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가 컨셉을 완전히 잘못 잡고 광고를 했다.
블록버스터니 리얼액션이니 하는 말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 말이 못 되고, 그냥 은행털이범과 호텔종업원 사이의 사랑 이야기로 읽어야 하는 영화다.
액션 카리스마 조니 뎁! 정의는 죽었고 세상은 그를 원한다!
푸하하, 순 엉터리 카피다. 이 영화에는 정의도 없고 세상이 원하는 것도 없다. 존 딜린저는 시민들에게 호감을 사고 있는 도둑이긴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가 무슨 빈민을 구제하는 영웅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미래에 대한 아무 생각없이 은행을 털며 인생을 즐기는 도둑일 뿐. 그러나 그가 빌리 프레쳇을 만나면서 로맨스가 시작된다.
빌리가 존에게 급격히 빠져든다고 생각할 여지도 있는데, 이건 그야말로 나쁜 남자 신드롬. 빌리는 만년 하위직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배운 것도 없는 인디언 혼혈. 그녀 앞에 나타난 남자는 미래를 보장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시카고 최고로 잘 나가는 미남 부자인 셈이다. 어찌 모험을 걸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구나 자신에게 홀딱 빠진 것을...
이 로맨스는 어찌보면 한국 로맨스에서 흔히 보는 그런 장면의 연출과 같다. 잠시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했으나 그대로 집으로 가버린 여자. 분명 그런 경험을 처음 했을 것 같은 존은 여자의 직장인 호텔로 쳐들어간다. 그저 "나한테 이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는 닳고 닳은 대사가 나오지 않을 뿐, 연상은 당연히 그렇게 흘러간다. 그러니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도 제발 그런 짓을 굳이 확인 좀 해주지 않았으면...
워낙 지루하다느니, 재미없다느니 하는 말을 듣고 조금은 걱정스런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왜들 그랬는지 이해가 될 듯도 하다. 액션영화 구경하러 갔다가 무늬만 액션인 로맨스 영화 보려면 그런 마음이 절로 생길 것 같다.
존 딜린저의 연인 빌리 프레쳇을 연기한 마리안 코티아르.

아내는 보는 내내 윤미래가 생각났다고 하는데, 그러고보니 무척 닮은 것 같다.
존 딜린저를 쫓는 수사팀장 멜빈 퍼비스 역의 크리스찬 베일은 약간은 복합적일 수 있는 멜빈의 역할을 완전히 수행했다고 보기가 좀 그렇다. 존에 대한 애증이랄까, 그런 것을 표현하려는 듯한 마지막 장면은 오히려 감점 요인이었다. 차라리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이었다면 일관성이 있어서 좋았을 것을. 자기 역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한 마지막 모습이었다.

빌리의 모습이 나온 두번째 컷은 둘이 처음 만난 커피숍에서의 모습이다. 여기 대사도 좋다. 도망치던 존이 전화를 걸어 자신이 지켜준다고 말하는 장면도, 호텔에 쳐들어가 당신을 모른다고 하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읊는 대목도. 시간이 아까워 잠을 잘 수 없다고 말하는 해변 신도 뻔하디 뻔한 장면이 담담한 연출 덕분에 닭살스럽게 보이질 않는다.
이런 것들을 느껴라, 라는 형태가 아니라 어찌보면 평범하게 그려낸다. 그런 연출은 이 영화를 고전 영화처럼 보게 만든다. 그러나 역시 그런 잔잔하다면 잔잔한 플롯이 액션 영화를 기대하며 간 사람들에게는 지루함을 보태는데 한몫을 했을 것 같다. 하지만 로맨스 영화로 본 나는, DVD 나오면 한번 더 보고 싶다.
