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수정] *크리에이티브*

이 글은 현실세계의 특정 정치인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1.
옛날, 어느 곳에 세묜이라는 정치가가 농부의 집에 셋방을 얻어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한 명의 지지자도 없어 다른 정치가의 연설문을 써주거나 댓글 알바를 하는 일용직 노동자로 겨우 살아갔습니다. 밥값은 비싸고 알바비는 적어서 먹고 살기에 빠듯했습니다.

하지만 공천 기탁금을 만들기 위해 2년째 돈을 모았습니다. 선거철이 되자 간신히 필요한만큼의 돈이 모였습니다. 여기저기 밀린 알바비를 다 받으면 마감 전에 돈을 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때문에 알바비 회수에 나섰는데, 모두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돈을 다 주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조금 받은 돈으로 홧김에 술을 마셨습니다. 거나하게 술이 취해 나온 세묜은 낙심천만이긴 했지만 보궐선거를 노리겠노라 다짐하며 중얼거렸습니다.

"이번 선거의 부정부패 현장을 꼭 잡아내서 낙선시키고 말테다! 감히 내 돈을 떼먹어? 어디 두고보자."

그때 교회 벽에 한 사내가 기대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몸의 청년이었습니다. 벌벌 떨고 있는 것이 분명 아직 살아있었죠. 더럭 겁이 난 세묜은 그냥 지나쳐 버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 속에서 어떤 물음이 들려왔습니다.

- 대체 어쩔 셈이냐? 한 청년이 변을 당해 죽어가고 있는데 모른 척 할 셈이냐? 유권자에게 선행을 자랑할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단지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내버릴 것이냐? 그래서야 어찌 큰 정치가가 되겠느냐? 선거에 나가서 매번 떨어지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이봐, 세묜. 그러면 못 써.

2.
세묜은 미하일이라는 이 청년을 데리고 집에 갔습니다. 아내는 처음에는 없는 살림에 군입이 들어왔다고 펄펄 뛰었지만 미하일의 미모를 보고는 입을 닫았습니다.

다음날부터 미하일도 선거판 알바를 시작했습니다. 선거철이 되었기 때문에 일감은 많이 있었습니다. 둘은 전단지 붙이는 일을 했습니다.

하루는 당선이 유력한 거물의 선거벽보 일이 들어왔습니다. 거물이 말했습니다.

"제법 일을 잘 한다고 들어서 맡기는 것이니 실수 없어야 한다. 이 포스터 재질이 어떤 건지 알겠느냐?"
"영국산 수입지군요. 최상품 종이입니다."
"그래. 잘 아는군. 선거일까지 단 한 장이라도 떨어진다면 알바비는 한 푼도 못 받을 거다."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내일까지 다 붙여야 해."
"그, 그건..."

엄청난 양의 포스터여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미하일이 옆구리를 쿡 찌르는 바람에 엉겁결에 일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미하일은 하루가 다 가도록 풀도 쑤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봐, 미하일. 그 사람은 엄청난 거물이야. 일을 잘못 처리했다간 우린 완전 끝장이라고. 왜 빈둥대는 거야?"
"빈둥대지 않았습니다."
"풀은? 풀은 어딨어?"

미하일은 작은 단지에 든 풀을 가리켰습니다. 세묜은 기가 막혔지요.

"저걸로 마을 하나 밖에 못 붙이네."

그때였습니다. 거물의 비서가 찾아왔습니다. 일을 독촉하러 온 줄 알고 놀란 세묜에게 비서가 말했습니다.

"포스터 붙였어요? 아직 안 붙였군요. 잘 됐습니다. 그건 필요없고 이 해명서나 동네에 붙이시오. 어서."
"네?"
"거물께서 모함으로 부정축재했다는 누명을 쓰고 긴급체포되셨소이다. 현재는 출마가 불투명하니 포스터는 붙일 필요가 없겠소."

3.
하루는 여자 정치가 하나가 BMW를 몰고 나타났습니다. 미하일은 넋이 나간 듯이 여자 정치가를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도 정치가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완전히 몰락한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았나요?"
"완전히 몰락했었죠."

여자 정치가는 한탄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유산은 커녕 빚더미에 앉았습니다. 완전히 거리에 나앉을 판국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신세가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저는 아버지에게 후원을 했던 사람들을 찾아가 이번에는 내게 후원을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이익을 지켜줄 자신이 있다고 했고, 그들은 제 요청을 받아들였지요. 이번 선거에서 당선되었습니다. 이제는 탄탄대로를 걷게 될 것입니다."

4.
미하일은 갑자기 세묜에게 작별인사를 고했습니다. 놀란 세묜에게 미하일이 말했습니다.

