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동생 팔아 출세하기 - 두번째 *..역........사..*



점심 먹고 왔습니다. 계속 하죠. 댓글로 모든 이야기가 뽀록날 지경이니 빨리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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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처녀 선발에 까다로웠던 황엄이었으나 한씨와 황씨를 보고는 흡족해 했으니 이들이 미색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이렇게 처녀를 뽑아올릴 때는 진헌색進獻色이라는 관청을 만들어 이 일을 해야 했다. 따로 조사한 바는 없지만 후일 연산군이 전국에서 미녀를 색출해 후궁으로 삼을 때도 이런 조직의 전례를 이용했을 것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후일 세종 때(세종 6년 1424년) 영락제는 미녀 2인과 함께 "음식 만들고 술 잘 빚는" 시녀 5~6인도 뽑으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조선 음식이 입에 맞았다는 뜻인데,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다섯명 미쓰 조선 중 진이었던 권씨權氏의 음식이 마음에 들었던 탓이었다. 이 때 7명의 여인과 집찬비執饌婢(=요리사) 10명도 함께 뽑혔다. 특히 이때 보낸 7명의 여인은 11~12세의 아이들도 셋이나 있었는데, 빌어먹을 영락제가 그 나이를 요구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너무 어린 애들을 보내는 것은 가혹한 일이라고 반대 여론도 있었으나 세종은 황제의 명이니 어쩔 수 없다고 어금니를 씹으며 승낙하고 만다. 그러나 이 여자들의 음식을 영락제가 먹을 수는 없었다. 1424년에 영락제가 죽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조금 있다 다시 하자.

그럼 영락제에게 조선 음식을 먹여준 이 권씨는 어찌 되었나?

죽었다.

1410년, 즉 끌려간 지 2년만에 죽은 것인데(겨우 나이 스물이었다), 그냥 죽은 게 아니라 독살을 당한 것이었다. 영락제의 황후가 죽은 후 황후 대행이 된 현인비 권씨. 독살을 한 범인은 일찍이 태종이 미인이 아니라고, 입술이 두껍고 이마가 좁다 혹평한 여씨呂氏였다. 명에서는 미인美人의 직위에 있었다. 즉 "여미인"이 범인이었다.

1413년 권비의 노비와 여미인의 노비가 말다툼을 하다가 이 사실이 발각되었다. 그때 조사된 바에 따르면 정황은 이러했다.

여미인은 권비를 만났을 때,

"아들이 있는 황후가 죽었으니 네가 황후 노릇을 한다 해도 얼마나 하겠느냐?"

라고 저주어린 말을 했다. 그리고 조선에서 와 내시 노릇을 하는 심복들에게 비상을 구해오게 해서 그것을 호두차 안에 넣어 독살했다. 이후 여미인은 인두로 지지는 낙형의 고문 끝에 능지처참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이 능지처참형이라는 것은 고금에 유례가 없는 잔인한 형벌이다. 사람을 묶어두고 그 살을 각을 뜨는 형벌로 그 횟수 3천여회 등으로 정해져 있다. 만일 각을 뜨는 와중에 죄수가 죽으면 처벌자가 대신 능지형에 처해지는만큼 최선을 다해 고통을 주게끔 만들어져 있는 형벌이라 하겠다. (형벌의 자세한 묘사는 생략) 이때 여미인의 나이는 불과 21세.

여미인의 죽음으로 일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역시 다섯 공녀 중 하나였던 임씨(이때 22세)와 나중에 끌려갔던 정윤후의 딸 정씨(이때 21세)는 목을 매 자살했고, 이씨(이때 22세)와 애기 낳고도 무사했던 황씨도 국문 끝에 참형을 당했다.

이씨는, "죽기는 매한가지니 남을 끌어넣지 않겠다"고 말한 뒤 다른 사람을 무고하지 않고 죽었다. 다섯 공녀 중 제일 어렸던 최씨(1413년에 19세)만 이때 남경에 있었던 탓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사실이 통보되자 조선 조정에서는 여미인의 친척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들끓었다. 하지만 태종은 끝까지 "밖의 일은 모르는 법이다. 함부로 죄를 줄 수 없다."라고 버텼다.

