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시대 사랑 이야기 한토막 *..역........사..*



1.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삼국 시대 이야기가 오직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만 전하는 줄 아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잘못된 상식이다. 가령 선덕여왕을 사랑했다는 지귀설화는 고려시대에 쓰인 <수이전>에 전하는 이야기이고, 김유신이 말머리를 베고 기녀 천관을 버렸다는 그 유명한 이야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것이며, 백제왕을 검무를 추다 죽였다는 황창랑에 대한 이야기도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무예도보통지> 등에 전하는 것이다. 이처럼 삼국시대의 전설은 여러가지 책에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그럼 전설 뿐인가? 아니다.

삼국시대를 다룬 기본 역사서 중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삼국사절요>이다.

2.
이 책은 1476년 12월에 서거정徐居正 등이 완성한 것인데, 삼국의 역사를 편년체, 즉 연도순으로 작성한 것이 특징이다. 한 해에 일어난 일을 삼국 모두에 걸쳐 기술하고 있다. 이 책에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없는 이야기도 들어있다. 가령 법흥왕 25년에 신라는 아시량국阿尸良國을 멸망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나라는 아라가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역사책에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그 이야기를 추석을 맞이해서 해볼까 한다. 약간 내 맘대로 각색이 되어있음을 양해하기 바라며...

3.
진흥왕 때의 일이다. 신라 어느 마을에 친한 관원 둘이 살았는데 동시에 아이를 낳았다. 한 집은 아들이었으니 그 이름을 백운白雲이라 지었고, 다른 집은 딸이었으니 그 이름을 제후際厚라 지었다. 그리고 두 아이가 크면 결혼을 시키리라 굳게 약조를 하였다.

백운은 나이 십사세에 화랑의 으뜸인 국선國仙이 되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있었던지 열다섯에 그만 맹인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장님 사위를 얻을 수 없다 생각한 제후의 집에서는 제후를 무진태수茂榛太守 이교평李佼平에게 시집 보내고자 했다.

제후는 원치 않았으나 부모의 뜻이 완강해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에 제후는 몰래 백운을 만나 말했다.

"첩이 그대와 동시에 태어나 부부가 되기로 약속한 지 오래입니다. 이제 부모님이 다른 데로 출가시키려 하니, 이를 따르지 않으면 불효인지라 어쩔 수 없이 무진으로 가기는 하겠습니다. 무진으로 떠난 뒤에야 첩의 생사는 첩이 결정하는 것이니 공이 신의를 지키신다면 첩을 찾아와 주십시오."

오오, 당찬 아가씨. 제후는 무진으로 간 뒤에 이교평에게 혼인 날짜를 연기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혼인은 사람의 도리 중 그 시초에 해당하니 길일을 택해 행해야 합니다."

이교평이 그 말을 따르느라 혼인 날짜를 뒤로 미뤄놓은 사이에 백운이 무진 땅으로 와서 제후와 함께 산 속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산속에서 산적(원문에는 협객俠客이라 나온다)을 만나고 말았다. 눈이 먼 백운이 산적을 어찌 당하랴. 속절없이 제후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때 백운의 무리 중에는 김천金闡이라는 용사가 있었다. 용력이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도 능숙한 사람이어서 산적을 쫓아가 죽여버리고 제후를 되찾아 왔다.

이 때가 진흥왕 27년(566). 이 사실을 전해들은 진흥왕은 세 사람에게 모두 작爵 3급級을 내렸다. 어려서 정해진 약속을 지킨 것이 가상하다는 뜻이었다.


4.
후일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진흥왕이 잘못했다고 질책하는데, 고지식한 유교 잣대가 동원된 탓이다. 제후가 백운에게 몰래 말한 것은 외간남자와 이야기를 나눈 것이니 예를 벗어난 것이고, 백운과 달아난 것은 간통과 다를 바 없는데다가 산적에게 잡혀 가고도 자살하지 않았으니 절개도 없다고 비난하며, 이런 사람에게 벼슬을 내려서는 안 되었다고 말한다.

조선 시대보다 삼국 시대가 더 인간적인 시대였던 것 같다.

덧글

  • 서린 2009/10/02 17:28 #

    안정복 , 마치 요새 시대의 리플러 보는 느낌이군요.

