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변신 *..문........화..*



1.
황정은 - 오뚝이와 지빠귀 2008
황정은의 단편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에 실려있는 단편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아내가 어느날부터 줄어들기 시작한다. 아내의 몸을 살펴보자 이상한 부분이 있지만 아내는 아프지 않다고 한다. 아내는 결국 직장에서 마비되고, 남편은 그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호를 그리며 기울어지는 행동을 해가며 점점 동그란 오뚝이로 변해버린다. 그녀는 부리가 있는 지빠귀가 되고 싶어했지만, 현실은 오뚝이로 그치고 만다. 친척들이 걱정하며 다녀가면서 애를 낳으면 괜찮다고, 누군가는 마뜨료시까(러시아 인형 - 인형 안에 또 작은 인형이 계속 들어 있다)가 되었다가 애를 낳고 괜찮아졌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한다. 아내가 완전히 오뚝이가 되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남편은 자신도 오뚝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
한강 - 내 여자의 열매 1997
한강의 단편집 <내 여자의 열매>에 실려 있는 단편이다.

역시 줄거리는 단순하다. 아내의 몸에 녹색 멍이 들어있다. 아프지는 않다고 말한다. 병원에 가보아도 의사는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멍은 점점 늘어가고 아내는 햇빛 쬐는 것을 점점 좋아하게 된다. 그리고 남편이 일주일간 해외 출장을 다녀왔을 때, 그녀는 베란다에서 나무로 변해가고 있었다. 남편은 물을 달라 말하는 그녀에게 물을 주고, 화분에 심어주고, 흙을 갈아준다. 아내는 점점 나무가 되어가고 결국 완전히 나무로 변해버린다. 그리고 모든 잎마저 떨어뜨리고 마치 죽어버린 것처럼 된 그녀는 입이었던 자리에서 열매를 쏟아낸다. 남편은 그 열매를 맛보고, 화분에 심는다. 봄이 오면 그녀가 살아날까 생각한다.

3.
위의 두 작품은 상당히 흡사해 보인다. 그런데 정작 내게 생각났던 작품은 저 둘의 유사성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었다.

쓰쓰이 야스다카(筒井康隆) - 멈추어 선 사람들
세계SF걸작선(고려원미디어, 1992)에서 보았다. 원작의 발표시기는 모름.

이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식량부족이 일상화된 미래의 세계. 불평분자들을 가로수로 심어버리고 있다. 월급이 작다고 말한 우체국 직원, 정부를 비난한 비평가, 그에 항의한 대학생 등등이 모두 거리에 심어진다. 일단 심어지면 발밑으로 뿌리가 나고 인간적인 감정은 점차 사라진다. 완전히 나무가 되기 전에는 말도 할 수 있고 생각도 한다. 하지만 점점 인간적인 감정은 사라진다. 남편이 작가였던 여인도 동네모임에서 정부를 비판했다가 밀고를 당해 동네 철물점 앞에 심어졌다. 남편은 몰래 그곳을 찾아간다. 불법이므로 걸리면 그도 나무가 된다. 작가는 그것을 두려워하는 자기 자신도 결국 나무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4,
저 SF소설을 나는 대단히 싫어했는데, 그것은 도무지 그 글 안에 불의에 항의하는 인간의 모습 같은 것을 찾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음울하고 암울하기만 한 소설이었다. 그런데, 사실 저 소설은 미래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본래 <일본 공포SF 걸작선>에 실려 있는 일종의 호러 소설이기도 하다. 그것을 인지하자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졌었다.

5.
변신 소설의 역사는 제법 길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로에게 쫓기던 다프네는 월계수가 된다. 한강의 소설이 여기서 모티프를 얻었으리라 추측하는 글도 본 기억이 있는데, 다프네 신화는 공포라는 대상이 명확하지만 한강의 소설에서는 그 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매우 큰 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남자가 벌레로 변신하는 카프카의 변신도 있다. 남자가 변신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변신은 결국 현실로부터의 일탈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한강의 소설은 여자가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 애매한 상태로 이야기를 끝냈지만 결국 겨울이 오면 일시적으로나마 죽어버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한강도 죽음으로 결말을 맺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죽음이 단순히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열매"는, 특히 그것이 제목에 들어가서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데, 한강은 그 열매의 맛을 다음처럼 쓰고 있다.

나는 그 중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머금어보았다. 매끈한 껍질에서는 아무런 맛도 냄새도 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힘주어 깨물었다. 내가 지상에서 가졌던 단 한 여자의 열매를. 그것의 첫 맛은 쏘는 듯 시었으며, 혀뿌리에 남은 즙의 뒷맛은 다소 씁쓸했다.

식물은 열매로서 자신의 유전자를 남긴다. 열매와 모체는 동일하다. 하지만 남편은 그 열매에서 싹이 돋을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다만 아내가, 아내가 변해버린 그 식물이 다시 살아나기를 바랄 뿐이다. 열매가 떨어지면서 남편은 더 이상 그 식물에게서 아내가 주던 느낌을 받지 못하게 된다. 끝장이 난 것이다. 따라서 아내는 죽었다. 봄이 와서 붉은 꽃이 핀다 해도 거기서 아내를 다시 느낄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오히려 그 열매로부터 아내를 느낄 새로운 싹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6.
이야기가 조금 넘어갔는데, 황정은의 단편에서도 아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오뚝거리며 검고 번들번들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할 때, 이미 죽은 것이다. 의사 소통의 단절이 온 것이다. 이 점은 카프카의 변신에서도 마찬가지. 소통의 단절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카프카는 벌레의 죽음으로부터 오히려 공포에서 해방된 가족들이 새로운 삶에 대한 비열한 희망을 그렸는데, 한강은 과거로 돌아가고픈 남자의 욕망을 그렸으며, 황정은은 아내를 쫓아 갈 수 밖에 없음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남편을 그려놓았다.