그리고 태종의 말이 맞았다! 범인은 여미인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환관 황엄과 중국 궁녀 여씨가 여미인에 원한을 가지고 범인을 여미인으로 몰아갔던 것임이 8년 후 1420년에 밝혀졌다. 그것이 알려진 경위도 황당하다.

이 궁녀 여씨가 궁녀 어씨魚氏와 함께 환관과 더불어 간통을 했다. 환관은 고자인데 어찌 이런 일이? 그러나 간혹 남성의 기능이 되살아나는 환관도 있었고, 섹스라는 것이 꼭 삽입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이 사실은 곧 영락제에게도 알려졌다. 하지만 영락제...


여씨와 어씨를 묵인했다. 왜? 예뻐서... (콰당!)

그러나 황제가 불륜을 안다는데 찔린 여씨는 어씨와 함께 자살해버리고 말았다. 어씨를 더 총애했던 영락제는 노발대발해서 여씨의 종복들을 지지고 볶았는데 그 와중에 여씨가 권비를 독살하고 여미인을 모함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오 마이 갓! 궁녀 여씨는 조선에서 온 여미인이 동성이라고 친하게 지내자고 접근했는데, 여미인이 쌩까자 분노에 차 이런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놀림감이 된 영락제(앞 편에서는 엿먹더니...)는 분기탱천! 다음 해인 1421년까지 사람들 죽이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이때 죽은 사람이 3천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오죽 처벌이 잔인했던지 이 무렵에 벼락이 궁궐에 떨어졌는데, 하늘이 노여워하는 것이니 황제가 두려워 처벌을 멈추지 않을까 기대들 했다고 한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영락제는 신나게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죽기 전에 열받은 이는 "이게 다 니가 늙어서 제대로 못 해줘서 생긴 일인데, 왜 우리 핑계를 대느냐!"고 따지는 해프닝까지...

이때 황엄은 이미 죽었지만 부관참시를 당했고 아내와 노비도 모두 처형당했다.

그리고 영락제는 새삼 현인비 권씨가 해주던 조선 음식이 그리웠는지 조선에서 또 미녀와 음식 잘하는 여자들을 찾은 것이다. 아마도 이 난리 통에 살아남은 한씨와 정씨는 음식에 조예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자.

한씨는 나중에 시호를 강혜장숙여비康惠莊淑麗妃라고 받는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여비 한씨"로 일컫겠다. 여비 한씨 역시 여미인이 국문을 당할 때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녀는 냉궁에 처해져 일체 먹을 것도 금지되었는데, 다행히 그녀를 불쌍히 여긴 환관이 때때로 먹을 것을 넣어주어 간신히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도 결국 죽었다.
1423년 어머니 김씨가 죽었을 때도 고국에 올 수 없었던 그녀는 다음 해 자살 아닌 자살을 해야했다. (김씨의 죽음으로 명은 특별히 사신을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한다.)

1424년 7월 18일 영락제가 죽었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 관둔 순장이 시행됐다. 궁인 30여 명이 평상 위에 올라가 기둥에 늘어선 밧줄에 목을 걸면 대기하던 환관이 평상을 빼버렸다. 모두 최후의 만찬을 먹은 뒤 그곳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때 영락제의 아들 인종이 치사차 방문했다. 여비 한씨는 유모 김흑金黑이 늙었으니 귀국하게 해달라고 쳥했고 인종은 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평상에 올라간 여비 한씨가 김흑에게,

"낭娘아, 나는 간다. 낭아, 나는 간다..."

라고 마지막 말을 하고 있는데, 환관이 그대로 평상을 빼버리니 미처 유언도 마치지 못하고 허공에 매달리고 말았다. 아마도 우리말로 말했을 것이니, 환관은 말하는지 우는지 알지도 못했으리라.

명에서는 이런 순장을 가리켜 "투환순주投缳殉主"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역시 전일의 사건들로부터 살아남았던 최씨도 순사 당하고 말았다.

한씨가 몇 살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에 끌려간 처녀들이 18세가 넘는 일이 없었으니 기껏해야 18세였을 것이다. 영락제는 그녀가 대단히 총명하고 영리하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1417년에 끌려가 1424년에 죽었으니 죽을 때 나이는 많아야 스물다섯. 최씨는 스물여덟이었다.

