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글 *크리에이티브*



1.
모 님이 말했다.

"다음 단편집에 들어갈 글은 좀 쉽게 써."
"네? <구도> 말인가요? 그게 어려웠나요?"
"어렵지."

쭈삣거리면 말해본다.

"저기, 평은 그래도 괜찮은 편 아니었을까요?"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잖아. 편하게, 쉽게 좀 쓰지?"

2.
예전에 <미래경찰 피그로이드>를 웹진에 연재할 때, 전반부 전개에 대한 비난이 있었다. 편집자에게 하소연했다.

"그 허술한 부분은 후반부 반전에 대한 복선이라고 이야기해줘야 할까요?"
"그냥 내버려두세요. 일일이 신경쓰지 마세요. 어차피 후반부 연재될 때면 알게 될 건데요, 뭐."

이 경우, 불행은 후반부 연재 전에 웹진이 문을 닫아버렸다는 점. 결국 거기까지 읽은 독자에게는 엉성한 추리가 있는 소설로 보이게 되고 말았다. (나는 일전에 이 블로그의 신뢰도를 그때 연재분으로 판단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다) 이때문에 단행본 낼 때는, 여기 복선 있어요, 여기도 복선 있어요...라고 외치는 위축을 가져왔고, 한 독자 분으로부터는 너무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어서 흥미가 반감했다는 또 다른 평을 받고 말았다.

3.
좌백님은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하나의 글 속에 여러가지를 담고 그 속의 속까지 볼 수 있는 독자에게는 그곳까지 보게 해주는 것에 대한 이야기. 그렇다면 나의 문제는 겉의 이야기를 타고 흘러도 충분한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내게 있어서 역사 소설이 갖는 한계점은 전근대의 인물들이 근대적 사유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것이 반칙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 사유는 항상 직접적인 형태가 아니라 하나의 알레고리로 등장하게 되는데, 여기까지 쫓아오기가 만만치 않은 문제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이런 문제는 다른 역사 소설이나 무협 소설을 가지고 논하면 매우 재미있을 텐데, 이 글은 그냥 넋두리이므로 그런 부분은 휙 건너뛴다.)

11월에 나올 신작에서도 똑같은 문제로 고민했는데, 그 결과물이 어떻게 읽히게 될 지 나름대로 흥미진진하다.

4.
그래서 문제는 어디쯤에 가상의 독자군을 설정하는가에 달린 셈이다.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는 작가들이 자리매김하는 그 쯤에 똬리를 틀어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타협"이 아니라 "기술"로 올라가야 한다는 점에서 아직 가야할 길이 멀어보인다. 하지만 아마도 그것을 "기술"로 습득하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기만해서 "타협"하는 일은 평생 하지 못할 것이다.

니체는 그러지 않았던가. 백 년 후에 자신의 글의 진가를 알아볼 사람이 나올 것이라고. 백 년 후에 글이 살아남을 것인가가 문제기는 한데, 늘 말하듯이 작가의 힘은 "뻔뻔함"이고, 그래서 나도 내 글이 세월을 뚫고 살아남으리라 믿어버리고 만다.

덧글

  • 대도서관 2009/10/14 09:15 #

    ' 전근대의 인물들이 근대적 사유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것' 이 부분에 무척 공감이 가네요. 이고깽 양판소에서 '현명한' 현대인이 '야만적인' 중세인을 교화시킬 때 들던 의문입니다...

