녹일 수도 있는 모양입니다.
  • shaind 2008/12/20 17:01 #

    그런데 일단, 과연 벽돌이 녹는 독이란 게 과연 뭘까요????? 전 그게 더 궁금합니다. (그걸 알아야 그릇이 녹을지 안 녹을지도 논할 수 있겠고)
  • sakulove 2008/12/20 17:42 #

    앗 저는 본문을 보고 벽돌은 길평이 밟아서 깨진 거라고 생각해서 그릇 부분만 이야기 한 거였어요. 밑에 단 리플은 비상이 물에 녹으면 산성 용액이 된다는 뜻에서 쓴 거구요.( 배길수 님의 리플을 보니 산성도가 약해서 녹이진 못하는 듯) 그런데 저시절 벽돌이면 요즘처럼 점토를 구워 만든 걸테니 역시 산과는 반응하지 않을 것 같네요.

    참고로 토마스 불핀치가 쓴 그리스 신화에 메데이아가 테세우스에게 건낸 독이 든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서 대리석 바닥이 거품을 내며 끓어올랐다는 문구가 있는데-이건 바곳 풀로 만든 독이라고 합니다- 이거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떡밥인듯...
  • 동사서독 2008/12/20 12:14 #

    오역의 '역사'에 관한 글이니 역사 밸리에 보내도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죽은 장제의 미망인이요, 갓 귀순한 장수의 형수의 육체를 탐했던 조조처럼 색욕이 강한 자라면, 좀 더 색에 빠져 정사를 잊도록 음약(淫藥)을 조제해 바치는 것도 묘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허리 놀림이 뛰어나고 감창이 절창이라 남자를 녹이는, 절세미녀를 조조 눈에 띄게 하는 것도 괜찮을 듯 싶구요. (영화 '색계'에서처럼 몸으로 접근한 여자스파이가 오히려 '남자'에게 녹아나서 암살 작전을 실패로 만드는 일도 있을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 少雪緣 2008/12/20 12:35 #

    과연, 답은 투척테러! 중기관총으로 무장한 소말리아 해적을 물리치는 대륙의 투척은 당시 길평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뤄낸 업적이었군요(...뭔가틀려)
  • Polycle 2008/12/20 13:15 #

    재밌네요. 벽돌이 갈라지는 약이라.... 찾아봐야겠습니다.
  • 炎帝 2008/12/20 13:50 #

    약사발채로 내던져서 그 약사발 떨어진 충격에 벽돌이 갈라졌다 보는게 어떨까 생각됩니다.
    제가 독약 먹기 직전이어도 그런 꺼림찍한 물건은 있는 힘껏 던졌을테니까요.


    동사서독//예전에 어느잡지에서 본 내용이 생각나네요.
    어릴때부터 독약에 준하는 것을 먹여 안는 것만으로도 독살될 수 있었다던데...
    (알렉산드로스가 그 여자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도 검색되더군요.;;)
  • 초록불 2008/12/20 13:55 #

    1. 그렇게 볼 수도 있긴 하지만, 潑자의 용법상 곤란합니다. 애초에 저 장면은 길평이 밟은 벽돌이 부서졌다는 것의 변용에서 나온 것이고...

    2. <독인>이라고 해서 무협소설에서 차용하는 클리셰 중 하나죠.
  • 炎帝 2008/12/20 14:07 #

    그렇군요. 한자를 잘 몰라 그냥 제 생각만 적었습니다.;;

    그리고 독인이라는 것은 무협소설 뿐만 아니라 외국작품에서도 종종 언급되었다고 합니다.
    주로 인도에서 그런 비법이 있다고 말하던데, 아무래도 알렉산드로스 사망 비사에서 유래된것 같군요.
  • 동사서독 2008/12/20 14:07 #

    일본애니메이션 수병위인풍첩(무사 쥬베이)에 등장하는 여자 닌자 '카게로'라든지
  • 초록불 2008/12/20 14:12 #

    네, 물론 무협소설에서<만> 사용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 동사서독 2008/12/20 20:31 #

    위의 절세미녀 댓글은 '달기'에서 힌트를 얻은 코멘트입니다.
  • 炎帝 2008/12/20 14:17 #

    만화 올라온 곳에 가보니까 '비상으로 독살한다' 라는 구절이 있군요.
    원문에 독약으로 비상을 쓴다는 구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비상이라면 저렇게 녹아내릴리 없겠죠.
    (돌가루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원문에 저렇게 비상을 쓴다고 말하는 구절이 있나요?
    비상이 저때 자주 쓰이던 독약이긴 하지만....
  • 초록불 2008/12/20 14:24 #