"저는 이름을 말씀드릴 수 없는 정계의 배후 밑에 있던 암살자입니다. 정치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제 임무였습니다. 어느날 저는 한 거물 정치가의 목숨을 가져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거물 정치가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린 딸이 정치계에 입문하기 전에는 차마 죽을 수 없다고 사정하는 바람에 저는 마음이 약해져서 그냥 돌아갔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노하셔서 다른 암살자를 보내 그 거물을 죽인 뒤에 저를 알몸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세가지를 알아내면 돌아올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그게 뭡니까?"
"정치가에게 깃든 것은 무엇인가, 정치가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정차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 세가지였습니다."
"그것을 알아냈습니까?"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정치가에게 깃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묜 당신에게서 알았습니다. 나를 도울 수 없던 형편임에도 나를 데려간 그 힘. 그것은 표심이었습니다. 정치가에게는 표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표심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죠."

"정치가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포스터를 부탁했던 거물에게서 알았습니다. 그 거물에게는 암살자의 표식이 붙어 있었죠. 그것은 정치 생명이 다 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붙을 수 없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정치가에게는 자신의 당락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정치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그것은 오늘 온 여자 정치가 때문에 알았습니다. 바로 그 여자의 아버지가 제 청부대상이었습니다. 저는 그 거물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여자 정치가는 아버지가 없어도 건재하군요. 그래서 알았습니다. 정치가는 후원으로 산다는 것을."

미하일은 말을 마치고 떠나갔습니다. 세묜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습니다.

"쯧쯧, 뭘 모르는군. 정치가의 마음 속에 뭐가 깃들었느냐고? 협잡과 위선이야. 난 위선을 떨려고 널 구한 거였어. 잡혀간 거물이 금방 풀려난 건 모르나봐. 정치가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처벌'이라고. 정치가는 후원으로 사는 게 아니야. 이익으로 사는 거지. 또 쫓겨나겠네. 그나저나 저 인간 저렇게 그냥 가버리면 난 뭐야? 남은 것도 없고. 빌어먹을."












원작은 이걸로 보세요.

톨스토이 단편선 - 10점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인디북(인디아이)

덧글

  • 아브공군 2009/08/16 22:54 #

    .........(짝짝짝)
  • Allenait 2009/08/16 22:56 #

    아. 멋진 패러디입니다.
  • shaind 2009/08/16 23:02 #

    아 이 유명한 이야기를......



    그런데, 문세광의 진명(眞名)이 실은 미하일이었던 겁니까?(도망간다)
  • asianote 2009/08/16 23:04 #

    또 이해하지 못한 1인. (갈수록 asianote 본인의 지적 수준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하게 됩니다. OTL)
  • 초록불 2009/08/16 23:59 #

    앗? 어디를요?
  • 사유 2009/08/16 23:06 #

    이...이건!
    톨스토이쨔응
  • Ezdragon 2009/08/16 23:15 #

    브라보!
  • 슈타인호프 2009/08/16 23:26 #

    앗.....제가 가진 것과 같은 버전의 책이군요^^
  • 우기 2009/08/16 23:57 #

    우왓 정말 옛날에 세계명작전집으로 읽었던...

    훗날 보니 동화라고 하기엔 무리인 단편인데 왜 그게 동화에 포함되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오타입니다. 미하일을 넋이 나간 듯이 --->미하일은 넋이 나간 듯이
  • 초록불 2009/08/16 23:59 #

    저는 동화로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 배둘레햄 2009/08/17 01:27 #

    동감하는 2인...;;;;
  • Laputian 2009/08/17 01:03 #

    달콥씁쓸한 패러디네요. 재밌게 봤습니다.
  • 액시움 2009/08/17 02:28 #

    실제로 촛불시위 때는 컨테이너로 심시티 해놓고 본진에서 버티던 양반들도 지난 재보궐선거 때는 그야말로 천장이 부서져라 펄쩍 뛰었지요.
  • 다복솔군 2009/08/17 04:02 #

    원작보다 낫네요 = 타앙. 사실 톨스토이를 싫어해서..
  • 네비아찌 2009/08/17 10:28 #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2009/08/17 10:56 #

    세묜만 낚였네요;;
  • 새벽안개 2009/08/17 15:32 #

    정말 재밌군요. 웃다가 눈물이 찔끔 났습니다. ㅋㅋ
  • 작무 2009/08/17 17:00 #

    이게바로 걸작!
  • 루드라 2009/08/17 20:43 #

    윗 분 말씀에 100% 동감!
  • 어릿광대 2009/08/17 21:07 #

    여성정치인하고 거물정치인하고 미하엘의 정체는 누군지 알겠는데 나머지는 누군지 영 감이 안오네요..
    하지만 이글 정말 명작이네요
  • 초록불 2009/08/17 21:09 #

    아니.. 정체라니요...^^
  • 어릿광대 2009/08/17 21:25 #

    쓰고보니 이상하게 달았습니다(쿨럭)
    여성정치인하고 거물정치인하고 미하엘을 보니까 갑자기 떠오른 인물들이 생각나서요 ㅎㅎ
  • 진주여 2009/08/18 09:11 #

    천사이야기 ㅇㅅㅇ;
  • 검투사 2009/08/18 19:20 #

    http://opencast.naver.com/SP260/110 에 소개합니다.
    이 글은 "필히" 소개해야겠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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