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에 대하여 *크리에이티브*



1.
주류문학의 소설가들이 단편집 하나 낼 때, 작가와 편집부는 정말 뼈와 살을 깎으며 고민을 거듭한다.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고... 초고나 잡지에 실린 글을 그냥 척척 단편집에 싣는 작가는 - 몰라, 황모 작가나 이모 작가쯤 되면 그러려나? -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럼 장르소설 작가는 그냥 내나? 진산님의 <진산무협단편집>의 <청산녹수>의 첫 대목을 한 번 볼까?

- (A) 첫 발표 시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어지럽게 뒤편으로 사라져가는 눈 덮인 땅바닥이었다. 이어서 들려온 것은 멀찌감치에서 들려오는 어른들의 고함 소리, 창칼 부딪치는 소리...
코에 물씬 풍겨오는 몸 냄새로 미루어 자신을 업은 것이 충직한 노복 한사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신라 말에 서툰 한사충은 어린 시절부터 희아를 잘 업어주었지만, 이렇게 끈으로 몸에 동여메어 잠든 그녀의 머리가 땅을 향해 처진 것도 모를 정도로 아무렇게나 업고 다니지는 않았었다.
본능적으로 위기라는 것을 느낀 희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달리는 사충의 등에 몸을 붙이면서 한족의 말로 물었다.


- (B) 단편집 수록 시
희希가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본 것은 어지럽게 멀어져 가는 눈 덮인 땅바닥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등에 끈으로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다. 물씬 풍기는 땀냄새로, 자신을 업은 사람이 충실한 노복 한사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신라 말에 서투른 한사충은 어린 시절부터 희를 잘 업어주었지만, 이렇게 그녀의 머리가 아래로 처진 것도 모를 정도로 거칠게 업은 적은 없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어른들의 고함소리, 창칼 부딪치는 소리, 본능적으로 위기라는 것을 느낀 희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달리는 사충의 등에 몸을 붙이면서 한족의 말로 물었다.


(A)의 경우 시각-청각-후각의 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반면 (B)의 경우는 시각-촉각-후각-청각의 순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눈을 떠서 상황을 전달하면서 가까운 곳에서 먼곳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묘사의 시점이 이동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네 문단으로 나뉘어져 있던 난삽함이 한 문단으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그런 결과 (A)는 읽는이를 어지럽고 번거롭게 만드는 면이 없지 않은 반면 (B)는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상황을 머리속에서 그려볼 수 있다. (A)의 경우 등장인물이 시점을 제공하고 있는 "희"보다 "한사충"이 먼저 등장하는 반면 (B)에서는 시점의 제공자인 "희"가 먼저 등장하여 안정감을 높여주었다.

단순히 비문을 잡거나, 맞춤법을 고치는 것이 퇴고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위의 예가 잘 보여주지 않을까?

2.
신문연재소설이 단행본으로 나왔을 때, 연재본과 단행본을 비교해 보아도 엄청나게 달라진 부분들을 찾을 수 있다.

퇴고는 작가의 숙명이다.

3,
<꿈을 걷다>에 원고를 보내면서 내심 자신만만했다. 판타스틱에 발표하기 전에도 그 작품은 글 잘보는 편집자와 수차례 상의를 해가며 몇 번이나 뜯어고쳤고, 발표 이후에 노블레스에 넘기기 전에도 역시 열댓 번을 다시 읽고 다듬었다. 내용에서 수정할 것이 없음은 물론이고 문장에서 손 댈 부분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늘 말하지만 작가에게 자신감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야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간 수정자가 열두 군데쯤 지적되어 돌아왔다. 그 중 절반 쯤은 안 고칠 수가 없는 정확한 지적이었다. 나머지 부분은 지적한 이유는 납득할 수 있지만, 나로서는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부분이어서 이유를 설명하고 수정하지 않았다.

지적은 문장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내용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해석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작가는 한 작품에 대해 오래 생각하기 마련이고, 세상에 공개되는 부분은 작가가 가지고 있는 생각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문제는 밖에서 볼 때 그 빙산이, 빙산의 일각이 아니라 사상누각으로 보일 때도 있다는 점이다. 분명히 지탱하고 있는 기둥이 있는데, 독자가 그것을 찾지 못할 수 있다. 그렇게 되는 것은 독자가 수준이 낮은 까닭일 수도 있고, 작가가 그 부분을 기술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부분을 찾아주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직업을 "편집자"라고 부른다.

