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대군. 상상하기도 힘든 대군이죠. 현대 국가에서도 이만한 병력을 보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백만대군이라 하면 얼른 생각나는 게, 수양제가 고구려를 칠 때 동원한 병력이죠.
모두 1,133,800명이었는데 200만이라 일컬었으며,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가 되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23년(612년)
청천강(淸川江)【옛적에는 살수(薩水)라 불렀으니 곧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隋) 나라 백만대군을 격파한 곳이다.】- 고려사 지리지 북계 안북 대도호부 영주(寧州)
우의정 하연(河演)·좌찬성 황보인(皇甫仁)·우찬성 김종서(金宗瑞)·좌참찬(左參贊) 정분이 아뢰기를, “신들은 생각하옵건대, 평안도의 안주 읍성(安州邑城)은 본디 절제사 영(節制使營)으로서 실로 우리 나라 요충(要衝)의 땅이옵니다. 옛사람의 말에, ‘수(隋)나라 군사 백만 명이 물에 빠져서 고기밥이 되었다.’는 것은 곧 안주(安州)의 살수(薩水)를 이른 것이옵니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 29년 5월 1일
이 병력 동원은 사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할 이야기 중 유일하게 사실로 취급받는 이야기죠. 그래서 처음 떠오르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백만대군 따위는 무려 1세기에 요동 태수도 동원할 수 있었다는 거 아세요?
11년(서기 28년) 가을 7월에 한나라의 요동(遼東) 태수(太守)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대무신왕은 위나암성에서 농성을 하다가 사과문을 제출합니다. 이때 요동 태수가 거느린 병력이 언급됩니다.
“과인이 우매하여서 상국에 죄를 얻어, 장군으로 하여금 백만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에서 이슬을 맞게 하였습니다. 후의를 감당할 길 없어서 보잘 것 없는 물건을 부하들에게 제공하려고 합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1년
이런 걸 보면 최치원이 말한,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략하고, 북으로는 유연(幽燕)과 제로(齊魯)를 위협하여 중국의 큰 해독이 되었습니다. -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라는 말도 별 것 아닌 게 되고 맙니다. 백만대군 따위 요동 태수도 동원한 걸요.
고려 때도 백만대군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제8대 왕인 현종 때 - 그러고보니 막장사극 천추태후에도 나오겠군요 - 현종1년(1010년)과 현종 9년(1018년) 거란의 2차, 3차 침입이 있습니다. 3차 침입 때 강감찬의 활약으로 거란군을 격퇴하죠. 이 현종을 기리는 글이 고려사에 남아 있습니다.
제3의 현종실(顯宗室)에는 책(冊)하기를, “왕실 난리(王室亂離)의 즈음에 당하여 능히 그 공(功)을 정하고[勘定厥功] 방인(邦人)의 요박(?薄)한 풍속(風俗)을 개혁하여 같이 다스림에 돌아가게 하였다. 밖으로는 주목(州牧)의 구제(舊制)를 정하고 안으로는 사직(社稷)의 신도(新圖)를 세웠도다. 적국(敵國)의 백만 병(兵)을 소탕(掃蕩)하여 패연(沛然)히 막아낼 수 없게 하였으며, 변성(邊城)을 쌓은 것이 18읍(邑)으로 그 불우(不虞)를 방비(防備)하여 마침내 태평(太平)의 기(基)를 이루었으므로 중흥(中興)의 주(主)라고 이름하도다.” - 고려사 고종2년(1215년)
고종 때 묘실에 올린 글입니다. 백만대군을 물리쳤군요. 만세! 거란군의 1차 침입(993년) 때 소손녕과 서희의 대결은 유명합니다. 이때 소손녕은 자기들이 80만대군이라고 뻥을 치는데요. 안주섭 박사는 최대 6만명에 불과했다고 주장하죠. 임용한 교수도 이들이 10만도 되지 않았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2차 침입 때 거란군은 40만. 이에 맞선 고려도 40만의 대군을 준비해 둔 상태였죠. 어차피 전쟁사 이야기는 아니니 이 정도만 거론합니다. 3차 침입은 일반적으로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거론하지만 이 시기는 거란의 파상적 공세로 인해 1014년~1018년간 4차례의 전투가 벌어지고 평균 15만의 군대가 침입해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군세를 모두 합하면 백만을 넘어서기도 하죠. 그러나 아무튼 위에 나오는 백만병을 소탕 운운의 말은 허풍입니다. 나발을 부는 거죠.