영락제는 예순넷에 죽었고, 1408년 첫 공녀들을 만났을 때 48세, 1417년에 여비 한씨를 품었을 때는 57세였다. (갑자기 분노 게이지가...)

영락제가 여비 한씨를 총애한만큼 당연히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할 판이었는데, 그 덕은 고스란히 오라버니 한확韓確의 몫이었다. 심지어 영락제는 손녀(인종의 딸)를 한확에게 주려고도 했는데, 한확은 명나라 와서 살고 싶지는 않았던 탓에 노모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아니면 그 손녀가 못 생겼거나...)

한확은 광록시소경이라는 명의 벼슬까지 받아 왕실에서도 건드릴 수 없는 언터처블이 된다. 그는 판한성부사,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의정부 좌찬성, 서성부원군, 좌의정에까지 오른다.

매부인 영락제가 죽자 그는 다시 명으로 간다.

그는 여기서 아마도 어여의 난 등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 진실은 1427년에 가서야 사신으로 온 환관 해수에 의해서 조선에 알려졌다.

조금은 괴로워해야 마땅할 한확은 별로 그런 생각이 없었다. 다음해 그는 전감무前監務 김성정金成鼎 첩의 딸 고미古未 와 간통하다가 걸렸다. 정3품인 절제사 지위까지 올라가 있던 그는 보통 여자도 아닌 시녀를 건드렸다가 들킨 것이었다. 말하자면 왕의 여자와 놀아난 것인데, 세종은 혀를 깨물고 이렇게 말한다.

"그 새낀 내가 처벌할 수가 없다는..."

한편 인종은 일찌감치 죽었고 인종의 아들이 황위에 올라 선종이 되었다. 선종이 선황의 유습을 본 따, 훌륭한 정치를 했는지는 모르겠고, 조선에 또 공녀를 요청했다. 이래서 세종 9년에 공녀가 보내지는데, 이들은 전에 영락제가 뽑으라고 해서 뽑았던 그 사람들은 물론 아니고(영락제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그 여자들은 풀려났다.) 새로 뽑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다음 해 또 여자를 보내라는 명이 내려왔다. 7명의 처녀 중에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었던 것이다. 본래부터 이들이 노리는 여자가 따로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여비 한씨의 동생이었다. 이때 나이 스무살.

한계란韓桂蘭. 본래 전년도에 끌려갔어야 하나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어 간신히 빠져나왔으나 올해는 아예 콕 찝어서 지목당하고 말았다. 아비의 여자의 동생이니 이모인 셈인데, 이모와 자겠다고 난리를 치는 조카녀석이라... 족보를 뒤죽박죽 만들다니... 하지만 이런 건 아무 상관 없었고 오직 데려오라고 성화였으니, 방법이 없었다.

한확이 앞장 서서 중매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계란이 병이 나자 한확은 얼른 약을 지었는데 계란은 절망해서 부르짖었다.

"벌써 누이동생을 팔아먹어서 부귀영화를 누리더니 이제는 하나 남은 누이동생마저 팔아먹을 심산이구나!"

버텨봐야 소용 없음을 안 계란은 비단이불을 칼로 찢어버리고, 그동안 장만했던 혼수감을 친척들에게 모두 나눠준 뒤 공녀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끌려가자 언니의 비극을 아는 도성 사람들마저 눈물을 흘렸다.

"언니가 궁녀가 되어 순장 당한 것도 억울한데 이제 동생마저 잡혀가는구나."

사람들은 이 광경을 가리켜 살아서 장례를 치른다고 말할 정도였다. 전일 황엄이 공녀를 호송할 때는 황후나 비빈 대하듯 엄숙했지만, 이번에 온 사신들은 욕심도 더 많고(황엄을 욕심꾸러기라 불렀는데, 이들은 황엄의 몇 배나 더 욕심을 부렸다) 무례하기도 이를 데 없었다.

미색인 계란을 호송하며 이들은 손을 어루만지기 일수요, 심지어 내시라는 핑계를 대고 한 방에 거처하고자 했을 정도니 계란이 가고 싶지도 않은 길을 가면서 얼마나 상처를 입었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그리고 그 오래비는 같이 수행하면서 대체 뭘하고 있었던 걸까?

