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스포일러?) *..문........화..*



제5도살장 - 8점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아이필드


오래된 책이라는 걸 느끼게 한다. 문체나 구성이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이 책의 구성은, 책 시작부분에 적혀 있는 말 그대로다.

이 책은 비행접시를 보내오는 행성 트랄파마도어의 전보문 형식으로 쓴 정신분열성 소설이다.

제5도살장이라는 책 제목은 섬뜩하지만, 이것은 그저 드레스덴의 미군 포로수용소 이름이었을 뿐이다. 미군을 도살한 곳이 아니라 그냥 과거 도살장이었던 이곳에 미군을 수용했을 뿐이고.

소설의 주제는 결국 반전反戰인데, 나는 반전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서부전선 이상없다>가 더 재미있는 소설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빌리 필그림은 발작적 시간여행자다. 그는 자신의 시간대를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살고 있다. 그는 2차대전 중 독일 전선에서 갑자기 시간여행을 시작하게 되는데 사실 내가 궁금했던, 왜 시간 여행을 하게 되었는지 같은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또한 미래로 올라간 빌리가 건너 뛴 시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시간을 들여서 획득해야 하는 전문 기술의 기억을 과거로 돌아와서도 가지고 있는지와 같은 의문에도 답하지 않는다.

그가 단지 놀림감이 될까봐 그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는 점을 외면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차례 설명이 시도되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소설 상으로는 그럴 듯하지 않았다.

이 책은 빌리 필그림이라는 사내의 이상한 일생. 1964년에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외계인의 동물원에 전시되었다가 돌아왔다는 이상한 삽화가 끼어든 것 이외에는 그는 2차대전에 참전했다가 살아돌아와 부잣집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잘 살다가 죽은 사람에 불과하다. 그렇게 가는 거지.

나는, 이 소설이 잘못된 소설이거나 읽을 가치가 없는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소설은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글이 어떻게 견뎌내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작가에게 이 털어버릴 수 없는 기억(드레스덴 폭격)이란 정상적인 플롯으로는 도무지 소화할 수가 없는 충격이었던 것 같다. (써놓고 보니 번역자 해설에도 같은 이야기가 적혀 있다...-_-;;)

1969년. 베트남 전쟁 와중에 나온 만큼 이 책의 반응이 미국에서 뜨거웠을 것은 당연히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마치 록키 산맥을 한 눈에 보듯이 멀리 떨어져 이 사건의 바깥에서 이 책을 보고 있다. 그런 만큼 이 책의 감동은 식어버린 찌개처럼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간대에서 벗어나 진지하게 이 책을 읽어나가면 반전 이외에 대한 이야기가 솔솔 쏟아져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생에서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왜 그게 하필 "나"인가, 라고 묻는다.

음주 단속에 걸렸을 때도, 승진에 누락 되었을 때도, 암에 걸린 것을 알았을 때도. 이런 질문은 그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던져진다. 외계인은 이렇게 말한다.

"필그림 선생,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호박琥珀 속에 갇혀 있는 것이오. '왜'라는 건 없소."

빌리는 잔인한 인간들을 외계인에게 고발한다. 그들의 힘을 빌려서 평화를 이루고자 한다. 하지만 외계인들은 말한다. 그것을 외면하라고. 좋았던 것을 생각하라고. 그들은 심지어 우주가 어떻게 멸망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것을 막으려 하지 않는다. 빌리도 그렇게 산다. 누가 그를 죽이러 오는지 알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 암살자는 이미 수십년 전에 그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그 일은 잊어버려. 임마. 즐길 수 있는 동안 인생을 즐기라고. 5년, 10년, 15년? 어쩌면 20년까지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거야."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그 일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외계인에게 잡혀온 전 포르노배우 몬태나는 벌거벗은 채 외계인의 구경거리로 살면서 빌리에게 말한다.

"전쟁 때 당신이 어땠는지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어요. 당신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어릿광대였는지를요."

이 글의 화자는 소설 말미에서 지구 상의 엄청난 인구에 대해 쓴 뒤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들이 모두 존엄하게 살고 싶어하겠지."

이 이상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에는 꽤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사족으로 이 책에는 여러차례 독일이 유태인의 지방을 짜내 비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총 3번) 마이클 셔머는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사족 하나 더. 이 책이 유머러스하다는 평에는 동의하기 힘든데, 다만 예수에 대한 외계인의 해석은 유머러스했다.

