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탐정록 - 조선에 이런 탐정이 있을 줄이야... *..문........화..*



한동진님이 쓴 [경성탐정록] - 사인본을 받았다.

한동진님과는 꽤 오래전부터 안 사이다. 하이텔 시절 매킨토시 동호회 고맥(gomac)에서 처음 알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오프라인에서 만나본 적은 별로 없다. [경성탐정록]은 출간을 적극 권장했던 입장에서 책으로 나와 참 기쁘게 생각하던 참에 보내주신다고까지 하여 얼른 받았다. (여러차례 밝힌 바 있지만, 난 누가 뭐 준다고 하면 사양하는 법이 없다...^^;;)

이 책은 단편집이다. 수록된 단편은 모두 다섯 편으로 [운수 좋은 날], [황금 사각형], [광화사], [천변 풍경], [소나기]의 순서로 되어 있다. 제목들이 낯익은 것은 일부러 그렇게 선택된 탓이다.

해설에 [황금사각형]을 루블랑의 아르센 뤼팽 작품 제목이라고 해서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루블랑의 작품 이름은 [황금삼각형]이다. 굳이 말하자면 패러디 제목이라 해야겠지만, 물론 다른 작품과도 마찬가지로 줄거리는 제목을 빌린 작품과는 별 관계가 없다.

추리소설은 매우 특이한 장치를 가진 소설이다. 흔히 가지고 있는 인상은 명탐정이 등장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소설로, 그 수수께끼를 독자와 같이 경쟁하면서 풀어나가는 형식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논리적 퍼즐놀이처럼 여겨지는 측면이 있다. 이런 인상을 준 것은 미국 추리소설가인 엘러리 퀸으로, 사실 그 이전의 추리소설은 독자와 경쟁하겠다는 식의 수수께끼 놀이라는 측면을 크게 강조했던 것 같지 않다. 가령 가장 고전적인 셜록 홈즈나 아르센 뤼팽의 추리소설들을 읽어보면, 이런 수수께끼 놀이의 원형처럼 보이는 소설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즐겁게 읽어나가면 되는 - 다시 말하면 굳이 전지전능하신 탐정님과 수수께끼 풀이에 목매달지 않고 - 소설인 경우가 더 많다. (심지어 엘러리 퀸 마저도 자신의 주인공의 빈약함에 결국 드루리 레인 시리즈를 만들기에 이르렀으니...)

셜록 홈즈가 첫 등장한 [주홍색 연구]와 같은 경우, 범인의 동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오직 범인의 정체 밝히기만 치중하고 범인을 체포하면서 홈즈의 이야기는 끝난다. 그리고 범인의 동기에 얽힌 이야기 자체는 2부로 새롭게 선보인다. 이런 스타일은 코넌 도일의 또 다른 장편 [공포의 계곡]도 유사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들이 재미가 없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나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쓰 마플 시리즈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 노처녀(라기보다는 할머니) 탐정이 등장하는 이야기 중에는 영국인의 습관, 생활방식, 문화형태 등을 모르면 그 해답을 도무지 맞출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 제법 있다. 어려서 읽을 때는 "시시하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보편적이지 않다, 수수께끼 놀이에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반칙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반칙 이야기를 하니까 크리스티 여사가 쓴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읽고나서 멍했던 생각이 난다. 이 작품과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은 추리소설에서 반칙을 사용한 것이라 해서 논쟁이 일었던 작품들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반칙일까?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을 규정한 뒤에 그에 어긋나는 것을 반칙이라 한다는 것은 과연 타당한 일일까? 말하자면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적 속성에 대한 반칙일지는 모르겠으나, "소설"이라는 정의에 놓고본다면 어찌 되는 것일까? (이 이야기를 꺼내면 김용의 [녹정기]가 저절로 떠오른다. 무공을 모르며, 잔머리 사기꾼이 주인공인 무협. 이 주인공에겐 무와 협이 모두 없다! 그럼 이 소설은 무협소설이 아닐까?)

