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교과서의 문제는 국가 권력이 역사 편찬에 지나치게 개입해선 안 된다는 것인데 이 점을 영원히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너무 오래도록 국정교과서 체제에 길이 든 탓일지도 모른다. 또는 저 "지나치게"에 대한 "해석" 문제일 수도 있겠다.
슈타인호프님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교과서에도 다양한 오류들이 보이게 마련이다. 그리고 슈타인호프님의 지적에 교과서 발행 출판사들도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런 객관적인 오류는 바로 수정하겠다는 것이 출판사의 입장이다.
문제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사관이다. 사관과 객관을 혼동해서는 곤란한데, 사관과 객관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사관을 위해서 객관을 위배한다면, 그것은 극단적인 잘못을 범하는 것으로 역사 서술이라 부르기 창피한 노릇이겠지만 문제는 그 경계를 밝히기란 쉽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다음 논의가 가능하다. 가령 백범 김구의 독립운동을 "테러"라 부를 때만 해도 "테러"의 정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20세기 초와 21세기 초의 "테러" 개념은 동일한 것인가 라는 문제를 거쳐 과연 백범의 활동이 "테러"인가를 따지는 데까지 가야 하는데, 이 경우 쌍방 간의 논전은 볼만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미 객관적 사실을 확보한 상태에서 서로의 "사관"에 의한 "해석"으로 다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은 단지 그것이 있었다는 의미로만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에 따라 "객관적 사실"들은 어떤 방향을 향해 정렬되는데, 그 방향이 바로 "사관"이다.
이 문제를 확대시키면 역사학에 객관이 존재하는가, 라는 심오한 주제로 발전하게 되는데 간략하게 말하자면 이 문제의 해답은 의외로 쉽다. 역사가는 하나의 방향성에 완전히 어긋나는 객관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을 몰랐다면 역사가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요, 묻혀진 사료라서 그것을 몰랐다 한다면 새로운 사실이 알려진 시점에서 자신의 학설을 재고해야 한다.
학자들간의 논전도 아닌 일반인들 사이의 논전에서는 학문 연구방법의 엄정함이 어차피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우선 상대방의 입장을 재단한 뒤에, 나머지 이야기는 그 정파적 해석에 따라 행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모를 수도 있는 사실을 들어서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비난하고 조롱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근현대사가 문제가 되듯이 조선 시대에는 고려사가 당대의 근현대사로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고려사의 편찬 작업은 조선 건국 3개월만에 시작되었는데 정도전과 정총이 4년간 편찬하여 <고려국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는데,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정도전의 입맛에 따라 만들어진 덕분에 그 왜곡의 정도가 매우 심했다. 세종은 이 책을 가리켜 "없느니만 못하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태종은 정도전과 같이 개국의 최대공신이라 할 수 있는데, 당연히 정도전의 시각으로 기술된 책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는 당대의 일을 자신이 다 알고 있다고 하며 고려사의 개편 작업에 착수했다.
태종 14년에 하륜, 이숙번, 변계량 등에 의해서 고려사가 새로 집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태종이 양위를 했고 하륜이 사망함에 따라 고려사 편찬의 짐은 세종에게로 넘어갔다. 다행히도 한국사 최고의 성군이며 현군인 세종은 역사 편찬에 있어서도 올바른 원칙을 갖고 있었다. 드물게도.
기존의 고려사는 사대의 입장에서 쓰인 탓에 세종은 있는 그대로 기록하라 명했으나 변계량이 말을 듣지 않는다. 변계량은 이것은 이미 고려 때 이제현이 그리 쓴 것이고, 정도전 뿐만 아니라 이색도 그렇게 기록한 것이며 그것이 유교의 서술 원칙에 맞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세종은 고인이 잘못했다면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역사란 사실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이라고 수사 원칙을 강력하게 밀어부치게 된다.
