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주관적인 생각으로 나눠본다. 따라서 밸리에는 보내지 않는다.
각 시기를 거치며 친일파들이 양적, 질적 증가를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1876년 개항 - 1905년 러일전쟁
- 이 사이에 갑신정변(1884), 동학운동(1894) 청일전쟁(1894-5), 삼국간섭(1895), 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6-1897), 대한제국(1897)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친일파는 일본에 빌붙는 존재로서 기능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진심으로 일본을 따르고 일본의 이념을 쫓는 친일파가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1905 러일전쟁 - 1919 3.1운동
- 이 사이에는 을사조약(1905) 헤이그 밀사 사건(1907) 이토 히로부미 사살(1909) 한일합방(1910)이 있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해서 조선 총독이 갈리고 문화통치가 선언되면서 조선 사회는 일종의 안정기에 들어간다. 이 기간 동안 친일파가 많이 늘어나지는 않았을 것 같다.
1919 3.1운동 - 1937 중일전쟁
- 문화통치기간인데, 이때 친일파로 가장 유명한 이가 육당 최남선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고 후일 황금 시기로 회상하는 일들도 발생하게 되는 것 같다. 이광수를 1938년부터 친일 행위를 했다고 분류하지만 그가 내놓은 민족개조론(1922)은 세련된 친일론이라 하겠다.
1937 중일전쟁 - 1945 해방
- 여기도 시기적으로 세분할 수 있겠지만, 이 단계에서 일제의 승승장구에 빠져 진심으로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친일파들이 대거 늘어났던 것 같다. 또한 강압적인 전시 체제가 되면서 징병 문제, 정신대 문제, 창씨 개명 문제 등등 친일파 떡밥이 대거 몰려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자발적 친일의 경우에도 훗날 강압적 분위기 하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도 나오고, 강압에 의해 학병 지원한 경우도 친일이라고 몰아세우게 되는 일들이 이 시기의 분위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각 시기를 거치며 친일파들이 양적, 질적 증가를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1876년 개항 - 1905년 러일전쟁
- 이 사이에 갑신정변(1884), 동학운동(1894) 청일전쟁(1894-5), 삼국간섭(1895), 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6-1897), 대한제국(1897)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친일파는 일본에 빌붙는 존재로서 기능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진심으로 일본을 따르고 일본의 이념을 쫓는 친일파가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1905 러일전쟁 - 1919 3.1운동
- 이 사이에는 을사조약(1905) 헤이그 밀사 사건(1907) 이토 히로부미 사살(1909) 한일합방(1910)이 있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해서 조선 총독이 갈리고 문화통치가 선언되면서 조선 사회는 일종의 안정기에 들어간다. 이 기간 동안 친일파가 많이 늘어나지는 않았을 것 같다.
1919 3.1운동 - 1937 중일전쟁
- 문화통치기간인데, 이때 친일파로 가장 유명한 이가 육당 최남선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고 후일 황금 시기로 회상하는 일들도 발생하게 되는 것 같다. 이광수를 1938년부터 친일 행위를 했다고 분류하지만 그가 내놓은 민족개조론(1922)은 세련된 친일론이라 하겠다.
1937 중일전쟁 - 1945 해방
- 여기도 시기적으로 세분할 수 있겠지만, 이 단계에서 일제의 승승장구에 빠져 진심으로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친일파들이 대거 늘어났던 것 같다. 또한 강압적인 전시 체제가 되면서 징병 문제, 정신대 문제, 창씨 개명 문제 등등 친일파 떡밥이 대거 몰려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자발적 친일의 경우에도 훗날 강압적 분위기 하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도 나오고, 강압에 의해 학병 지원한 경우도 친일이라고 몰아세우게 되는 일들이 이 시기의 분위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덧글
붙지 않았나 봅니다. 제가 알기론 이완용은 친러파였던 적도 있다고 아는데....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