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압록강을 넘다 *..역........사..*



1219년(고종6년) 10월 서북면 병마사 김군수金君綏(김부식의 손자)는 의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개경에 올렸다. 하필 이때는 무신정권의 집권자인 최충헌이 죽은 지 채 11일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의주의 별장 한순韓恂과 랑장 다지多智가 수장守將을 죽이고 의주를 점거한 뒤 북방의 여러 고을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다음 달에 이미 안북도호부(안주)를 공격했다. 다행히 안북도호부는 반격에 나서 반군 박소朴蘇 등 18명의 수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지나친 수탈과 학정 때문이었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이(최우)는 탐관오리들을 유배 보내는 등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반란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최이는 토벌군에 김취려金就礪를 임명한다. 김취려는 고려에 침입했던 거란병을 무찌른 명장이다. 몽골군에게 쫓기던 거란군이 고려로 쳐들어와(1216년) 고려 전역에서 분탕질을 놓았는데, 충주까지 내려오던 거란병을 박달재에서 무찌른 이가 김취려였다. 거란군은 더 이상 남진하지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했고, 토끼몰이하듯 이들을 몰아간 결과 평북 강동에 이들을 몰아넣게 되었다. 그런데 11월, 최후의 공세를 준비하던 고려군 앞에 낯선 군대가 나타났다.

몽골과 동진東眞(여진족 국가)의 군사 3만이었다(몽골군 1만, 동진군 2만. 금이 몰락하면서 세워진 동진은 이미 몽골에 굴복한 상태였다). 몽골원수 합진哈眞은 합동 공격을 제안했고 그 결과 1219년 정월 삼 연합군은 거란군을 공격하여 항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사건으로 몽골은 고려를 형제의 나라(물론 몽골이 형)라고 부르게 되었다. 여기에는 김취려의 용맹과 뛰어난 풍채도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로잡힌 거란인은 황무지 개척 등에 동원되었다.

이런 김취려가 등장하자 앗, 뜨거라 해버린 한순과 다지는 금나라 원수元帥를 자처하고 있는 우가하에게 항복해버렸다. 자신들이 점령한 땅을 우가하亏哥下에게 바친 것이다.

우가하는 1217년(고종4)에 동진을 세운 포선만노蒲鮮萬奴를 공격하다가 패배해서 살려달라고 압록강을 건너온 적도 있었다. 이후 고려는 우가하의 편의를 보아주며 동진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그러니만큼 한순과 다지가 우가하를 꼬시려한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우가하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척 불러들여서는 그들의 목을 베어버렸다. 고려는 그 보답으로 은존銀尊·은반銀盤·은우銀盂 각 한 개, 은잔銀盞 두 개, 세저細紵·세주포細紬布 각 50필匹, 광평포廣平布 5백 필匹, 쌀 1천 석을 보내주었다.

이 일이 우가하의 기를 살려준 것일까? 그 후 우가하는 고려에 대해서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종종 고려의 변경을 침입해서 약탈을 해갔다. 1224년(고종11)에는 우가하가 잡아간 고려인 200여 명이 고려로 돌아오기도 했다. 아마도 속량전을 바치고 풀려난 것이리라.

물론 고려도 가만 있지 않았다. 1225년(고종12)에는 우가하의 막관幕官 초주마焦周馬 등 여럿을 잡아 섬으로 유배 보내기도 했을 정도다.

1223년(고종10) 정월, 금나라 장수 우가하가 압록강을 넘어와 의주와 정주 지방을 노략질했다. 이때 우가하는 자기 군사들에게 몽골군 복장을 입혔다. 이때 의주분도장군義州分道將軍으로 있던 김희제金希磾가 우가하를 치고자 했는데, 위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노략질하는 도적 떼란 단지 그것만 충족되면 물러가기 때문에 전면전이 될 일을 벌이지 않으려는 무사안일의 소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김희제는 그 꼴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그는 갑사甲士(갑옷 입은 병사) 100명을 보내 우가하의 진영을 급습하게 했다. 아마도 야간 기습이었을 것이다.

허를 찔린 우가하는 놀라서 패주하고 말았다. 이들은 급히 압록강을 건너다 상당수가 빠져 죽고 배도 채 챙겨가지 못해서 김희제는 치중輜重을 실은 배 22척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공으로 김희제는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었다.