전날 여비 한씨는 가세가 빈한해서 끌려갔다고는 해도, 이번 막내의 경우는 한확이 자신의 권세를 위해 팔아먹은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는 오래오래 살아 오라비보다 더 오래 살았다. 그녀는 선덕제의 후궁이었고 영종(북방정벌에 나섰다고 오이라트 족에게 잡혀버린 그 인간)과 경태제의 혼란기도 잘 넘기고 성화제의 총애를 받다가 성종 14년(1483년) 5월에 74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그동안 4명의 황제를 모신 덕에 공신이라는 시호도 내려졌다.

제문에는 "온유경신하고 아름답고 착하며 말을 망령되이 하지 않고 행동이 떳떳하며 궁중의례를 모두 기억하여 집사들이 모두 스승으로 받들어 노로老老라 부르며 결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했으며 호부상서 유유가 묘비명을 지을 정도로 공경받았다.

아마도 그 덕분에 한확의 영광은 쭈욱 계속되었다. 그의 장남 한치인과 막내 한치례는 모두 판돈령부사(종1품)에 올랐고 차남 한치의는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 한치의는 생원시를 칠 때 남의 답안을 내놓아 합격한 파렴치한이기도 하다. 사촌들도 모두 출세를 했고 덕분에 나라에 끼친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왕조실록의 사관은 평가하고 있다.

한확의 딸은 세조가 아직 수양대군이던 시절에 세조의 장남 이장에게 시집왔다. 이장은 세조가 왕이 된 뒤에 의경세자로 봉해진다. 의경세자보다 한 살이 많았던 그녀는 의경세자가 세조3년에 스무살로 죽었을 때 벌써 2남 1녀를 낳았는데, 이중 둘째 이혈이 자을산군이었다가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이 된다.

그럼 이제 이 의경세자빈 한씨가 누군지 알겠는가? 훗날 연산군의 박치기에 쓰러지는 인수대비 한씨가 바로 그녀다. 인수대비는 후일 아들 성종의 아내 윤씨를 미워해서 결국 이혼시키고 모함에 모함을 거듭해서 사약을 먹게 만든다. 후일 연산군의 광기는 여기에서 비롯되는데, 이 여인의 성품은 자기 아비로부터 물려받았던 것일까?

한확은 처첩을 여럿 거느리고 살고 심지어 궁녀와 간통하기도 했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창기의 집에 놀러가는 것을 극력 비난했다. 누군가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옛날 어떤 신하가 외방에 나가 병수사의 일을 맡았는데 막하에 무뢰배가 하나 있었다. 이 무뢰배가 가벼운 잘못을 저질렀는데 병수사는 중벌로 다스렸지. 그 이유가 그자가 자신과 잔 창기와 잤기 때문이었네. 그후 나는 사람들이 창기와 가까이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게 되었네."

하지만 그가 겉으로 성관계에 엄격한 것처럼 행동한 것은 누이를 팔아서 출세했다는 세간의 이목이 두려워서가 아닐까?

- 남은 짧은 이야기

둘째 한치의는 다른 사람의 첩을 빼앗아 자기 첩을 삼은 뒤 그 사람이 와서 욕을 하자 그것을 핑계로 잡아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나이 서른넷에 죽자 사람들이 원혼에 의해서 죽은 거라 쑥덕댔다고 한다.

조카 한치형은 유자광, 노사신 등과 못된 짓을 일삼다가 죽었는데, 그후 연산군 생모의 비밀이 밝혀지자 그에 가담한 죄로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 일가가 몰살되었다.

덧글

  • ghistory 2009/03/15 17:06 #

    술 잘 빗는→술 잘 빚는?
  • 초록불 2009/03/15 17:14 #

    오타입니다.
  • rumic71 2009/03/15 17:09 #

    모든 역사는 여자 때문에 움직인다는...
  • ghistory 2009/03/15 17:23 #

    질문들입니다:

    1. 어린아이들이 음식만드는 법을 배웠을 리는 없는데 어디서 가르쳤다는 말일까요?

    2. 호두차: 호두로도 차를 끓이나요? 이 차는 처음 들어봅니다.