고려를 침공했던 홍건적도 백만 대군이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왕은 총명하고 인무(仁武)하여 앉아서 홍적(紅賊) 백만의 무리를 죽여서 제실(帝室)을 편안하게 하기를 천하에 창도(唱道 선창(先唱))하였던 바 이제 대왕(大王)의 충의(忠義)가 천하에 들리므로 동서(東西)가 힘을 합하여 참란(?亂)을 삭평(削平)하여 제실(帝室)을 협보(挾輔)하고자한다.” - 고려사 열전17 김제안
홍건적이 처음 쳐들어왔을 때 병력이 4만이었다는 말도 있지만 이것도 뻥이라고 여기고 있고, 주력군이 쳐들어왔을 때도 10만에 불과했습니다. 10배를 튀기셨네요.
임진왜란 때 쳐들어온 일본군도 백만이라는 주장이 있죠.
풍신수길이 백만 대군을 동원하고 10주의 재력을 다 기울여 두 번이나 큰 전쟁을 일으켰지만 화살 한 개도 돌아가지 못했음은 물론 정권도 따라서 망했다. - 정약용 일본론
조선에 온 일본군은 15만 8천 7백명입니다. 자, 일본군이 백만이나 쳐들어왔으니 명에서 온 원군은 얼마나 되어야 했을까요? 이것도 백만입니다.
그중에 오직 대사마(大司馬) 석공(石公)만은 비분 강개하여 우리 나라의 일을 스스로 책임지고서 들끓던 옥신각신한 주장들을 물리치고 백만대군을 출동시켜 아무 보답도 할 수 없는 땅에 은덕을 베풀었으나 뜻이 이루어지자 자신은 형벌을 받아 사형을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주고 칭송한다 하더라도 구원병 백 명에 대한 보답도 되지 않을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 정조 23년 7월 29일
"백만"이란 말은 사실상 그저 "매우 많다"는 뜻일 뿐입니다. 이런 구절을 한 번 볼까요?
우(禑) 또한 광패(狂悖)하여 요동(遼東)을 치기를 꾀하였으니, 이는 삼한(三韓)의 백만(百萬) 생령(生靈)을 들어 썩어문드러지게 하려 한 것이었다. - 고려사 공양왕 2년(1390년)
만약 혹시 이것이 복구되면 이는 삼한(三韓) 백만(百萬)의 민중(民衆)을 들어 기름불 속에 넣는 것입니다. - 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조
태조(太祖) 열성(烈聖)이 부탁하신 바이며, 산천 귀신이 귀의(歸依)한 바이요, 백만(百萬) 생령(生靈)이 목숨을 맡긴 바이라 지극히 숭고(崇高)함은 만 길[칅]보다 더 되고 어려운 짐은 태산보다 더 무거우니 한마디 말을 하여도 하늘에서 뇌성이 울리듯 삼한(三韓)이 듣지 않음이 없고, - 고려사 열전31 조준
6년 동안에 대수(大水)와 대한(大旱)이 나니 백만(百萬) 생령(生靈)이 끓는 물 속에 있는 것 같되 신돈(辛旽)의 위세(威勢)를 두려워하여 감히 이것을 입에 내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손을 끼고 천지에 호소하기를, - 고려사 열전33 윤소종
만일에 적병(狄兵)이 행성(行城)을 넘어 들어오고, 내지(內地)에 견고한 성(城)이 없으면 우리나라의 백만(百萬)의 생명이 장차 어찌 되겠습니까. - 조선왕조실록 세종 32년 1월 15일 양성지의 상소문 중
삼한(=우리나라)의 인구가 백만밖에 되지 않는군요. 여말선초 상황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이죠.