김희제는 본래 문관이었던 모양이다. 무신정권 때는 무신이 진급이 빠르고 고위직을 지냈기 때문에 김희제는 뒷날 장군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문장력도 뛰어났으며 과단성도 있는 문무겸전의 인재였다.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와 저가這可 등이 와서 분탕질을 놓고 있을 때 이들을 얼르고 뺨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김희제였다. 김희제의 으름장에 저가는 무릎을 꿇고 빌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1226년(고종13) 우가하는 또 변경을 넘어왔다. 이번에는 몽골군으로 변장을 하고 넘어왔다. 몽골군의 위력을 빌려 호가호위하려는 속셈이었다. 가만 보고 있을 고려군이 아니었다. 고려군은 빈집털이에 나섰다. 압록강을 넘어가 우가하의 본진인 석성石城을 공격한 것이다.

지병마사知兵馬事 이윤함李允諴은 별장 김이생金利生과 대관승大官丞 백원봉白元鳳에게 군사 200여 명을 주어 도강하게 했다. 김이생 등은 석성을 공파하고 선무부통宣撫副統 등 5명을 베고 우마와 병장을 노획했다. 이들은 우가하와는 싸우지 않고 돌아왔다. 우가하 역시 이 마당에 약탈을 할 수 없었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이 승전에 고려군은 크게 고무 되었다. 김희제는 즉각 최이에게 우가하 공격의 명을 내려달라 주청했다. 그러나 최이는 가타부타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이것은 중앙정부가 관여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라는 신호였다. 김희제는 판관예부원외랑判官禮部員外郞 손습경孫襲卿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송국첨宋國瞻과 더불어 우가하 공략군을 편성했다.

김희제는 우가하를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동진군에 패해서 빌빌 대고 있을 때, 그를 살려준 것이 고려였는데 이제는 세력을 만회했다고 걸핏하면 변경의 군현을 침범하는 배은망덕한 인물이었으니까.

김희제는 스스로 중군을 맡고 손습경에게 좌군을, 송국첨에게 우군을 맡겨 보기 1만의 군사로 출정했다. 목표는 석성. 군량은 20여일 치를 준비했다. 때는 겨울이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석성을 공격했다. 이 석성이 어딘지는 잘 모르겠다. 요나라와 석성을 경계로 국경을 나누었다는 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변경의 요지임에는 틀림없겠다. 파속로婆速路라 불린 지역의 마지막 성이었던 모양이다. (이 대목에서 금사 전공이신 모님의 도움이 있으려나 쳐다본다)

석성이 공격 당하자 놀란 우가하가 구원군을 보내왔으나 김희제는 구원군도 무찌르고 70여 급의 수급을 얻었다. 그러자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여긴 석성의 성주가 항복을 청했다.

성주는 군사를 이끌고 나와 흙덩이를 입에 물고 다시는 침략을 하지 않겠다고 하늘에 맹세하며 울부짖었다. 이에 김희제는 우가하의 배은망덕함을 다시 말해줌으로써 석성과 우가하 사이의 관계를 끊고 귀국했다. 돌아올 때 압록강이 녹아서 일시 멈추었으나, 다음날 다시 날이 추워지면서 강이 얼어붙어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이후 우가하의 침입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할 수 있겠다. (우가하는 저고여 피살 사건에 다시 등장한다. 고려는 저고여 피살의 범인으로 우가하를 지목하는데, 몽골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 역시 우가하가 범인일 것 같지는 않다.)

김희제는 후일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는데, 그 전말을 간단히 언급해놓자.

1227년의 일이다. 최이는 미신에 푹 빠져서 살았는데, 주연지周演之(본명은 최산보崔山甫. 본래 중이었다가 남의 소를 잡아먹은 일로 쫓기게 되어 성명을 바꾸고 점술로 먹고 살다가 최이와 만났다)가 그에게 왕이 될 관상이라고 말해주자 그 사실을 김희제에게 털어놓았다. 김희제는 주연지를 만나 그 말이 사실이냐고 따져물었다. 주연지는 최이에게 가서 천기가 누설되어서 화가 있을까 두렵다고 말했는데, 이 말이 최이의 심기를 거슬렸다. 절대권력자 앞에서 감히 화를 논하다니...