나는 아무튼 여러 편집자를 만나본 편인데 - 장르가 다양한 글쓰기를 한 덕분에 - 좋은 편집자도 만나 보았고, 수준 미달의 편집자도 만나보았다. (이 수준 미달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좋은 편집자는 작가의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켜준다. 고질적인 병폐를 찾아주고, 습관적인 오류를 잡아주며, 작품의 방향에 대해서 흔들림 없는 나침반 역할을 해준다.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고 강조해야 할 부분을 도드라지게 도와주는 일도 편집자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고나면 그 작품에 대한 영광은 오로지 작가에게 남는다. 나는 그래서 스티븐 킹이 "편집은 신의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편집자는 이름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물론 판권에 이름이 들어간다. 그런데 어느 독자가 그것을 기억할까?)

4.
창작은 오로지 개인의 고독한 투쟁이라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첫 책을 낼 때 같이 작업한 편집자들이 이런 내 치기어린 생각을 완전히 바꿔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내 작품에 대한 적절한 비평, 같이 방향에 대해 논의해 나간 지적이면서도 온화한, 그러면서도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날카로움은 편집자의 모범을 그대로 보여주었던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편집자와 같이 하는 수정 작업은 퇴고의 백미라 하겠다.

5.
책을 읽어주는 독자와 글을 알아주는 친구와 글을 보아주는 편집자가 있는 삶이란, 근사한 것이다. (가족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덧글

  • C문자 2009/03/06 10:57 #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큰 참고가 되었네요.
  • 초록불 2009/03/06 15:30 #

    이제 시작이고, 좋은 이야기해주실 분들은 많겠지..^^
  • 2009/03/06 11:09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9/03/06 11:11 #

    아, 그랬네요. 퇴고하다가... 틀렸습니다...^^
  • 뱀  2009/03/06 11:12 #

    감사히 읽었습니다. 체크포스트 해갈게요. ㅎㅎ
  • 초록불 2009/03/06 15:31 #

    체크 씩이나...^^
  • Allenait 2009/03/06 11:19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퇴고는 작가의 숙명이다. - 공감합니다.
  • 초록불 2009/03/06 15:31 #

    고맙습니다.
  • 漁夫 2009/03/06 11:20 #

    제가 이글루스 포스트 하나 올릴 때도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데 열심히 일하는 소설가/편집자라면 '다듬기'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야 당연하죠.
  • 초록불 2009/03/06 15:31 #

    네...^^
  • 미도리™ 2009/03/06 11:38 #

    원석을 다듬고 다듬어야 가치있는 보석이 되듯이...
    작품도 퇴고를 통해 가치잇는 작품으로 거듭나게 되나 봅니다.

    퇴고는 작가의 숙명이다
  • 초록불 2009/03/06 15:31 #

    숙명입니다...^^
  • 다크엘 2009/03/06 11:40 #

    공부가 되는 글이군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 초록불 2009/03/06 15:35 #

    고맙습니다.
  • ZAKURER™ 2009/03/06 11:45 #

    가슴에 쿡쿡 찔리는 글입니다. T.T
  • 초록불 2009/03/06 15:36 #

    죄, 죄송합니다...^^
  • 銀鳥-_- 2009/03/06 11:51 #

    그 시각을 제공해주는 사람이 적거나 없을때 참 슬픕니다(...)
  • 초록불 2009/03/06 15:36 #

    적은 건 괜찮지만... 없는 건 슬프군요.
  • 농어 2009/03/06 11:54 #

    아아. 정말 참고가 되는 글이네요 ㅠ_ㅠ 체크해가겠습니다.
    마지막 5번은... 참 와닿네요 ㅠ_ㅠ
  • 초록불 2009/03/06 15:36 #

    그렇죠...ㅠ.ㅠ
  • 카라준 2009/03/06 12:40 #

    아아..초록불님 말씀에 동의해요.
    좋은 편집진을 만나는 것은 정말이지 인생의 행운!
    덧붙여서 일년에 12권을 쓰는 작가를 만나는 것이 바로 편집진의 행운이 아닐까요. '-'?
  • 초록불 2009/03/06 13:58 #

    지난 4개월 동안 책 세 권과 단편 하나를 썼습니다. 이번 달, 다음 달에 각각 한 권씩 써야 합니다. 그러면 6개월에 다섯 권인데... 음.. 1년에 열두 권은 어렵겠습니다... 하하...
  • 카라준 2009/03/06 14:01 #