“경의 말에는 내 능히 의혹을 풀지 못하겠다. 주자 의 강목은 이 책과는 다르다. 주자 강목은 명분을 바로잡고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여, 만대의 아래에서도 일성(日星)과 같이 환히 밝은 것이 있으나, 이 글에는 대강(大綱)과 세목(細目)의 구분이 없는데, 그대로 쓰지 않는다면 후세에 무엇으로 연유하여 그 사실을 보고 알겠는가. 경이 또 말하기를, ‘ 익재 가 처음에 시작한 일이라. ’고 하니, 내 비록 굳이 옳고 그른 것을 말하지 않겠으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앞사람의 과실을 뒷사람이 쉽게 안다. ’고 하였거니와, 경이 말한 것같이 지금의 사관이 그것을 보고서 쓸 것이라는 것은, 즉 사실 그대로 쓴다는 말이니, 사실을 사관이 그대로 쓴다 해서 무엇이 해롭겠는가.”
세종은 매우 꼼꼼하게 고려사를 검토했기에 사관들이 청탁을 받고 글을 왜곡하는 일을 칼처럼 밝혀냈다. 당시 고려사 편찬을 맡은 권제가 자기 아버지 일을 비롯하여 청탁 받은대로 선대 기록 중 수치스러운 부분을 은폐해버렸던 것이다. 세종이 아니었어도 이 일을 잡아냈을지 알 수가 없다.
세종은 재위 내내 고려사 완성을 바랐으나 끝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죽자마자 김종서 등은 고려사 편찬 작업을 마무리해서 문종에게 바쳤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김종서는 기전체 사서인 <고려사>와는 별도로 <고려사절요>라는 편년체 사서를 또 편찬해서 다음해에 바친 것이다. 말하자면 김종서는 <고려사> 작업과 <고려사절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고, <고려사절요>에 더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오늘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서로 보완해주는 역사서로 고려사 공부에 필수적인 사료로 작동한다. 그러나 두 사서에 작동한 사관은 서로 달랐다. <고려사>가 세종의 원칙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고려사절요>는 김종서의 원칙에 의해 만들어졌다. 김종서는 왕권에 대해서 신권을 강조하는 서술을 택하고 있었다. 사대적인 부분도 좀 더 강화되었다. 특히 논찬을 통해 고려 고유의 문화전통을 비난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김종서는 <고려사절요>를 중시했기 때문에 늦게 편찬된 <고려사절요>를 먼저 배포했다. <고려사>는 수양대군(세조)이 김종서를 처단한 후에야 배포될 수 있었다. 수양대군이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후 성삼문이 <고려사절요>를 증판하자고 상주하지만 이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김종서의 사관 중 유교적 경직성은 세조가 착수하여 성종 때 완성된 역사서 <동국통감>을 매우 딱딱하고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 사서로 편찬케 하고 만다.
세종은 권력에 의해서 역사서가 개악되는 것을 막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사후, 사서의 원칙이 서서히 왜곡되어 갔으며 결국 경직된 역사책이 나오고 말았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그것은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결국은 역사 편찬의 원칙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세조는 세종의 아들로 아버지의 수사 원칙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편찬하게 한 동국통감은 세조 사후 성종 원년에 완성되었으나, 성종은 그 역사책을 거부하고 새로 만들게 한다. 그리하여 신진사대부 사림이 적극 참여하여 사론을 보강하여 성리학적인 원칙으로 점철된 <동국통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동국통감>을 끝으로 조선의 관찬사서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다시 세종의 원칙이 사대부들 사이에서 살아나면서 다양한 역사책들이 민간에서 편찬되기에 이른다.
<고려사>와 <동국통감> 모두 권력이 편찬에 개입했다. 그 결과 한쪽은 공정한(물론 여기서 공정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근대적 상황을 고려한 공정함이다) 사서가 되었으나, 한쪽은 권력의 의도에 따른 역사책이 된 것이다. 권력의 개입이 늘 잘못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검정 원칙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안 된다. 그리고 권력은 언제나 그런 유혹을 받기 마련이다. 때문에 되도록이면 민간의 자율적인 원리를 따르는 것이 좋다.