최이의 마음이 주연지에게서 떠난 것을 알자 삽시간에 모함이 쇄도했다. 상장군 노지정盧之正, 대장군大將軍 금휘琴輝와 김희제가 주연지와 더불어 희종을 복위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최이가 이런 일을 묵과할 리가 없었다. 이때 김희제는 나주에 있었는데 붙잡아 바다에 던져 버렸다. 김희제는,

"청하淸河의 백번 닿는 은혜를 갚고자 하여 동서남북으로 온통 몸을 잊었더니 어찌하여 하루 아침에 하늘의 싫어함을 만나 자맥인(紫陌人=서울 사람)이 벽해인(碧海人)이 되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최이는 김희제의 세 아들도 모두 죽였고 그 아들 김홍기金弘己의 아내도 강제로 랑장 윤주보尹周輔에게 시집을 보냈다. 남편이 죽자마자 개가를 시켜버리니 그 아내가 울고불고 난리를 쳤으나 억지로 혼인을 강행했다. 그러나 그날 밤 윤주보의 꿈에 김홍기가 나타나 그의 고환을 세게 걷어찼다. 윤주보는 다음날 급사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실상은 그 아내가 윤주보를 죽인 것이 아닐까 싶다.

김희제가 석성을 정벌하고 지은 시가 있다.

장군이 부월을 짚고 치욕을 갚지 못하면
將軍杖鉞未雪恥,
장차 무슨 면목으로 천궐에 조현하리오.
將何面目朝天闕.
청사검을 휘둘러 마산(우가하가 있는 곳)을 가리키니
一奮靑蛇指馬山,
오랑캐의 군세가 모두 거꾸러지는구나.
胡軍勢欲皆顚蹶.
용맹히 뛰어올라 다섯 강을 건너니
虎賁騰拏涉五江,
성곽은 타올라 잿더미가 되었도다.
城郭爛爲煨燼末.
술잔을 들어 장부의 마음을 펴매
臨柸已暢丈夫心,
돌아가 뵈온들 무슨 부끄러움 있으리.
反面無由愧汗發.


[추가]
최이가 김희제를 이렇게 심하게 다룬 것은 그가 전공을 세운 유능한 장군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신정권 하에서는 너무 유능하면 자신의 위치를 넘볼까 싶어 죽여버렸다...-_-;;

덧글

  • 네비아찌 2009/04/07 10:44 #

    다 이긴 전쟁을 망치고 유능한 장군은 제거하여 나라를 망쳤는데도 최씨 무신정권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뇌구조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 초록불 2009/04/07 10:47 #

    아참... 그러고보니 그 부분의 이야기를 놓쳤군요. 쓴다고 생각하면서 시작햇는데... 추가해 놓았습니다.
  • Allenait 2009/04/07 10:46 #

    아까운 무장이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참.. 그놈의 그 권모술수가 한번 끼면 꼭 저런 결과가 한두개씩 나온다는 게.. 안타깝군요
  • 초록불 2009/04/07 10:48 #

    몽골에게 대책없이 밀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ㅠ.ㅠ

    사실 몽골군은 초기에는 고려군에게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형제 관계를 제시한 것도 그런 경계심의 표출이었을 겁니다.
  • 萬古獨龍 2009/04/07 11:01 #

    전 세계 공통점.... 이건 어디든 변함이 없네요. 거진 토사구팽 수준...
  • 월광토끼 2009/04/07 11:10 #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권모술수난무의 패악 무신정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답니까?
  • 초록불 2009/04/07 11:31 #

    그, 글쎄요... 정확한 것은 모르나(위 댓글이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좀 있군요) 최씨 무신정권이 대몽항쟁을 주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자주적인 정권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요? 이것이 삼별초 떡밥으로 가면 좀 문제가 심각하긴 합니다.
  • 야스페르츠 2009/04/07 11:34 #