감독은 마이클 만. <히트>와 <콜래트럴>의 감독이라고 하는데, <콜래트럴>은 보지 못했고 <히트>는 보면서 세상에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를 데리고 영화를 이렇게 못 만들 수 있구나, 라며 지루해서 죽을 뻔했던 기억만 난다. 그런 쪽보다 로맨스에 소질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참, 그러고보니 심하게 코를 골면서 자던 아저씨가 한 분 있었다. 8천원 내고 두시간여를 시원한 곳에서 자러 들어왔나 싶더라.
태그 : 영화







덧글
anaki-我行 2009/08/20 20:27 # 답글
보통...마이클 만 아저씨 영화는 '총격전' 하나만 기대하고 보러 가죠...;;;전 보러 갈까 말까 생각 중인데...
근처 세 개 극장에서 23시 정도에 한 번 밖에 안 해서 고민 중입니다.
초록불 2009/08/20 20:30 #
총격전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 신선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校獸님ㄳ 2009/08/20 20:29 # 답글
무심코 내린 댓글란 그림이 귀여워서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친한 사람이 봐서 흥미가 가던 영화인데 소갯글 보니 볼까 말까 다시 고민이 되는군요.
초록불 2009/08/20 20:31 #
댓글이다~고맙습니다...^^
갱스터 로맨스라고 쓰긴 했지만 그냥 갱스터 무비라고 생각하고 편안히 보시면 좋을 영화입니다.
회색인간 2009/08/20 20:38 # 답글
솔직히 실제 존 딜린저도 잡혔다가 탈옥 뒤 얼굴을 바꾼 채로 살다 내연녀의 신고로 에프비아이의 총격에 사망합니다. 얼굴이 너무 틀려서 실제 존 딜린져인지 알기 위해 지문 검색을 했다는 일화가 있죠.
이준님 2009/08/20 21:06 # 답글
사실 저 시대는 어떤 나라의 정치깡패가 미화되는 시대처럼(야인시대 작가는 자폭하라) 묘사되는 경향이 있어요. 페이 더너웨이와 워렌비티가 나온 "보니와 클라이드"(하루살이의 생활 신조인 "우리에겐 내일이 없다"라는 제목이 더 유명한)도 저 시대를 저런 식으로 다루었습니다.ps: 오래전에 똑같은 주인공으로 스티븐킹이 단편을 냈지요. --;;;
존 딜린저는 탈옥후에 선풍기 아저씨처럼 얼굴 성형수술을 하다가 극장에서 벌집이 됩니다. 도시전설에 의하면 죽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FBI는 개망신을 피하려고 그 사람이 존 딜린저인것처럼 선전하고 진짜는 멕시코로 가서 늙어죽었나는 이야기. --;;
C문자 2009/08/20 21:12 # 답글
배우만 믿고 볼 생각입니다.
리체 2009/08/20 21:22 # 답글
아, 이준님이 말씀하신 단편이 모든 일은 결국 일어난다라는 단편집에 수록되어 있더군요. 지금 그 부분을 읽는 중이죠.ㅎㅎ 오래 전 단편이었군요.
초록불 2009/08/20 23:48 #
조금 설명을 추가해보았습니다. 파란색 글씨로요...
2009/08/20 21:27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초록불 2009/08/20 22:04 #
아, 그런가요. 잘못 알았군요.
홍월 2009/08/20 21:58 # 답글
베일씨가 맡은 역이 실제로 이후에 자살한 인물이던가요,베일씨의 실수라기보다는 감독의 의도 혹은 실수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지 싶어요
초록불 2009/08/20 22:05 #
네, 그럴 수도 있겠죠.
Allenait 2009/08/20 22:34 # 답글
어째 영화가 금세 묻힌다 싶었는데.. 그런 거였군요
초록불 2009/08/20 23:48 #
아무래도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감성에는 좀 불친절한 영화라 생각합니다.
oldman 2009/08/20 23:06 # 답글
트레일러를 보고 신나게 때리고 부수는 영화인줄 알고 잔뜩 기대에 부풀어 들어갔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농락당했다고 느낄만한 영화였습니다. 저는 정신력이 많이 소모되긴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게 봤지요.어떻게 보면 평범하게, 혹은 건조하게 영화를 그려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초록불 2009/08/20 23:21 #
로맨스 코드로 읽으면 상당히 재미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쪽으로 광고해도 장사는 안 됐겠지만...