    '성인이 아니자, 내게 까임 당할 지어다.'
  • 월광토끼 2009/10/02 17:32 #

    조선 시대보다 삼국 시대가 더 인간적인 시대였을 것 같다는 것에 매우 동의합니다.
  • Silverfang 2009/10/02 22:26 #

    저도요. :)
  • 슈타인호프 2009/10/02 17:52 #

    문제는 "인간적"이라는 상황은 시스템 부재로 인하여 "힘 있는 놈 X리는 대로-_-"로 연결되는 경우가 매우매우 많다는 거라서요...;;;
  • Allenait 2009/10/02 18:07 #

    ..시대마다 관점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 열쇠수색자 2009/10/02 18:40 #

    가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제목에 동의합니다
  • dunkbear 2009/10/02 18:43 #

    어차피 "힘 있는 놈 X리는 대로" 상황은 삼국시대나 조선시대나 매일 반 아닐지... ^^;;
  • 네비아찌 2009/10/02 20:01 #

    "인간적"이라는 말에 양면성이 있다는 슈타인호프공 말씀에 동감입니다.
    그런데 백운은 진흥왕 시기의 국선 출신이라면 역시 진골 왕족이었겠으니
    진흥왕 입장에서 보면 왕족은 아닌 걸로 보이는 이교평보다는 백운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겠죠.
  • 초록불 2009/10/02 20:04 #

    그건 글쎄요...입니다. 힘이 있는 집안이어서 그랬다면야 애초에 제후의 집안에서 딸을 이교평에게 보내려 할 이유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 들꽃향기 2009/10/02 21:09 #

    맹인임에도 약속을 지키겠다는(물론 사랑이나 정도 있었겠지만) 제후의 선택이 빛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안정복 아저씨는 가끔 보면 성리학 골수의 성향을 보이는데...;; 이런분을 가지고 실학의 비조라고 함부로 추켜 올리는 것도 참 곤란할듯 =_=
  • 이야타 2010/01/31 22:09 #

    이미 올라온지 꽤 된 포스팅에 뒤늦게 뻘댓글 다는 거라

    못보실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작년에 공무원 시험 준비 세계에서 꽤 유명한 국사 강사님께서

    (사학과 출신이고 전공이 조선 후기였다더군요) 말씀하시길,

    요즘 학계에서 안정복은 실학자라기보다는

    보수 성리학자라고 보는게 옳다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네요.

    그래서 국가직 문제에도 안정복의 저서는 실학계통이 아니다라고 나왔고요;;
  • 反영웅 2009/10/02 21:52 #

    정말 요새 한국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같은 한국사라도 시대에 따라서 사회기풍이 확연히 차이가 나더군요.
    시대별로 비교해 볼 때마다 참으로 흥미로운 우리나라 역사입니다. 허허허.
  • LVP 2009/10/02 22:38 #

    저런 얘기도 있었군요.

    신라시대의 러브스토리는 가실 이야기밖에 모르는지라 'ㅅ';;;;
  • 초록불 2009/10/02 22:50 #

    잘 모르시는 분이 계셔야 애써 포스팅한 보람이 느껴지지요...^^;;
  • 수룡 2009/10/02 23:15 #

    요즘 조선시대 책 읽고 분노하고 있었는데, 신라시대의 정상적인-_- 얘길 들으니 조선시대에 더욱 분노가...
  • 이준님 2009/10/03 05:31 #

    ... 소싯적 계몽사에서 나온 "한국사 이야기"에 소개된 이야기군요.

    ps: 어떤 괴서에서는 저 이야기를 그대로 도미와 도미 부인 이야기에 대입한 경우도 있더군요.(그 버젼 도미 설화는 도미가 한쪽 눈을 다시 찾고 --;;;; 장수왕과 마누라와 함께 개로왕의 처형식에 참석하는 결말이었다는)
  • 역사관심 2011/10/15 03:55 #

    삼국사절요 한글번역판을 구입하려고 뒤지던 중, 초록불님의 예전 포스팅을 보게 되었습니다. 더욱더 읽어보고 싶어지는 글이군요.

    확실히 삼국-고려시대가 훨씬 인간미 넘치던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저 '무진'은 혹 도가니의 무대인 그 무진인가 궁금증도 일어나는군요.
  • 초록불 2011/10/15 09:48 #

    그럴 리는 없겠죠...^^

    도가니의 무진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 역사관심 2011/10/15 10:57 #

    그렇군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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