    그래서 노력이 필요한 거지요. 달리세요. 초록불님.
  • 초록불 2009/03/06 14:02 #

    저 말에는 농담이 99%인데...(저 책의 정체를 보면...-_-;;)

    진지하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ㅠ.ㅠ
  • 서산돼지 2009/03/06 13:07 #

    몇년전에 신문기사에서 한 학자를 평하면서 문학사를 연구하는데 작가중심이 아니라 독자중심으로 연구하는 길을 연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편집자를 중심으로 본 문학사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번쩍 드는군요. 요즘 논문 뭘 써야하나 1년 넘게 고민하다보니 모든 것이 논문제목으로 보입니다
  • 초록불 2009/03/06 13:57 #

    그럴듯합니다. 한번 나서 보심은?
  • 회색인간 2009/03/06 13:25 #

    퇴고는 작가의 숙명이란 말에 눈물을 흘리며 공감합니다.
  • 초록불 2009/03/06 15:36 #

    ㅠ.ㅠ
  • 2009/03/06 13:3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9/03/06 13:54 #

    비밀글님 블로그에 답변 드렸습니다.
  • 허안 2009/03/06 15:04 #

    새삼 깨달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또한 한편으로 허접하나마 출간계약을 한 사람으로서 부담감이 팍 느껴지는군요.
  • 초록불 2009/03/06 15:36 #

    좋은 책 쓰시기 바랍니다.
  • 징소리 2009/03/06 16:32 #

    후... 그래서 사실 요즘 출간되는 장르소설에 별 기대를 안하게 됩니다.
  • 2009/03/06 16:34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9/03/06 19:59 #

    그 작가가 편집자였지요...^^
  • Corund 2009/03/06 16:41 #

    편집자를 기억하는 독자들도 있습니다.
    좋은 원서를 고르는 방법 중의 하나로 편집자를 기억해두라고 가르쳐주셨던 교수님이 계셨죠. 저는 그 정도 수준은 안되지만(외국인들 이름은 외우기 힘들어서) 편집자를 기억하고 책을 고르는데 참고하는 독자도 있답니다.
  • 초록불 2009/03/06 20:00 #

    물론이지요. 사실 저도 그런 것을 기억하는 독자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 고독한별 2009/03/06 18:00 #

    그런데 퇴고의 함정(?)도 있더군요. 괜찮게 고쳐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음날 다시 보면 또 고칠 곳이 튀어나오는 식으로, 고쳐도 고쳐도 끝
    이 없는 경우... 초록불 님께서는 이제 됐다 싶은 부분에서 잘 끊으시나
    궁금합니다. ^^;
  • 초록불 2009/03/06 20:01 #

    글쎄요...^^ 안 보일 때까지 고쳐야지요.
  • 콘푸레이크 2009/03/06 18:13 #

    쓰는것보다 퇴고하는게 더 오래걸리더군요.
    퇴고도 쓰는걸로 포함해야되겠지만;;;
  • 초록불 2009/03/06 20:01 #

    그럴 수도 있죠...^^
  • 2009/03/06 23:2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9/03/06 23:34 #

    고맙습니다...ㅠ.ㅠ
  • 한빈翰彬 2009/03/07 01:57 #

    퇴고... 어렵죠. 자신의 글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 초록불 2009/03/07 01:58 #

    퇴고는 가능하지만, 자기 글을 객관적으로 보는 건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 2009/03/07 03:1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9/03/07 11:18 #

    글 쓰다보면 작가는 늘 게으르다는 진리도 깨우치게 되더라는... (먼산)
  • 웰링턴 2009/03/07 03:15 #

    진산무협단편을 읽은 사람이라..아는 사람만 안다는 그 책을 읽으셨다니!

    정말 경지에 오른 작가는 무엇을 쓸지를 고민하지않고 무엇을 뺄지 고민한다고 했죠.
    퇴고를 잘 한다는 것은 글쓰기 경지가 어느정도 도가 텄다고 봅니다.
    'ㅅ')으으..저는 아직 한참 멀었죠.

  • 초록불 2009/03/07 11:19 #

    에에... 그래도 제법 팔린 책입니다...^^
  • 라세엄마 2009/03/12 08:00 #

    귀여니 책이 더 많이 팔렸음 풋.














    세상은 썩었음
  • 초록불 2009/03/12 09:32 #

    그렇다고 생각하실 것까지야...^^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유사역사아웃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구글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