핑백

  • 초록불의 잡학다식 : 올해 산 책 얼마나 읽었나 2009-04-06 16:59:53 #

    ... - 읽고 있는 중그외 여러 루트로 들어온 책미사고의 숲 - 아직 안 읽었음노인의 전쟁 - 아직 안 읽었음강의(신영복) - 일부 읽었음제5도살장 - 서평 올렸음 http://orumi.egloos.com/4105063계간 판타스틱 2009 봄호 - 읽었음 http://orumi.egloos.com/4085159대성당 - 서평 올렸음 http://orumi.e ... more

덧글

  • Allenait 2009/04/02 17:05 #

    의문이 마구 생기는데, 자세한 건 역시 읽어봐야 할것 같군요
  • 초록불 2009/04/02 17:12 #

    술술 넘어가는 책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 marlowe 2009/04/02 17:11 #

    반전(反戰)과 반전(反轉)을 혼동했습니다.
  • 초록불 2009/04/02 17:13 #

    그럴 수 있겠네요. 달아놓았습니다.
  • catnip 2009/04/02 17:51 #

    서양식 유머를 꽤 즐긴다, 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긴해도 이 사람의 책이 유머러스하다는 이야기는 영 취향이란게 대체 뭔지,,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했었지요. 아, 이 책은 못봤습니다만.^^;;
  • 월광토끼 2009/04/02 18:08 #

    커트 보네것의 책들이 대개 다 그렇습니다. 유머와 풍자를 통한 反戰 메세지의 전달. (그러고보니 고등학교 연극부 때 커트 보네것의 단편 소설의 연극본 주인공 역을 연기하던 생각이 나는군요 ^^; 특수한 능력을 사용해 세계의 무기를 다 없애는 천재 과학자 역이었는데..)
  • aerycrow 2009/04/02 18:48 #

    제가 좋아하는 부분은 이 대사입니다.
    'If I hadn't spent so much time studying Earthlings,' said the Tralfamadorian, 'I wouldn't have any idea what was meant by "free will." I've visited thirty-one inhabited plants in the universe, and I have studied reports on one hundred more. Only on Earth is there any talk of free will.'
    (번역서가 없어서.--;)
  • 초록불 2009/04/02 19:55 #

    "내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지구인들을 연구하지 않았다면" 하며 그 트랄파마도어 인은 말했다. "나는 '자유의지'가 무엇인지도 몰랐을 거요. 나는 우주의 유인 행성 서른한 곳에 가 보았고, 1백 곳에 대한 보고서를 검토했소. 자유의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하는 행성은 지구뿐이더군."
  • 이준님 2009/04/02 18:54 #

    1. 사실 리얼리즘(혹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판을 치던 80년대를 겪었던 우리로서는 저런 소설이 낯설고 배타적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꽤 늦게 소개된 감이 있지요. 하지만 당대의미국-그리고 현재도-에서는 저런 형식의 이야기가 각광을 받았고 영원한 고전이 된건 사실이지요.

    2. 초록불님의 평과 같은 평은 미국문단의 유명한 평론가들도 한적이 있고 이분들의 시각은 "카치아토를 찾아서"나 "캐치 22"에서도 비슷하게 들어갑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소설들과 보네것의 다른 소설들이 60년대의 기수가 된것이지만요

    3. 주인공 필그림이 외계인 납치를 겪고 나서 시간의 방랑자가 된 설정이지요

    4. 영화판도 나왔습니다. 의외로 원작에 아주 충실합니다만 마지막 장면은 필그림의 영원한 방랑부분에서 결말부분(암살, 동물원에서의 아이 출생, 소비에뜨군의 드레스덴 해방) 을 모아서 만들었지요.

    PS: 마더 나이트의 주인공이 우정출연합니다.

    소설 전반에 나오는 4류 SF 작가는 보네것 월드에서 아주 자주 언급되는 친구이지요. "인류가 불임이 되서 멸망하고 가임 가능한 소수의 관광객만이 잡혼해서 물개형 인간으로 변하는 연대기"인 "갈라파고스"에서도 언급이 나옵니다. 갈라파고스의 화자는 베트남판 필그림이라고 보면 되지요
  • 초록불 2009/04/02 19:57 #

    3. 이 부분은 이준님 기억이 잘못 되었습니다. 본문에 이렇게 나옵니다.

    빌리는 자신이 처음으로 시간에서 해방된 것은 트랄파마도어에 가기 오래전인 1944년이었다고 말한다. 트랄파마도어 인들은 그의 해방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그들은 단지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 것뿐이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