어쩌면 바로 이런 점이 국내추리소설의 몰락을 가져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추리소설의 사건이란 실상은 그 클리셰들에 의해서 지나치게 옥죄어져 있기 때문에 사실상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사실 장르소설이라는 게 대체로 그렇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을 배경으로 깔고 써나가야 하는 추리소설은 해외를 배경으로 하는 외국 추리소설에 비해 부담감이 백만 배쯤 늘어날 수밖에 없다. 외국 추리소설은 외국 것이라고 해서 그냥 대충 넘어가 주는 것이 국내물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잠깐, 그렇다면 그 추리소설 역시 자국에서는 똑같은 한계에 부딪쳐야 마땅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물론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길고 복잡한 이야기들이고, 분명 여기 들어와서 내가 무슨 평을 던지는가 궁금해서 이 글을 읽고 있을 한동진님에 대한 예의도 아니니, 이만 본론으로 넘어갈까 한다. (어이, 너무 날로 먹는 거 아냐, 라고 말해도 슬쩍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국내 추리물에서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고전추리소설(이 책의 후기에서는 "퍼즐 미스터리"라고 말한다.)은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다. 때문에 공간을 일제강점기의 경성으로 옮겨 놓은 것이 [경성탐정록]이다. 그런데 이런 이동은 비단 퍼즐을 위해서 좋은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공간의 이동으로 인한 현실 이탈의 효과를 더불어 가져온다. 이곳 [경성]은 [서울]이 아니다. 사실상 완전히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독자는 현실이 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책을 감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독자는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지언정 작가는 그렇게 되지 못한다. 이 경성이란 도시는 지금의 서울이 아니긴 하지만 실재했던 도시고, 사람들이 대강은 그 도시에 대해서 알고 있기도 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소설 속에 녹여서 살아움직이는 공간으로 바꿔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잘 하지 못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는 소설이 되고, 너무 자료만 가져다 얽어놓으면 그저 한 권의 자료집이 되고 만다. 이런 부분을 얼마나 잘 요리해내는가가 바로 작가가 가지는 능력이다.

그리고 한동진님은 이런 일을 참 잘해냈다. 나는 한두군데 마음에 걸리는 극히 사소한 부분들을 보긴 했으나,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까먹어버렸으므로 묻지 마시라.)

앞에 길게 추리소설의 트릭에 관련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경성탐정록]의 트릭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나는 다만 추리소설은 트릭 해결만을 위한 소설이 아니며 그것은 "소설"로서 많은 부분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다 그 이야기가 길어졌을 뿐이다.

[경성탐정록]은 추운 겨울날 따뜻한 이불 속에 들어앉아 고구마를 까먹으면서 편안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멋진 소설이고, 천재 명탐정의 멋진 추리를 쫓아가면서 감탄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재미난 작품이다. 이 정도 매력적인 캐릭터라면 조만간 영상화해서 다시 만날 기회를 잡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본격적인 소설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는데 그건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하기 때문이다.

오직 아쉬운 점이라면 판형이 4.6판으로 작아서 페이지가 두꺼워진 것인데 이것이 대여점용 판형이라는 것을 아는 입장에서는 좀 씁쓸하다. 신국판이나 변형 신국판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북커버를 따로 만드는 것보다 책보기도 좋고 여러모로 낫지 않았을까 한다. 책값이 국내작가 책치고는 비싼 편인데도 알라딘에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것은 이 책이 가진 파괴력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경성탐정록]의 탐정 설홍주에 대해서도 몇마디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 탐정이 활약할 장편소설 이후로 미뤄두기로 하겠다. 분명 더 멋진 모습을 보여줄 것이 분명하니까.

경성탐정록 - 10점
한동진 지음/학산문화사(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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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초록불 2009/01/11 18:18 #

    이글루에 무슨 문제가 있는 듯 싶군요. 몇 문장 고치고 싶어서 수정 버튼을 눌러보았지만 도무지 수정 화면이 뜨질 않는군요. 이글루 메인에도 가지지를 않고...
  • DJHAN 2009/01/11 18:42 #

    너무 좋은 평가에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

    30년대 경성으로 무대로 설정한 건 후기에도 써 놨듯이 본격 추리가 가능한 시간적, 공간적 장치를 만들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제대로 쓰려니, 고증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덕분에 30년대 경성 관련 서적은 거의 종류별로 사 봤습니다.