부여연 2009/08/21 00:08 # 답글
참 안타깝네요..;;히트때부터 시작된 마이클 만 감독의 "리얼리즘" 강박증이
취향에 안 맞으셨군요...
(하긴 취향에 맞는 사람이 오히려 더 적겠네요.)
제가 개인적으로 마이클 만 최고의 작품으로 생각하는
걸작 <콜래트럴>은 꼭 보시길 바랍니다.
사람에 따라 히트보다 낫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더군요.
전 이 영화 무척 재미있게 봤습니다.
마이클 만 감독 특유의 드라이한 연출이 정점에 다다랐다는 느낌이랄까..
사실 마이애미 바이스를 본 이후 이 만큼 드라이한 느낌의
영화가 또 나올 수 있을까 싶었는데.. 결국 마이클 만 본인이
마이애미 바이스를 깨버렸다랄까..
마이클 만의 오랜 팬들이라면 종합 선물세트 같은 이 영화에
아마 찬사를 보내실 겁니다.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라면 100% 만족도를 주는 총격씬은 당연히
"훌륭" 합니다. 전 세계에서 총격씬을 만 감독보다 잘 찍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만 감독 스스로가 만들어버린 총격씬의 "레전드" 인 히트 총격씬보다는
조금 못 합니다. 무엇보다 격발음과 섞여서 울리던 잔향, 그리고 총기 파열음이
히트보다 조금 못 하다는 느낌이랄까요. 그래도 이만한 총격씬 뽑아주는 감독
아무도 없죠..
근래에 쏟아져나오는 판타지류의 화려한 액션영화가 지긋지긋하시다면
이 퍼블린 에너미를 강추합니다.
초록불 2009/08/21 00:10 #
본문을 잘못 이해하신듯...^^저는 상당히 재미있게 보았고 DVD 나오면 한 번 더 보겠다는 입장입니다.
위장효과 2009/08/21 01:46 # 답글
취향 나름인데 만 감독의 로맨스 연출하는 스타일 자체가 그런 건조함이고 그게 좋아서 영화관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으니 말입니다-제가 바로 그런 경우.저도 이거 보러 갈 생각인데 초록불님 말씀하신 그 아저씨처럼 8천원 내고 두 시간내내 자게 될까봐 좀 시간뒀다 가려는 참입니다^^(요즘 밤에 잠을 못자니 원...)
초록불 2009/08/21 07:36 #
이런 스타일을 좋아한다면 재미있게 보실 겁니다...^^
소시민 2009/08/21 09:18 # 답글
홍보에 낚여 대실망한 1人입니다(...)
초록불 2009/08/21 09:20 #
저런... 간혹 과대포장해서 낚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가 딱 그 짝이에요.
catnip 2009/08/21 09:32 # 답글
크리스찬 베일 볼때마다 흠칫하고 놀랍니다.태양의 제국에 나왔던 그 꼬마가 저렇게 자랄줄이야..하는 심정이랄까요.
.....전혀 뜬금없는 덧글이 다시 등장했네요.
8비트 소년 2009/08/21 17:41 # 답글
조니뎁 나오고 예전에 살던 시카고가 배경이라길래 보러간 영화인데 마이클 만 감독의 드라이한 연출이 그런대로 맘에 들었습니다.근데 왜 저는 자꾸 신창원과 동거녀 생각이 나던지......
그리고 아무리 범죄자지만 대로에서 그렇게 쏴죽여도 되었던 건지 모르겠네요. 이건 경찰인지 깽조직 다툼인지......
초록불 2009/08/21 17:54 #
그렇죠. 아무래도 때가 때인 1933년...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밑에 있던 때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