    2번...그..세상은 넓고 사건은 많다...군요ㅠ_ㅠ
  • 치오네 2009/10/14 09:25 #

    전근대의 인물들이 근대적 사유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것은 반칙- 말씀하신 것과는 좀 다른 것 같지만... 예전에, 鄒容을 주인공으로 짧은 소설을 끄적거렸던 적이 있었는데, 그 한계에 딱 도달해 버렸습니다. 추용을 좋아하긴 하는데, 2000년대의 제가 추용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지라... 추용이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쓸 때면 계속 아, 이건 뭔가 아닌데 하고 괴로워했었거든요.
  • 초록불 2009/10/14 09:35 #

    특히 역사적 인물을 그의 행동과 어긋나게 만들고자 하면 더욱 어려워지죠. 스코트가 역사상의 주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으면 안 된다고 말한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죠...
  • 슈타인호프 2009/10/14 09:44 #

    그래서 전 소설을 쓸 때는 그냥 "제가 보기에 즐거운" 수준으로 써버리고 맙니다--;;
  • 초록불 2009/10/14 09:52 #

    에... 그거야 물론 저도 "제가 보기에 즐거운" 수준으로 쓰죠...^^
  • 파리13구 2009/10/14 09:57 #

    어떤 영화나 소설을 보면,,,

    당대의 독자가 아니라, 미래의 독자를 위한 작품들이 보이는데요,

    당시의 비평이나, 독자들의 반응은 불쾌함을 동반한 재앙에 다름아니지만,

    그런 작품들이 결국, 시대를 초월한 명작의 신전에 안치되는 것을 보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무튼, 글의 생명력은, 세월의 질서를 거스를 수 있는 능력이라 보는데요,

    세월 앞에서,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그 세월의 힘에 반항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걸작이 가진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초록불 2009/10/14 10:08 #

    그러나 핵전쟁이 일어나 다른 작가들의 글이 다 재로 변하고 제 작품만 살아남아야... 가능해질 일일지도... (먼산)
  • 허안 2009/10/14 10:06 #

    아멘
  • 초록불 2009/10/14 10:08 #

    나무아미타불...
  • 사발대사 2009/10/14 10:27 #

    으음... "구도"가 어렵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는데요....

    저같이 역사에 무지한 사람도 진시황과 자객 형가 얘기는 알고 있었는지라...
  • 초록불 2009/10/14 10:28 #

    다음에 한 번 말씀드리죠...^^
  • Niveus 2009/10/14 10:40 #

    내 작품은 시대를 뛰어넘을 작품이다~ 인걸까요.
    확실히 너무 중간중간에 친절히 알려주는 작품은 재미가 반감되곤 합니다.
  • 네비아찌 2009/10/14 10:41 #

    초록불님 글은 깊은 고민과 사유 끝에 쓰시는 글이니까 오래 살아남을 거라고 저도 믿씁니다.
    '미래경찰 피그로이드'는 참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는 이렇게 그 작가이신 초록불님과 블로그 이웃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 초록불 2009/10/14 23:47 #

    고맙습니다...ㅠ.ㅠ
  • Allenait 2009/10/14 10:44 #

    베르나르 베르베르 단편중에 유사한 이야기가 있더군요. 처음 나올때는 별 관심 못받았지만 100년쯤 지나니까 '명작' 으로 취급받던..
  • 차원이동자 2009/10/14 17:46 #

    글을 맛보는 맛도 멋진데말이에요...
  • BeN_M 2009/10/14 18:19 #

    그 미래경찰 피그로이드란 작품
    게임잡지에서 봤던 거 같은데..(게임피아인가, 아주 예전에 본게 기억나는거 보니)

    울온 여행기도 그렇고 참 세상은 넓고도 좁은 법
    (아니, 원래 넓은데 이것이 인터넷의 힘인가?)
  • 초록불 2009/10/14 23:48 #

    게임피아 연재물이었습니다...^^

    그때는 중편으로 끝나서 구조가 많이 불안정했었지요.
  • 2009/10/15 15:2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9/10/15 15:27 #

    음.. 저도 어쩌다 볼 때가 있습니다. 책이 돌아다니는지 휴게소마다 바뀌는 것 같더군요. 어차피 아는 사람이 없어서 안 팔릴 겁니다...ㅠ.ㅠ
  • 2009/10/15 15:3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9/10/15 15:39 #

    크흑... 고맙습니다. 저도 뒷 이야기가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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