근대 역사학이 도입된 이래 역사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런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역사학자들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받고 국가가 역사의 해석을 독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여전히 사실과 해석, 객관과 사관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이 사람들에게 있어 정권이 다시 바뀌는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정권이 바뀌면 이들은 새로 정권을 잡은 이들이 자기들처럼 하리라 생각할 테니까. 농담도 아니다. 사실 지금 적잖은 사람들이 그런 증오를 불태우는 것을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다. 결국은 비정상적인 일을 함으로써 증오가 높아지고, 증오가 높아짐으로써 비정상적인 일을 더 불러오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우리 사회가 빠져들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우려스럽다. 결국 정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들은 무슨 일이라도 하고야 말리라는 각오를 세우게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지식인은 권력에 대해서 항상 비판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나는 감히 지식인을 자처할 수는 없지만, 그런 자세만은 가지고자 노력하는 중이다. 그런 고로 내 블로그를 살펴보면 전 정권의 통치자요, 실세였던 노무현, 유시민에 대한 비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이며, 그것은 내가 지지하는 정당(불행히도 현재는 지지 정당이고 뭐고가 없지만)이 정권을 잡는다해도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 된다.
슈타인호프님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교과서에도 다양한 오류들이 보이게 마련이다. 그리고 슈타인호프님의 지적에 교과서 발행 출판사들도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런 객관적인 오류는 바로 수정하겠다는 것이 출판사의 입장이다.
문제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사관이다. 사관과 객관을 혼동해서는 곤란한데, 사관과 객관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사관을 위해서 객관을 위배한다면, 그것은 극단적인 잘못을 범하는 것으로 역사 서술이라 부르기 창피한 노릇이겠지만 문제는 그 경계를 밝히기란 쉽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다음 논의가 가능하다. 가령 백범 김구의 독립운동을 "테러"라 부를 때만 해도 "테러"의 정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20세기 초와 21세기 초의 "테러" 개념은 동일한 것인가 라는 문제를 거쳐 과연 백범의 활동이 "테러"인가를 따지는 데까지 가야 하는데, 이 경우 쌍방 간의 논전은 볼만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미 객관적 사실을 확보한 상태에서 서로의 "사관"에 의한 "해석"으로 다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은 단지 그것이 있었다는 의미로만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에 따라 "객관적 사실"들은 어떤 방향을 향해 정렬되는데, 그 방향이 바로 "사관"이다.
이 문제를 확대시키면 역사학에 객관이 존재하는가, 라는 심오한 주제로 발전하게 되는데 간략하게 말하자면 이 문제의 해답은 의외로 쉽다. 역사가는 하나의 방향성에 완전히 어긋나는 객관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을 몰랐다면 역사가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요, 묻혀진 사료라서 그것을 몰랐다 한다면 새로운 사실이 알려진 시점에서 자신의 학설을 재고해야 한다.
학자들간의 논전도 아닌 일반인들 사이의 논전에서는 학문 연구방법의 엄정함이 어차피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우선 상대방의 입장을 재단한 뒤에, 나머지 이야기는 그 정파적 해석에 따라 행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모를 수도 있는 사실을 들어서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비난하고 조롱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근현대사가 문제가 되듯이 조선 시대에는 고려사가 당대의 근현대사로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고려사의 편찬 작업은 조선 건국 3개월만에 시작되었는데 정도전과 정총이 4년간 편찬하여 <고려국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는데,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정도전의 입맛에 따라 만들어진 덕분에 그 왜곡의 정도가 매우 심했다. 세종은 이 책을 가리켜 "없느니만 못하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태종은 정도전과 같이 개국의 최대공신이라 할 수 있는데, 당연히 정도전의 시각으로 기술된 책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는 당대의 일을 자신이 다 알고 있다고 하며 고려사의 개편 작업에 착수했다.
태종 14년에 하륜, 이숙번, 변계량 등에 의해서 고려사가 새로 집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태종이 양위를 했고 하륜이 사망함에 따라 고려사 편찬의 짐은 세종에게로 넘어갔다. 다행히도 한국사 최고의 성군이며 현군인 세종은 역사 편찬에 있어서도 올바른 원칙을 갖고 있었다. 드물게도.