그리고 서로 알리고 서로 기뻐하여 우리 백만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 정조 24년 2월 2일
조선말에도 인구가 백만... 이런 예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다 들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 "백만"이란 그냥 "매우 많다"는 뜻입니다. 부자를 가리키는 말인 "백만장자"와도 같은 것이죠. 저 백만이 진짜 수치라면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조선은 멸망했겠지요.
기근·여역으로 죽은 토착 농민까지 온 나라를 합하여 계산하면 그 수가 거의 백만에 이르고, 심지어 한 마을이 모두 죽은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비록 임진·계사년 전란의 참혹함이라도 거의 이보다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 12년 12월 5일
1670-71년의 대기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구가 백만인데 사망이 백만에 가까웠다니... 후덜덜...
모두 1,133,800명이었는데 200만이라 일컬었으며,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가 되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23년(612년)
청천강(淸川江)【옛적에는 살수(薩水)라 불렀으니 곧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隋) 나라 백만대군을 격파한 곳이다.】- 고려사 지리지 북계 안북 대도호부 영주(寧州)
우의정 하연(河演)·좌찬성 황보인(皇甫仁)·우찬성 김종서(金宗瑞)·좌참찬(左參贊) 정분이 아뢰기를, “신들은 생각하옵건대, 평안도의 안주 읍성(安州邑城)은 본디 절제사 영(節制使營)으로서 실로 우리 나라 요충(要衝)의 땅이옵니다. 옛사람의 말에, ‘수(隋)나라 군사 백만 명이 물에 빠져서 고기밥이 되었다.’는 것은 곧 안주(安州)의 살수(薩水)를 이른 것이옵니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 29년 5월 1일
이 병력 동원은 사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할 이야기 중 유일하게 사실로 취급받는 이야기죠. 그래서 처음 떠오르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백만대군 따위는 무려 1세기에 요동 태수도 동원할 수 있었다는 거 아세요?
11년(서기 28년) 가을 7월에 한나라의 요동(遼東) 태수(太守)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대무신왕은 위나암성에서 농성을 하다가 사과문을 제출합니다. 이때 요동 태수가 거느린 병력이 언급됩니다.
“과인이 우매하여서 상국에 죄를 얻어, 장군으로 하여금 백만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에서 이슬을 맞게 하였습니다. 후의를 감당할 길 없어서 보잘 것 없는 물건을 부하들에게 제공하려고 합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1년
이런 걸 보면 최치원이 말한,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략하고, 북으로는 유연(幽燕)과 제로(齊魯)를 위협하여 중국의 큰 해독이 되었습니다. -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라는 말도 별 것 아닌 게 되고 맙니다. 백만대군 따위 요동 태수도 동원한 걸요.
고려 때도 백만대군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제8대 왕인 현종 때 - 그러고보니 막장사극 천추태후에도 나오겠군요 - 현종1년(1010년)과 현종 9년(1018년) 거란의 2차, 3차 침입이 있습니다. 3차 침입 때 강감찬의 활약으로 거란군을 격퇴하죠. 이 현종을 기리는 글이 고려사에 남아 있습니다.