    원문에는 그냥 독약이라고만 나옵니다.
  • sakulove 2008/12/20 14:35 #

    비상의 화학식이 As2O3인데 물에 녹이면 H3AsO4가 되어 산성용액입니다(황이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사극에서 은수저를 꽂아보면 황 성분 때문에 색이 변색됩니다). 석회석(시멘트)이나 대리석 바닥은 녹일 수 있죠 ㅋ
  • 炎帝 2008/12/20 14:31 #

    생각해보면 삼국지는 픽션이 섞였음에도 픽션이라 단정하기도 참 애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로는 화성이 배경이어도 상관 없을 거란 말이 나왔던 것과 달리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까지 인기를 끈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것 때문에 잘못된 지식을 가진 자가 생겼다곤 하지만...
    (예전에 우리나라 판타지 사극 비평하던 글에 '설마 드라마랑 실제랑 구분 못하겠느냐' 라는
    말에 '삼국지보고 실사도 그럴거라 단정하던 자들도 있지 않느냐' 라고 반박하던 일이 떠오르네요.)
  • 초록불 2008/12/20 14:36 #

    픽션은 픽션일 뿐이죠. 역사를 배경으로 쓴 소설인데, 전근대의 소설답게 역사의 주역을 주인공으로 놓는 과감한 방법이 사용되었죠. 이런 소설은 쉽게 찾기 어렵습니다. 서구 쪽 역사소설의 아버지라 할 월터 스콧은 역사소설에서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지 말라는 말까지 했죠. 그래서 아이반호우라는 창작 인물이 주인공이고 실제 역사 인물은 배경으로 나오게 됩니다...^^
  • 炎帝 2008/12/20 14:51 #

    그러고보니 삼총사에서도 그 버킹엄과 리슐리외 추기경은 배경으로 나오는군요.
    물론 총사들이 추기경과 대립 위치에 있긴 했지만 진짜 싸우는건 그의 부하인 밀라디였으니...

    우리나라도 전우치나 홍길동이 실존인물이라 하지만 역사소설이라기보단 판타지에 가깝고
    무었보다 역사의 주역도 아니었으니... 정말 역사의 주역이 대놓고 등장하는 작품은 보기 힘들군요.
  • 배길수 2008/12/20 14:59 #

    불화수소(HF)면 규산염이 녹습니다.
    아비산(H3AsO3)의 산성도는 붕산 정도라고 합니다.(........)
  • sakulove 2008/12/20 17:44 #

    그렇군요. 불소산에 녹는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산이라고 하면 염산이나 황산을 생각하실 것 같아서 그냥 산에는 안녹는다고 썼었어요...
  • 배길수 2008/12/20 18:13 #

    하긴 삼국지 시대에 "탕약 속의 불화수소산이 약사발을 녹여..."하고 나오면 왠지 웃길 것 같아요;;
  • 뽀도르 2008/12/20 15:18 #

    강산이라도 얼굴에 뿌리기만 해서는 심한 화학적 화상을 입을 뿐이지 죽이기는 쉽지 않겠지요. 길평이 굳이 귀 속에 들이 부으려 한 이유겠지요. 뭐 과장된 대로 벽돌이 갈라질 정도였다면 뿌리기만 해도 죽일 수 있었겠습니다만...
  • 새매 2008/12/20 15:37 #

    사소한 부분입니다만 요시다 에이지 -> 요시가와 에이지 말씀이시죠?
  • 초록불 2008/12/20 15:40 #

    앗, 그렇습니다...^^
  • 2008/12/20 16:47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8/12/20 16:58 #

    영작도 있군요. (하긴 없을리가...) 이건 본문에 좀 인용하겠습니다...^^;;
  • 루드라 2008/12/21 03:56 #

    월탄 삼국지에서도 길평이 조조의 귀에 약을 부으려고 드는 장면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귀와 코와 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운운했던 거 같습니다. 책이 창고 안에 있어서 확인은 못하겠네요.

    근데 독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연기가 나는 클리세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사용되는 모양입니다. 영화에서도 굉장히 흔하죠. 최근엔 황후화인가에서 봤던 거 같은데...
  • 초록불 2008/12/21 10:36 #

    저도 월탄 삼국지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 兕虎 2009/01/11 03:26 #

    고대중국에서는 궁궐같은 곳의 석재로 한백옥이라 하는 대리석재를 사용했습니다. 이런 재료를 이용해 전돌을 만들었다면, 독약에 깨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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