기존의 고려사는 사대의 입장에서 쓰인 탓에 세종은 있는 그대로 기록하라 명했으나 변계량이 말을 듣지 않는다. 변계량은 이것은 이미 고려 때 이제현이 그리 쓴 것이고, 정도전 뿐만 아니라 이색도 그렇게 기록한 것이며 그것이 유교의 서술 원칙에 맞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세종은 고인이 잘못했다면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역사란 사실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이라고 수사 원칙을 강력하게 밀어부치게 된다.
“경의 말에는 내 능히 의혹을 풀지 못하겠다. 주자 의 강목은 이 책과는 다르다. 주자 강목은 명분을 바로잡고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여, 만대의 아래에서도 일성(日星)과 같이 환히 밝은 것이 있으나, 이 글에는 대강(大綱)과 세목(細目)의 구분이 없는데, 그대로 쓰지 않는다면 후세에 무엇으로 연유하여 그 사실을 보고 알겠는가. 경이 또 말하기를, ‘ 익재 가 처음에 시작한 일이라. ’고 하니, 내 비록 굳이 옳고 그른 것을 말하지 않겠으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앞사람의 과실을 뒷사람이 쉽게 안다. ’고 하였거니와, 경이 말한 것같이 지금의 사관이 그것을 보고서 쓸 것이라는 것은, 즉 사실 그대로 쓴다는 말이니, 사실을 사관이 그대로 쓴다 해서 무엇이 해롭겠는가.”
세종은 매우 꼼꼼하게 고려사를 검토했기에 사관들이 청탁을 받고 글을 왜곡하는 일을 칼처럼 밝혀냈다. 당시 고려사 편찬을 맡은 권제가 자기 아버지 일을 비롯하여 청탁 받은대로 선대 기록 중 수치스러운 부분을 은폐해버렸던 것이다. 세종이 아니었어도 이 일을 잡아냈을지 알 수가 없다.
세종은 재위 내내 고려사 완성을 바랐으나 끝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죽자마자 김종서 등은 고려사 편찬 작업을 마무리해서 문종에게 바쳤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김종서는 기전체 사서인 <고려사>와는 별도로 <고려사절요>라는 편년체 사서를 또 편찬해서 다음해에 바친 것이다. 말하자면 김종서는 <고려사> 작업과 <고려사절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고, <고려사절요>에 더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오늘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서로 보완해주는 역사서로 고려사 공부에 필수적인 사료로 작동한다. 그러나 두 사서에 작동한 사관은 서로 달랐다. <고려사>가 세종의 원칙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고려사절요>는 김종서의 원칙에 의해 만들어졌다. 김종서는 왕권에 대해서 신권을 강조하는 서술을 택하고 있었다. 사대적인 부분도 좀 더 강화되었다. 특히 논찬을 통해 고려 고유의 문화전통을 비난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김종서는 <고려사절요>를 중시했기 때문에 늦게 편찬된 <고려사절요>를 먼저 배포했다. <고려사>는 수양대군(세조)이 김종서를 처단한 후에야 배포될 수 있었다. 수양대군이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후 성삼문이 <고려사절요>를 증판하자고 상주하지만 이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김종서의 사관 중 유교적 경직성은 세조가 착수하여 성종 때 완성된 역사서 <동국통감>을 매우 딱딱하고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 사서로 편찬케 하고 만다.
세종은 권력에 의해서 역사서가 개악되는 것을 막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사후, 사서의 원칙이 서서히 왜곡되어 갔으며 결국 경직된 역사책이 나오고 말았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그것은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결국은 역사 편찬의 원칙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세조는 세종의 아들로 아버지의 수사 원칙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편찬하게 한 동국통감은 세조 사후 성종 원년에 완성되었으나, 성종은 그 역사책을 거부하고 새로 만들게 한다. 그리하여 신진사대부 사림이 적극 참여하여 사론을 보강하여 성리학적인 원칙으로 점철된 <동국통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동국통감>을 끝으로 조선의 관찬사서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다시 세종의 원칙이 사대부들 사이에서 살아나면서 다양한 역사책들이 민간에서 편찬되기에 이른다.