    사냥개를 삶아먹으려면 먼저 사냥개가 필요 없도록 실력을 길러야 할 텐데 말이죠.
  • 초록불 2009/04/07 12:51 #

    자기만 지키면 되니까요.
  • 애프터스쿨 2009/04/07 12:17 #

    불학무식한 무부들의 한계인건가요;; 이뭐;; 참 뒷골이 땡기는 군요;;
  • 초록불 2009/04/07 12:51 #

    이 시대에는 뒷골 땡기는 일이 많...다고 쓰려다보니 뭐 요즘도...
  • 들꽃향기 2009/04/07 12:31 #

    무신 정권 혹은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 하에서는 이런 토사구팽과 같은 비효율성이 보다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ㄷㄷ
  • 초록불 2009/04/07 12:51 #

    그런 것 같습니다.
  • raw 2009/04/07 12:48 #

    김희제를 비롯한 무신들의 숙청이 토사구팽같이 보이네요..;;
    뒤에 몽골세력이 있는지도 모르고 일단 직접적인 위협이었던 우가하세력을 처치하고 더이상 위협이 없을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군요;
  • 초록불 2009/04/07 12:50 #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몽골과 전쟁이 나리라고는 이때는 예상하지 못하긴 했겠습니다. 몽골과의 전쟁은 저고여가 피살된 뒤의 문제니까요.
  • StarSeeker 2009/04/07 13:08 #

    그나저나, 무신의 난으로, 문신은 씨가 말랐다고 알고 있었는데(편견), 김부식의 손자가 살아서, 관직까지 가지고 있었군요.
  • 초록불 2009/04/07 13:30 #

    음... 고려 무신정권에 대해서는 큰 오해들이 있습니다...^^;;

    많은 문신이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문신이 전멸한 것은 아닙니다. 이 시기에도 꾸준히 과거를 치고 문신 급제자들이 초과 공급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저 김부식의 손자는 매우 정치를 잘해서 의주 지방에서 신임이 두터웠다고 합니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불태워 무신란을 촉발한 한 원인을 제공한 점을 생각하면 의외긴 하지요.
  • StarSeeker 2009/04/07 13:38 #

    아... 그렇군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 초록불 2009/04/07 13:45 #

    말하자면 무신 우위정권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 raw 2009/04/07 15:51 #

    우위정권도 일부 상위계층만 우위고 나머지 중, 하층 무신들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쿠데타를 두려워한 무신정권 집권자들에게 견제를 당한걸로 알고있습니다.
  • 어릿광대 2009/04/07 15:12 #

    불쌍한 김희제군요 쩝;;
  • Shooting군 2009/04/07 15:28 #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인물은 바다에 빠져 죽고. 쯥. 과거 일이지만, 왠지 과거일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나요.
  • 진성당거사 2009/04/07 17:10 #

    토사구팽은 고래로 계속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문득 깨달았습니다.
  • 2009/04/07 20:1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9/04/07 20:22 #

    거론 하시는 것은 상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 womanizer 2009/04/07 22:15 #

    TV 사극이 역사인줄 아는 제 주윗분들에게 "이게 진짜 역사다" 라며 보여주고 싶은 글입니다.

    좀 어렵지만 재밌네요. 잘 읽고 갑니다. :)
  • womanizer 2009/04/07 22:22 #

    유익한 내용이 많네요. 링크했습니다. 신고 드릴께요!
  • 초록불 2009/04/07 23:07 #

    고맙습니다. 종종 놀러오세요.
  • 이야타 2009/04/09 21:44 #

    아아아. 선조가 생각나네요 ㅜ_ㅠ 못난 군주 아래서 늘 고생하셨을 우리 장군님도 생각나고 에구구.

    초록불님 덕분에 김희제라는 아주아주 멋지고 훌륭하신 장군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네요.

    감사합니다. ㅜ_ㅠ

    그나저나 무신정권아래 후에 조선을 일으키는 신진사대부가 등장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최우가 서방이라는 곳을 두어 문신들을 육성했다고 하던데,

    재향중소지주&하층관리로 조금씩 힘을 키워나가다가

    공민왕대 신돈으로 인해 급성장하지오.(스님이 성리학을 장려하다니 좀 역설적이긴 하죠 ^^)

    뭐 교과서적 역사지식만 대충 알고 있는지라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들 알고 계실 내용을 저 혼자 잘난 척 이야기하는게 조금 민망하네요 ㅎㅎ;;;;;
  • 초록불 2009/04/09 22:27 #

    성리학이라는 학문이 남송 때 등장한 것이라서 어차피 그 전에는 나타나기가 불가능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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