황정은의 그런 자세는 쓰쓰이의 단편과 닮은 부분이 있다. 이 점은 황정은의 다른 단편을 보아도 명백한데, 그녀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일말의 신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회는 개인을 억압하고 짓눌러 터뜨리려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아니, 적대감이라기보다는 무관심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겠다. 아예 감정이 없는 것이니까.

사회는 그저 유연하게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안의 개인들이 질식하거나 말거나. 쓰쓰이는 그것을 SF적 상상력으로 밀어올려 그 사회에 대한 공포감을 바로 묘사해냈다. 하지만 한강과 황정은은 개인을 변신시키고 마는 주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읽는 니들이 알아내려무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카프카도 동일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

7.
그 차이는 주류소설과 장르소설 사이에 펼쳐진 간극일 수도 있겠다. 한강이나 황정은의 소설을 두고 그 상상력의 표현이 쓰쓰이와 유사했다고 해서(정확히는 쓰쓰이와 한강이 유사하고, 한강과 황정은이 유사하다) 그 둘의 소설을 SF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한강의 소설과 황정은의 소설은 남편의 선택이 완전히 달라서 결말에서 크게 다른 이야기를 하는 셈이 되었다. 한강은 아내가 부활하기를 바라지만, 황정은은 남편이 아내와 같은 길을 택하게 했다. 한강이 여자에게 가해지는 질곡을 크게 보았다면, 황정은은 그것이 아내건 남편이건 별 상관이 없었던 것 같다. 어차피 그들은 남이 밀면 얼른 제자리를 찾아야 하는 오뚝이에 불과한 것이다. 그저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딸강" 소리밖에는 필요치도 않은.

그런 면에서는 황정은의 소설이 오히려 쓰쓰이의 소설과 닮아있다. 이들은 저항하지도 않는다. 저항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리고 이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한강은 오히려 한술 더떠서 저항할 여지 자체를 없애버렸다. 출장에서 돌아오자 이미 끝장이 나 버린 것이다.

한강은 말한다.

나는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어요. ... 무엇이 나를 그토록 괴롭혀서,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겠다고 나는 지구 반대편까지 가려고 했을까요. 왜 가지 못했을까요, 병신처럼. 왜 훌훌 떠나 이 지긋지긋한 피를 갈지 못했을까요.

이것은 어쩌면 주류소설들이 갖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현실은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다.

들고 일어나 깨부수어라, 그런데 뭘?

때문에 일상에서 시들어가는 사람들은 이런 문학에서 위로를 얻는다. 나만 못 떠난 것은 아니다. 이 슬프고 가련한 여인을 보라. 그 필력에 눈물 지으며 카타르시스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 장르소설은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들고 일어나 깨어 부수는 모습을 보여준다. 뭘 부수느냐고? 소설의 논리 속에 보이는 갈등의 주체를. 여기에서도 우리는 마음의 위로를 얻는다.

8.
몇가지 자잘한 이야기가 남는데, 그 부분은 뒷날 다시 거론할 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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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DOSKHARAAS 2009/03/07 16:17 #

    츠츠이 야스타카의 단편은 '나무'라는 이름으로 <위크엔드 셔플>이라는 단편집에도 실려있더군요. 무기력한 일본의 지식인을 다룬 것이라기 보다는 그냥 낭만적인 장면 때문에 쓴 글 인 것 같습니다.

    츠츠이 야스타카의 단편들을 북오프에서 자주 사다가 읽는데 꽤 재미있더군요. 여성혐오에 삐뚤어진 천재(아이큐가 공식적으로 170, 비공식 기록으로 190이라더군요. 전 심리학과인데, 의심스러울 만큼 높은 수치입니다.)가 보는 사회는 비틀릴 대로 비틀려 있더군요.
  • 초록불 2009/03/07 16:22 #

    요즘 맞춤법으로은 "츠츠이"인 모양이군요. 제가 가진 책에는 "쓰쓰이"로 나오는데...^^
  • DOSKHARAAS 2009/03/07 16:32 #

    원래 발음은 쓰쓰이에 더 가깝습니다. ^^
  • 포더윙 2009/03/07 17:23 #

    현행 표기법상으로는 쓰쓰이입니다 ^^;
  • 이준님 2009/03/07 16:23 #

    1. 스티븐 킹의 영화 단편 " The Thinner" 역시 변신 아내를 소재로 하고 있지요. 이 경우는 여자가 남자를 변신시키려다가 거꾸로 자기가 당해버립니다만 - 어떻게 변신하는지는 제목이 말해줍니다.

    2. 모 미국 엽기 공포 단편중에 "어머니"가 변하는 것도 있지요. 여기서는 "애인"의 존재가 나오지만 사실상 어머니가 "애인"의 역할(근친혼이 아니라 서로 의지한다는 점에서) 을 했었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어머니는 결국 몸구멍에서 피를 점차 흘리게 되고 애인과 찾아간 집에서 핏덩어리 속에서 간호원이 "이제 막 태어난" 어머니를 꺼내는게 결말이지요
  • DOSKHARAAS 2009/03/07 16:32 #

    The Thinner가 단편으로도 있군요. 저는 장편 씨너는 읽었습니다. 집시가 나오고 시시각각 말라가는 주인공이 나오는 이야기였지요.
  • 포더윙 2009/03/07 17:27 #

    변신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람을 심는 모티브를 접하면 채소 마누라가 생각나네요.
  • 진성당거사 2009/03/07 20:57 #

    한강 소설은 그 후의 연작 - 몽고반점 외 몇편 - 과 많이 흡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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