제3의 현종실(顯宗室)에는 책(冊)하기를, “왕실 난리(王室亂離)의 즈음에 당하여 능히 그 공(功)을 정하고[勘定厥功] 방인(邦人)의 요박(?薄)한 풍속(風俗)을 개혁하여 같이 다스림에 돌아가게 하였다. 밖으로는 주목(州牧)의 구제(舊制)를 정하고 안으로는 사직(社稷)의 신도(新圖)를 세웠도다. 적국(敵國)의 백만 병(兵)을 소탕(掃蕩)하여 패연(沛然)히 막아낼 수 없게 하였으며, 변성(邊城)을 쌓은 것이 18읍(邑)으로 그 불우(不虞)를 방비(防備)하여 마침내 태평(太平)의 기(基)를 이루었으므로 중흥(中興)의 주(主)라고 이름하도다.” - 고려사 고종2년(1215년)
고종 때 묘실에 올린 글입니다. 백만대군을 물리쳤군요. 만세! 거란군의 1차 침입(993년) 때 소손녕과 서희의 대결은 유명합니다. 이때 소손녕은 자기들이 80만대군이라고 뻥을 치는데요. 안주섭 박사는 최대 6만명에 불과했다고 주장하죠. 임용한 교수도 이들이 10만도 되지 않았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2차 침입 때 거란군은 40만. 이에 맞선 고려도 40만의 대군을 준비해 둔 상태였죠. 어차피 전쟁사 이야기는 아니니 이 정도만 거론합니다. 3차 침입은 일반적으로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거론하지만 이 시기는 거란의 파상적 공세로 인해 1014년~1018년간 4차례의 전투가 벌어지고 평균 15만의 군대가 침입해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군세를 모두 합하면 백만을 넘어서기도 하죠. 그러나 아무튼 위에 나오는 백만병을 소탕 운운의 말은 허풍입니다. 나발을 부는 거죠.
고려를 침공했던 홍건적도 백만 대군이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왕은 총명하고 인무(仁武)하여 앉아서 홍적(紅賊) 백만의 무리를 죽여서 제실(帝室)을 편안하게 하기를 천하에 창도(唱道 선창(先唱))하였던 바 이제 대왕(大王)의 충의(忠義)가 천하에 들리므로 동서(東西)가 힘을 합하여 참란(?亂)을 삭평(削平)하여 제실(帝室)을 협보(挾輔)하고자한다.” - 고려사 열전17 김제안
홍건적이 처음 쳐들어왔을 때 병력이 4만이었다는 말도 있지만 이것도 뻥이라고 여기고 있고, 주력군이 쳐들어왔을 때도 10만에 불과했습니다. 10배를 튀기셨네요.
임진왜란 때 쳐들어온 일본군도 백만이라는 주장이 있죠.
풍신수길이 백만 대군을 동원하고 10주의 재력을 다 기울여 두 번이나 큰 전쟁을 일으켰지만 화살 한 개도 돌아가지 못했음은 물론 정권도 따라서 망했다. - 정약용 일본론
조선에 온 일본군은 15만 8천 7백명입니다. 자, 일본군이 백만이나 쳐들어왔으니 명에서 온 원군은 얼마나 되어야 했을까요? 이것도 백만입니다.
그중에 오직 대사마(大司馬) 석공(石公)만은 비분 강개하여 우리 나라의 일을 스스로 책임지고서 들끓던 옥신각신한 주장들을 물리치고 백만대군을 출동시켜 아무 보답도 할 수 없는 땅에 은덕을 베풀었으나 뜻이 이루어지자 자신은 형벌을 받아 사형을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주고 칭송한다 하더라도 구원병 백 명에 대한 보답도 되지 않을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 정조 23년 7월 29일
"백만"이란 말은 사실상 그저 "매우 많다"는 뜻일 뿐입니다. 이런 구절을 한 번 볼까요?