    3. 여미인과 함께 죽은 조선 여성들: 공범들인가요?

    4. 조선 조정에서는 여미인의 친척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명에 잘보이려는 것인가요?

    5. 제대로 못 해줘서: '무엇' 을 못 했다는 것인지요?

    6. 사람들 죽이는 걸: 어떤 한 사건과 관련한 것인지 아니면 죄인들 일반이 대상인지요?

    7. 대행황제로서: 대행황제나 대행왕은 아직 호칭을 정하지 못한 바로 죽은 군주 아닌지요?

    8. 낭娘: 어떤 호칭인지 궁금합니다.

    9. 투환순주의 환: 어떤 고사인지 알 수 있을까요?

    10. 한계란의 경험을 보니 후궁을 교체하지 않기도 했나 보지요?

    11. 생원시를 칠 때 남의 답안을 내놓아 합격한: 현장에서 어떻게 이런 바꿔치기가 가능한지 신기할 뿐입니다.

    12. 자을산군: 어떤 문헌은 잘산군이라고 하는데 어떤 표기가 맞는지요?

    13. 한치형: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연산군에게 간언한 게 미움을 산 탓에 부관참시당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서술인지요?
  • rumic71 2009/03/15 17:27 #

    11. 당대 과거시험의 비리를 보면 요즘의 커닝 정도는 쨉도 안 됩니다.
  • 초록불 2009/03/15 17:40 #

    1.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2. http://100.naver.com/100.nhn?docid=776404

    3. 그렇게 생각한 거죠. 질문의 요지를 모르겠군요.

    4.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5. -_-;;

    6. -_-;;

    7. 잘못 옮겼군요. 대행황제의 궁녀를 보러온 것입니다.

    8. 그냥 여자 부르는 호칭입니다.

    9.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10. 그런가 봅니다.

    11. 네, 신기합니다.

    12. 자산군이었다가 자을산군이 됩니다. 잘산군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군요. http://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_%EC%84%B1%EC%A2%85

    13. 박시백 글은 안 봐서 모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간언을 했는지 좀 신기하긴 하군요.
  • 싱글·하트 2009/03/15 19:55 #

    1. 11~12세는 '7명의 여인' 중 셋을 일컫는 말이고, 요리사는 10명을 따로 뽑았다는 거지요.
  • savoury 2009/03/15 20:46 #

    낭娘- 사전을 찾아보시면 어머니라는 뜻도 있습니다. 유모한테 한 말이니 어머니... 이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 ghistory 2009/03/15 22:39 #

    설명들 감사합니다.
  • Tzar Bomba 2009/03/19 22:13 #

    13번에서 '한치형은 죽기전에 연산군에게 간언을 한 적이 있는데 그가 죽고나서 연산군의 권력이 강해지자 그 일을 이유로 부관참시했다'고 해석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 슈타인호프 2009/03/15 18:18 #

    잘 읽었습니다. "개같은 오라비" 한 마디로 요약이 가능하겠는데요-_-;;;
  • 초록불 2009/03/15 19:09 #

    네, 그렇죠.
  • 진성당거사 2009/03/15 18:42 #

    철면피 한확의 이야기는 옛날에 몇몇 책 뒤적거리며 읽어봤었지만, 오늘 이 일련의 포스팅을 읽으니 이 이야기가 망각의 저 편에서 되돌아와 분노 게이지가 갑자기 상승.........;;
  • 초록불 2009/03/15 19:09 #

    하하...^^
  • 허안 2009/03/15 18:57 #

    ? 스무살로 죽은 여자가 누군지 잘 모르겠습니다. 의경세자빈이 둘이란 말인가요?
  • 초록불 2009/03/15 19:09 #

    중대 미쓰군요. 스무살에 죽은 건 의경세자인데, 글을 고치다가 의경세자빈이 죽은 걸로 착각하게 쓰여지고 말았네요. 죄송.
  • 악희惡戱 2009/03/15 19:06 #