    아, 그리고 저는 판형엔 불만이 없었습니다. 지하철에서 들고 다니기 편한 작은 사이즈가 좋아서.... ^^;
  • 초록불 2009/01/11 19:29 #

    덕분에 국내 추리 시장이 활성화되면 신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제 추리물도 좀 팔아보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 스카이 2009/01/11 19:26 #

    오오오. 기대되네요 >ㅅ<
  • 채다인 2009/01/11 19:30 #

    추리소설 좋아하는데 이번달 카드빚을 값으면 사봐야겠군요(...)

    p.s 그건 그렇고 작가이신 DJHAN님 블로그의 동인버전(?)설홍주 좋군요...+_+
  • 잠본이 2009/01/11 19:33 #

    오오 장편도 나오는겁니까! 빨리 이것부터 질러야겠군요 >_<
  • kkkclan 2009/01/11 19:50 #

    아우 장편이 아니라 좀 아쉽네요.
  • 킴사장 2009/01/11 20:38 #

    탐정 이름 보니까 갑자기 아주 오래전 엠비씨에서 했던 어린이 추리극장..비스무레한 드라마가 생각나네요. 소년탐정 이름은 이지돌, 수사반장 이름이 오홍주였나. 오홍주는 홈즈에서 따온 이름이고..이지돌은... 이지돌 보트레였나. 뤼팽 나오는 소설 중 한곳에 나오는 소년탐정이었나.. 아아 기억이 가물가물.
  • 초록불 2009/01/11 21:17 #

    셜록 홈즈의 이름을 패러디한 이름으로는 설록호 탐정도 있었답니다...^^
  • 진성당거사 2009/01/11 23:15 #

    이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냥 여담삼아 말씀드리자면, 일제시대 (1921년)에 "주홍색 연구"를 천리구 김동성이 번안시켜 내놓은 '붉은 실'에서는 왓슨 박사를 '조군자', 홈즈를 '한정하'로 이름을 개명시켰던 사례가 있습니다. 동아일보 연재분을 찾아보시면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김동인이 번역해 1930년대에 '신동아' 지에 연재했던 홈즈 시리즈는 "쉘록크 홂쓰" 로 번역되어있구요. 그런데 언제부터 홈즈(또는 홈스)라는 표기가 정착되었는지 그저 궁금합니다. 계몽사판 세계명작전집에는 '호움즈'인데 말입니다.
  • 초록불 2009/01/11 23:31 #

    외래어 표기법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햄릿도 해믈리트가 표준어였다고 외래어를 축약(?)시키는 외래어 표기법이 나오면서 햄릿이 되었습니다.
  • 미도리™ 2009/01/12 08:29 #

    정말 재미있게 읽었지요!~ ^^
    설홍주 장편 시리즈를 벌써부터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 작나무 2009/01/12 19:05 #

    오옹~ 추천 감사합니다. ^^

    판형 문제 정말 공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국판이 가장 편하다고 생각하는데 출판사에서는 왜 동의하지 않는걸까요?
  • 炎帝 2009/01/15 11:25 #

    추리물을 읽으면 탐정에 관해 일종의 경외감 같은게 느껴지긴 하지만
    현실은 참 시궁창이었죠.orz 대부분 불륜조사나 사람찾기등이 주 업무고
    그나마도 벌이가 안되서 투잡하는 경우가 많다 하니.....
    어렸을때 그런 현실을 보고 참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홈즈 하니까 뤼팽에 관련된 얘기도 기억납니다.
    재미는 있긴 한데 홈즈를 너무 찌질하게 묘사해서 안티도 많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이름을 바꾸긴 했지만 홈즈라는 캐릭터 빌려서 만든것이라 그렇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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