우(禑) 또한 광패(狂悖)하여 요동(遼東)을 치기를 꾀하였으니, 이는 삼한(三韓)의 백만(百萬) 생령(生靈)을 들어 썩어문드러지게 하려 한 것이었다. - 고려사 공양왕 2년(1390년)
만약 혹시 이것이 복구되면 이는 삼한(三韓) 백만(百萬)의 민중(民衆)을 들어 기름불 속에 넣는 것입니다. - 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조
태조(太祖) 열성(烈聖)이 부탁하신 바이며, 산천 귀신이 귀의(歸依)한 바이요, 백만(百萬) 생령(生靈)이 목숨을 맡긴 바이라 지극히 숭고(崇高)함은 만 길[칅]보다 더 되고 어려운 짐은 태산보다 더 무거우니 한마디 말을 하여도 하늘에서 뇌성이 울리듯 삼한(三韓)이 듣지 않음이 없고, - 고려사 열전31 조준
6년 동안에 대수(大水)와 대한(大旱)이 나니 백만(百萬) 생령(生靈)이 끓는 물 속에 있는 것 같되 신돈(辛旽)의 위세(威勢)를 두려워하여 감히 이것을 입에 내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손을 끼고 천지에 호소하기를, - 고려사 열전33 윤소종
만일에 적병(狄兵)이 행성(行城)을 넘어 들어오고, 내지(內地)에 견고한 성(城)이 없으면 우리나라의 백만(百萬)의 생명이 장차 어찌 되겠습니까. - 조선왕조실록 세종 32년 1월 15일 양성지의 상소문 중
삼한(=우리나라)의 인구가 백만밖에 되지 않는군요. 여말선초 상황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이죠.
그리고 서로 알리고 서로 기뻐하여 우리 백만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 정조 24년 2월 2일
조선말에도 인구가 백만... 이런 예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다 들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 "백만"이란 그냥 "매우 많다"는 뜻입니다. 부자를 가리키는 말인 "백만장자"와도 같은 것이죠. 저 백만이 진짜 수치라면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조선은 멸망했겠지요.
기근·여역으로 죽은 토착 농민까지 온 나라를 합하여 계산하면 그 수가 거의 백만에 이르고, 심지어 한 마을이 모두 죽은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비록 임진·계사년 전란의 참혹함이라도 거의 이보다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 12년 12월 5일
1670-71년의 대기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구가 백만인데 사망이 백만에 가까웠다니... 후덜덜...
덧글
그나저나 저 113만 대군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기타 보조병을 뺀 숫자라던데 이렇게 실제 동원된 병력보다 적게 기록을 한 경우가 또 있나 싶네요.
2. 아무 생각없이 백만이라니 백만명인가보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
어느 쪽이 더 나쁠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백만은 쉬운 숫자가 아니지 않나요. 뭐 상식같은게 있다면 저런말도 못했겠지만요.
그런데 거란 2차 침입 때 두 나라의 각 40만 병력은 당시 인구를 생각해 볼 때 정말 대단하군요. 어쨌든 옛날 기록에 쓰여 있다고 곧이 곧대로 믿었다간 "오해입니다" 되는 건가요 -_-;
설명: 5권짜리 만화삼국지에서, 조조에 맞설 연합을 구성하러 간 제갈량이 "조조의 군대는 백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780만으로," 라고 이야기합니다. 7~80만을 타자치다 빼먹었겠죠^_^
그 후 그 책을 봤던 저희 일행들은 뭔가 이야기만 나왔다 하면 조조군 780만을 외치곤 했습니다;;;
그나저나 과연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군은 총 몇 명이었을지에 대한 고찰 써 주실 분은 없을지.... -_-;;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전차'가 전장의 핵심이었는데, 전차 하나에
딸린 병사가 대략 100명이라고 하더군요. 따라서 '만승의 나라'인 천자국에서는 전차 1만대를
동원할 수 있으므로, 병사가 100만... 따라서 전차가 전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백만명의 병력'
이 대국을 상징하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100만이 많다는 뜻이 되었다는 거죠.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구만리장천'같은 경우도 있고, 충주의 '열두대' 같은 경우도 있죠.
그 당시 조선의 모습은 시체 시체 시체 시체 시체 시체 어딜가도 어딜 둘러봐도 시체 시체;;;;;
조선시대에 기근으로 백만 죽었으면 거의 나라 전체가 공동묘지였을듯
이 문제는 저로서는 그런 곳에 속했습니다. 다만 최근에 구한 책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에 새로운 해석이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해당 책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고구려는 천하중심자관 1천만군 백제는 380만대군'
우와.. 고구려가 천만명, 백제가 380만명이라니... 게다가 보급군 포함하면 임란도 100만명이라고 주장하는 정신상태가 나간 놈인데, 어찌해야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