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계의 미아 - 김기림 *..문........화..*



김기림은 1908년생. 함경북도 학성군(성진시) 출신이다. 지금은 김책시.

김기림은 경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고자 했으나 일본인을 미워하는 백부가 만류하여(경성고보는 총독부 설립의 관립학교) 이용익이 설립한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에 유학을 갔고 니혼대학이라는 곳을 3년만에 졸업하고 귀국했다. 1929년 조선일보 공채 기자로 들어가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이은상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1930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박학을 바탕으로 한 현학적인 시들을 내놓았다.

그는 비평, 수필, 희곡,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글들을 내놓았으며 구인회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이태준, 박태원, 이상 등과 친하게 지냈다.

1935년 그는 스물아홉의 나이로 다시 일본 유학을 떠난다. 도호쿠[東北]제국대학 영문학과. 이때 조선일보 사주였던 방응모는 그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김기림은 처음에는 사양하였지만, 방응모가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지원하는 것이라 말해서 받아들였다고 한다. 사실 김기림은 부잣집 아들이어서 꼭 지원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런 도움을 받았기에 유학 후에 다시 조선일보에 복귀했고 폐간 때까지 근무했다.

나는 김기림의 시는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유학 기간에 쓴 시들은 마음에 들었다.



가마쿠라[鎌倉] 해변

함뿍 비에 젖은 나룻배 등불 하나
저무는 바다를 오락가락 밤을 짭니다.

소라처럼 슬픔을 머금고 나도
두터운 침묵의 껍질 속으로 오무라듭니다.




쥬젠지[[中禪寺] 호湖

한밤 숨을 죽이고 엎드린 호수 위에
으시시 가을이 추워 등불이 소름친다.

달 아래 두 볼이 홀죽한 나그네다려
딱한 이국의 소녀는 기어히
웃음을 두고온 데가 어디냐고 물어댄다.

'조국이 아닌 조국, 먼 희망의 무덤에―'
그림 파는 소녀는 아모래도 '키네마'보다는
자미없는 얘기라 하며 돌아선다.




1939년 일제가 조선문인협회라는 어용단체를 구성하는데 김기림도 여기에 이름을 올린다. 그러나 그의 구체적인 활동상황은 찾을 수 없다. 그는 창씨개명으로 곤노[金野]라는 성으로 바꾼다.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폐간되고 난 뒤 그는 작품 활동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자 친일작품을 내는 것을 거부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 후 해방까지 그는 아무 작품도 발표하지 않았다.

함경북도 경성에서 영어교사를 하며 지내던 그는 1944년에는 그마저 그만두고 고향집에 칩거. 해방 후에 서울로 온다. 서울에서 그는 임화가 결성한 조선문학건설본부에 참여한다. 여기에는 절친한 사이인 이태준, 박태원 등도 가입했다. 이 단체는 그후 조선문학가동맹이 되는데, 김기림은 좌파는 아니었기에 결국 빠져나오고 만다. 그는 가족들도 월남시키고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다.

보도연맹. 이것은 이승만 정권이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단체로 6.25가 터지자 집단학살대상이 되어버린 비운의 단체이다. 이들은 좌익에서 변절하였으므로 북한군에게도 처단의 대상이었다. 김기림은 그의 사상적 경향으로 보건대 해방 후 공간에서 일시 좌파 모임에 참여하긴 했지만 결코 좌익으로 볼 수 없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보도연맹에 이름을 올린 이상 전쟁통에 무사할 수 없었다.

그는 해방후 서울대, 연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평온한 나날은 오래 가지 않았다. 6.25가 일어난 것이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섰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이승만은 서울시민을 안심시킨 뒤 한강 다리를 폭파했다. 김기림은 남하하지 못했다. 6월 30일 친구를 만나러 나갔던 그는 고향 성진의 정치보위부 기관원들과 길에서 부딪쳤고 그 길로 끌려갔다.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가 북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 불행한 것은 그가 납북되었음에도, 그가 본래 북한 출신이라고 해서 남한 당국은 그후 그의 모든 문학적 흔적을 지워버렸던 것이다. 그의 문학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북한에도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고 말았다.

전쟁이 남긴 이런 비극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얼마나 많은 고귀한 역량이 이 전쟁으로 소멸되었던가. 이런 점에 있어서도 김일성은 전범으로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내용은 주로 이 책을 참고했다.

그들의 문학과 생애, 김기림 - 10점
이숭원 지음/한길사

덧글

  • 암호 2009/12/13 22:26 #

    사상은 다르지만, 남쪽을 선택한 것으로 인해 배신자 가까운 평가를 받은 김조이와 동일하군요.
  • 초록불 2009/12/13 22:29 #

    혹 모르는 분을 위해서...

    김조이는 죽산 조봉암의 아내로 역시 6.25 때 납북되어 생사를 모릅니다.
  • 암호 2009/12/13 22:38 #

    상세 설명 감사합니다.
  • 이준님 2009/12/14 00:00 #

    김조이는 능지처참될 가능성이 높죠. --
  • 피그말리온 2009/12/13 22:26 #

    고등학교 때 '바다와 나비'가 도저히 이해가 안되어서 이거 대체 누가 쓴거야 궁금해 했었는데 그 시인인가보군요.
  • 초록불 2009/12/13 22:27 #

    맞습니다. 교과서에도 실렸나 보군요.

    바다와 나비는 2차 일본 유학 후에 쓴 시로 자신의 처지를 담은 시라고 하지요. 전후 내막을 알면 이해할 수 있는 시입니다.
  • Semilla 2009/12/16 04:41 #

    앗 저 그 시 좋아했었는데 이 사람이 썼던 것이군요...!
    퍼즐이 맞춰진 느낌입니다.
  • 아롱쿠스 2009/12/13 22:54 #

    김기림님의 사례는 '납북'이란 용어가 더 좋지 않을까요!
  • 초록불 2009/12/13 23:02 #

    납북이죠. 아, 말미에 월북되었다...는 표현이 좀 이상하군요. 월북 되었으니까 납북인데...^^;;

    고쳐놓겠습니다.
  • 진성당거사 2009/12/13 22:59 #

    저런 식으로 역사에서 증발해버린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정지용도 거의 마찬가지 신세를 겪었지요.
  • 초록불 2009/12/13 23:05 #

    그렇죠. 정지용 이야기도 다음에 한 번 거론키로 하겠습니다.
  • 2009/12/14 02:1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9/12/14 08:55 #

    이것 참 씁쓸한 이야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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