<고려사>와 <동국통감> 모두 권력이 편찬에 개입했다. 그 결과 한쪽은 공정한(물론 여기서 공정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근대적 상황을 고려한 공정함이다) 사서가 되었으나, 한쪽은 권력의 의도에 따른 역사책이 된 것이다. 권력의 개입이 늘 잘못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검정 원칙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안 된다. 그리고 권력은 언제나 그런 유혹을 받기 마련이다. 때문에 되도록이면 민간의 자율적인 원리를 따르는 것이 좋다.
근대 역사학이 도입된 이래 역사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런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역사학자들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받고 국가가 역사의 해석을 독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여전히 사실과 해석, 객관과 사관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이 사람들에게 있어 정권이 다시 바뀌는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정권이 바뀌면 이들은 새로 정권을 잡은 이들이 자기들처럼 하리라 생각할 테니까. 농담도 아니다. 사실 지금 적잖은 사람들이 그런 증오를 불태우는 것을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다. 결국은 비정상적인 일을 함으로써 증오가 높아지고, 증오가 높아짐으로써 비정상적인 일을 더 불러오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우리 사회가 빠져들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우려스럽다. 결국 정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들은 무슨 일이라도 하고야 말리라는 각오를 세우게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지식인은 권력에 대해서 항상 비판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나는 감히 지식인을 자처할 수는 없지만, 그런 자세만은 가지고자 노력하는 중이다. 그런 고로 내 블로그를 살펴보면 전 정권의 통치자요, 실세였던 노무현, 유시민에 대한 비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이며, 그것은 내가 지지하는 정당(불행히도 현재는 지지 정당이고 뭐고가 없지만)이 정권을 잡는다해도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 된다.
덧글
에서 뭔가 울컥했습니다. 의외로 객관이란 단어가 실은 주관에 경도될 수 있음을 인지 못하는 경우가 잦은 듯 싶습니다. 어떤 사실에 주목하느냐도 실은 주관의 영역이 될 수 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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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 부분에 있어서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왠지 이 정권이 이렇게 가다가는 권력을 뺏긴(?) 다음 자기들이 당할 불이익을 무서워해(그런 일이 없다고 해도 말이죠)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정권을 연장하는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살아가면서 언제나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언제나 의심하고 질문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비판적인 자세는 나 자신의 생각과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초록불님의 글과 같은 다른 사람들의 좋은 글과 생각을 접하는 일이겠지요. 올려주신 좋은 글에 감사드리고 새해에도 왕성한 활동을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리고 늘 건강하시구요.
솔직한 심정에서는 정권이 바뀐 후에 강력한 응징이 있었으면 합니다만, 그것이 또 증오의 악순환이 될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
어느 분 표현을 빌자면 "굇수" 수준이라고 해야...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틀린걸 고치게 해야지 내 생각과 다르다고 뜯어 고치려하는 꼴이라니.-_-;;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그리고 실록과 수정실록을 모두 '관찬'의 것으로 인정하고, 정치적 필요성 가운데서도 사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고민했던 옛 사람들에 비하여, 자기와 다르다고 뜯어고치려 하면서 파편화된 토씨 하나하나를 찝어내서 이에 부응하는 지금의 세태는 과연 어떤 것이련지....
신년에도 무녕하시기를 빕니다. ^^
그래도 새해 복 많이 받고 가정이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수치스러운 역사를 가르치지 않은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지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정말로 보수주의자라면 뉴라이트가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깐 이런맥락의 이야기였는데, 정확한 내용은 약간 가물가물하네요)
역사에 사견이라는 것은 '가능한' 배제해야되죠. 특히 현정부에 맞지 않는다고 내용을 변조하는 것은 민주주의 정부에 걸맞지 않은 일입니다.
항상 좋은 글읽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