    아... 권씨랑 한씨랑 헷갈렸군요;;;;
    하여튼 권씨가 예쁘긴 예뻤나 봅니다^^;;;;;
  • 초록불 2009/03/15 19:10 #

    앗... 또 어디에 헷갈린 부분이???
  • 악희惡戱 2009/03/15 19:26 #

    아뇨, 글이 아니라 제가 헷갈린 겁니다.
    권씨가 아니라 한씨가 독살당한 걸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참, 그러데 제가 봤던 글에서는 권씨를 독살한 여씨도 조선 출신 여인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말이죠^^;;;;;;;
  • 초록불 2009/03/15 19:30 #

    아, 네. 조선인은 아닙니다.
  • 子聞之曰是禮也 2009/03/15 19:28 #

    인수대비의 아버지로만 기억되는 그분입니까?
  • 초록불 2009/03/15 19:30 #

    그분입니다.
  • 子聞之曰是禮也 2009/03/15 19:36 #

    누이 덕에 대국에 벼슬하고 딸 덕에 조선의 공신이되었으니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부럽다]를 몸소 실천하신 선각자로군요.
  • 나아가는자 2009/03/15 19:54 #

    저는 명의 영락제 사망후에 후궁들이 집단자살(사실상의 타살)에 처해졌다고만 알고있어서 모두 죽는다고 댓글을 달았던 것인데, 실제로는 여러가지 사인으로 죽었군요. 특히나 여러 명이 억울하게 죽은것은 참으로 안타깝네요.
  • savoury 2009/03/15 20:44 #

    저라면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면 나름의 복수를 진행했을 것 같은데(누이의 복수... +_+) 저 아가씨들은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네요.
  • 이야타 2009/03/16 09:42 #

    그러게요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면 어느정도 권력이 생겼을텐데, 몬땐 오라비와 형부를 좀 혼내주지!

    바보같이 당하기만 하고 살았누 ㅜ.ㅠ
  • 루드라 2009/03/15 21:05 #

    한씨가 죽기 직전 娘아 娘아라고 한 건 아마 엄마, 엄마라고 한 걸 한문으로 옮긴 걸겁니다. 궁녀나 환관들이 황후를 娘娘이라고 애칭으로 부르기도 하고, 집안에 어머니 뻘 되는 사람이 많을 때 아버지의 첫째 부인을 大娘, 둘째 부인을 二娘하는 식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한씨가 인종에게 자기 유모의 귀국을 부탁하면서 자기 엄마가 늙었으니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ghistory // 앞 글자에 'ㄹ' 받침이 있을 경우 한자로 옮기면서 뒤에 乙자를 붙여주는 경우가 많긴 합니다만 자을산군의 경우가 잘산군일 것 같지는 않네요.
  • 초록불 2009/03/15 21:43 #

    흠.. 유모도 젖어멈이라고 하듯이, 그런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겠군요.
  • ghistory 2009/03/15 22:01 #

    감사합니다.
  • 김똘9 2009/03/15 21:36 #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역시 시대에 관계없이 막장(?)인간은 존재하는군요.
    누이를 팔다니 둘 씩이나..!!!
  • 초록불 2009/03/15 21:45 #

    잘 보셨다니 기쁘군요...^^
  • 이준님 2009/03/15 22:35 #

    1. 영락제 자신은 꽤 많은 조선임금들의 표상 -_-;;이 되지요. 수양대군은 노골적으로 그의 귀염을 받았다고 자기가 강조할 정도이고 -_-;;

    2. 능지형이야 3천도 능지는 실제 이름일 뿐이고 980~3184번으로 되어 있습니다. 실제보면 집행자를 대신 처벌했다는 건 공식화 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_-;;; 능지형 자체가 억울한 희생자가 꽤 많아서 중국에는 관련 비극도 여러편 있기는 한데 말씀하신바와 같은 일때문에 그런 문학이 났다고도 볼수 있지요 참고로 거의 최후의 능지형은 태평천국의 난때 생포된 태평천국군 고위간부들에게 시행된 것이었습니다.

    3. 사실 저 논리라면 고려 연간에 기철 -_-;;같은 경우도 대표적인 케이스지요. 2000년대에 와서 kbs에서는 기황후를 아주 숭상합니다만 (정확하게는 윤백남의 대도전 같이 한 번 읽으면 잠이 안 올만큼의 초울트라 환상작품도 일제 연간에 나왔는데요 뭐)
  • ghistory 2009/03/15 22:38 #

    수양대군하고 영락제하고 어떤 연고가 있는지요?
  • 초록불 2009/03/15 22:47 #

    능지형에 대해서는 자세한 이야기는 아무튼 하고 싶지가...

