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생각난 김에 써보는 땜빵성 포스팅.
청이 병자호란을 일으켜서 후방의 걱정을 끊었다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식으로 큰 그림에서 간략한 정보만 가지고 말하면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쉽다.
청이 병자호란을 통해 얻은 이익은 굉장히 많은데 그 중 하나가 포로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 인구를 천백만 정도로 추정하는데, 기록에 남은 포로만 최소 50만 명 이상이다.
당대의 증언을 보면,
최명길 [지천집] - 50여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나만갑 [남한일기] - 심양에서 속환한 사람 60만. 몽고 군대에 포로가 된 자는 포함하지 않았다. (즉 60만 이상)
무명씨 [산성일기] - 심양 시장에서 팔린 사람이 66만. 몽고에 남아있는 자는 셈하지 않았다.
조금 후대의,
정약용 [비어고] - 심양으로 간 포로가 60만 명인데 몽고군에게 붙잡힌 자는 셈하지 않았다 한다.
이때 청의 인구가 50만 정도로 추정된다 하니...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잡혀가 노예가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도 없다. 청은 이들을 노동력과 재력(속환비는 천정부지였다. 과거 일이긴 하지만 중국인은 10냥에 속환되었는데, 조선인은 300냥이 기본이었다)으로 활용하며 중원을 정벌했다.
청의 인구 50만에 조선인 포로 중 최소 수 만명은 만주에 남았을 테니, 이런 주장을 통해 청이랑 우리랑 한핏줄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도 일리가 있을지 모른다. (믿으면 골룸)
조선의 패배는 뼈아픈 일이긴 하지만 명은 아예 정복당해 청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나 조선은 자치를 인정받았다. 왜 그랬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병자호란의 전개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은 아래 병자호란 태그를 이용해보세요.
덧글
아니면 '먹어봐야 나올껀 없는데 반항만 심한땅' 이어서?;
괜히 통치할려고 했다간 명과의 전쟁도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귀찮기만 할꺼같고 이런게 아닐까요?
어차피 숫자는 어디를 다스리나 똑같이 부족하니 이왕지사 큰 땅먹고 노는것도 좋을테고요..
그런데 인구 50만으로 명나라를 이길 수 있었단 말입니까?...;;;;
유목민의 특징이려나요...;; 어찌보면 이해하기 힘든..
...아 그래서 50만이 넘는 포로를 끌고 갔던거군요.... 50만의 생산인력을 통해서 군대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누군지는 몰라도 저 생각낸 사람 천재아닌가요?
그 대부분을 돈으로 바꿨을 겁니다. 수만 명만 노예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때 높으신 양반들이 자기 첩이니 자식이니를 공정가의 열 배도 넘는 가격에 되사는 통에 인플레가 생겨서 엄청난 비극이 발생하게 되죠.
돌아갈 수 없게 된 여인들은 자결하기도 하고...
국가단위의 인신매매군요...
소비자(?)의 구매력도 충분하니... 이거 참...;;
이 수치는 누르하치가 황제에 올랐을 때 추정치이며, 청은 정복지의 인구를 빠르게 흡수해 나갑니다. 누르하치가 처음 기병했을 때는 군사도 2만에 불과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중국 정벌에 들어갔을 때 군사가 대략 12만이라 추정하고 있는 것이죠.
1643년에 팔기를 가지고 역산해 본 인구 수가 50~60만 명 정도입니다.
전에 안정복 이야기도 했지만 여자가 적에게 잡히면 정조를 유린당한 것이니 당연히 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러자니 인구 문제와 사회 문제가 여간 심각해지지 않습니다. 물론 안전하게 숨어있던 양반님네들이 끌려간 처는 내치고 후사를 위해 새장가 가야한다고 주장하죠.
저는 민간어원설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화냥년은 화랑-화랭이 뭐 이런 계열에서 생긴 말이라는 주장도 있고요.
다만 앞서 댓글에도 단 것처첨 잡혀갔던 여인네들에 대한 문제로 시끄러웠던 것은 사실이에요.
생각해보면 고구려의 인구도 백제보다 적었다는 사실도 같은 유추가 가능하군요.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농경국가에 유목민과 섞여 사는 나라였고,
그에 반해 청은 거의 완벽한 유목국가였습니다.
예컨데 기본적인 인구증가비율이 다르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고구려가 백제에 비해 인구가 적었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삼국사기에 나오는 두나라 멸망 기록을 가지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백제는 망할 때 비록 당군이 수도만 점령했지만, 의자왕이 항복하고 나서
일시적으로나마 전 국토가 전부 항복을 함으로써 당이 쉽게 전체 인구를 파악했던데
반해, 고구려도 당군이 수도를 함락했지만, 거의 전 지역에서 항쟁이 일어났고 당군
의 인구파악은 이렇게 당군의 지배력이 수도를 비롯한 중심지대 일원에만 장악한 상
황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당군이 고구려 전역을 장악하지 못했기에 고구려 회복 전쟁은 물론, 대규모 유민이동
이 있을 수 있었고 이들의 수도 관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의 인구 추정과는 별개로 청에 대한 인식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것입니다.
몽고야 오래 싸웠다 쳐도 청은 거의 한방에 항복했는데 말이죠..
요동의 한족만 해도 천만은 넘어야 하지 않습니까?
청을 세운 종족은 건주여진인데, 위 책을 따르면 1577년 건주여진은 10만 명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부지역의 침략을 받았는데도 60만이나 끌려가다니.
사상자는 임진왜란 보다 적었다고는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