    그런 걸 쓰고나면 성비가 확 나빠질 겁니다...^^

    ghistory님 / 찾아보기 귀찮아서 확인은 안 했지만, 수양대군 시절 명에 사신으로 가서 영락제를 만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이준님 2009/03/15 23:04 #

    노산군 일기(그러니까 단종 실록)에 보면 노골적으로 사신으로 간 수양대군을 영락제가 귀여워했고 영락제의 신하들도 수양을 조선의 군왕으로 점찍었다류의 이야기를 하지요. 역시 압권은 영락제의 애완용 코끼리가 수양을 보고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는 것 -_-;;;
  • ghistory 2009/03/15 23:17 #

    두 분 설명 감사드립니다.
  • 꽃곰돌 2009/03/16 00:06 #

    잘보고 갑니다~.~ 기철과 기황후 이야기도 혹시 기회되면 알려주세요~
  • 초록불 2009/03/16 00:27 #

    그건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인데다가 이글루 안에는 고려사에 빠삭한 자중자애님이 계신 터라...

    기회가 되면 꼭 선점하겠습니다. (으잉?)
  • 세류 2009/03/16 00:48 #

    그냥 이건 뭐.. 저렇게 살 수도 있군요. ;ㅁ; 요즘 아내의유혹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스케일..
  • 뚱띠이 2009/03/16 01:07 #

    개색이로군요.....
  • Allenait 2009/03/16 01:45 #

    ..결론은 권력 유지를 위해 친척 잘 팔아먹은 셈이군요(...)
  • 이야타 2009/03/16 09:37 #

    으으으 정말 한확 이 나쁜 노무 색희!!!!!!!!!!!!!!!!!!!!!!!! ㅜㅠㅜㅠㅜㅠㅜㅠㅜㅠ

    아니 지는 외국 나가 살기 싫어라하면서 누이는 잘도 명에 팔아먹고!!!!!!!

    ㅜ.ㅠ 정말 육두문자만 나오네요 에구구.
  • 어릿광대 2009/03/16 10:06 #

    한확이나 그의 딸이나 그의 아들들이나 한숨나오게 만드네요(...)
  • 네비아찌 2009/03/16 11:05 #

    한씨네 막내따님이 천수를 누린걸 보면 선덕제는 후궁 순장을 시행하지 않았나 보네요. 후궁을 순장하셔서 저승에서도 복락을 누리라는 父祖의 뜻을 어기신다고 환관들이 꽤나 난리쳤을거 같습니다.
  • 초록불 2009/03/16 11:38 #

    일일이 조사를 한 건 아니지만 순장에 모든 후궁이 따라죽는 건 아닐 겁니다. 영락제의 경우 30여 명이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죠.
  • 루드라 2009/03/16 18:33 #

    초록불님 말씀대로 순장이 모든 후궁에게 적용된 건 아니고요 자식이 있으면 제외되고 총애를 받았고 나이도 젊어야 했습니다. 후궁과 환관, 궁녀등을 포함해서 대략 저 정도 숫자입니다.

    순장은 그 뒤에도 계속되다가 영종이 죽으면서 유언으로 순장을 금지합니다.(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혀갔던 그 머저리 황제입니다) 멍청하기로 따지자면 역사상 유래가 드물 정도의 머저리였지만 저 한가지 공로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죠.
  • 레드칼리프 2009/03/16 22:08 #

    박시백씨 만화에서 이 부분 볼때도 배가 살살 아파왔는데 초록불님 글을 읽으니 머리가 아파오는군요.
    쩝... 태종, 세종시대의 외교를 알면 알수록 참 슬퍼져 옵니다. 오히려 청이 집권했던 시기가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지요.
  • elly 2009/03/19 00:21 #

    여비 한씨의 동생인 한계란韓桂蘭이 선덕제 선종의 관계를 족보로 치자면 이모뻘이 아니라 이모 할머니뻘이 되는게 아닌가요...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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