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자........서..*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형이 물었다.

"어느 과를 가고 싶으냐?"
"글쎄, 뭐 어디를 가도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기왕이면 취직이 잘 되는 과를 가든가..."
라고 했다가 오지게 혼났다.

형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공부 안 할거면 대학은 뭐 하러 가."

사실 이렇게 난폭하게 말한 건 아니지만.

대학에 와서 처음 당황했던 것은... (웃지들 마시라) 숙제가 없다는 점이었다. 잔소리도 없었다. 공부하라고 말씀하는 교수님이 없었다. 강의가 끝나면 그걸로 끝.

1학년 첫 두 달을 어영부영 보냈다. 중간고사를 보았다. 솔직한 말로 어영부영 지냈어도 시험은 잘 칠 줄 알았다. (제 정신이 아니었지...)

간신히 학사경고를 면하는 저공비행. 우리 과 52명 중에 17명인가가 2.0 미만으로 경고 처리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아마 중간쯤 있었을 것 같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공부하고 싶어서 고3 담임교사가 그리도 반대하는 걸 물리치고 온 학과다. (부모님은 반대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게 뭐하는 짓이지?

4학년 2학기에도 나는 여러 과목을 들었고, 심지어 담당교수님으로부터는 4학년이 왜 이런 과목을...이라고 말하는 과목도 들었다. 어쩌면 일생에 단 한 번 나는 하고 싶어서 진짜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다.

취업에 대한 공부는 한자도 안했다고... 적어놓고 생각해보니 그런 건 아니었다. 대기업 입사 공부를 안 한 거지... 교직 과정을 이수하고 선생님이 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 부분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다시...) 사족으로 말하자면 고시 공부나, 공무원 시험 준비나, 입사 시험 준비하는 친구들도 당연히 많았다. 나는 그저 그런 공부가 하기 싫었을 뿐이다.

요즘 대학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다닐 때만 해도 대학의 공부는...

스스로 하는 거였다. 그리고 하고자 하면 참 다양한 테크트리가 펼쳐지는 곳이 대학이라고 생각했다.

시절이 좀 더 좋아서, 조금 더 공부에만 신경을 쓸 수 있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다행히 3학년 2학기부터는 그런 문제에 대한 부담도 덜 수 있었다. 그때부터 졸업할 때까지가 정말 행복했던 시간인 것 같다.

자기 인생은 자신이 개척하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일인데, 안다고 해서 쉬운 일은 아니다. - 나도 마찬가지고...

덧글

  • 뚱띠이 2010/03/24 15:18 #

    아웃사이더로 길을 잡아서 졸업후 13년이 넘은 지금은 엉뚱한 곳에서 빌어먹고 살지요....

    그때도 대학은 스스로 하는 곳이라고 누누이 말을 하고 들었었지요....

    늦은 밤이 되어도 꺼지지 않던 도서관의 불빛과 학생회관의 불빛은 지금도 눈만 감으면 환하게 제 머릿속을 비춥니다.
  • 초록불 2010/03/24 15:28 #

    그런 말을 해준 분들이 있다니 즐거운 학창 생활이었을 것 같습니다...^^
  • 초이스 2010/03/24 15:24 #

    요즘 강의를 나가보면, 한숨만 나올때가 많다...
    백여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 가운데 눈마주치고 들어주는 학생들은 불과 2~3명..
    사실 그 학생들때문에 강의한다...

    어차피 교양과목이라.. 듣는 친구들도 부담없겠지만..
    4년제 대학 졸업하고나서 최소한의 교양과 지식을 갖춰달라고 매시간마다 반복해도 들은 척도 안한다.. 쩝...
  • 초록불 2010/03/24 15:29 #

    후후, 이 친구야. 동양사 강독 들을 때 김한규 선생님이 화내신 일 생각 안 나냐? 너랑 나랑 바로 네가 바라보는 그 2~3명에 들었을 것 같다.

    하여간 네가 기어이 공부를 마친 걸 보면 내가 괜히 뿌듯하다.
  • santalinus 2010/03/24 15:49 #

    지금도 그렇습니다. 대학공부라는 것 자체가 원래 스스로 해야 하는 거죠.... 김한규선생님께 동양사 강독을 들으셨다니. 훌륭하신 선생님께 들으셨네요. 부럽습니다^^
  • 어릿광대 2010/03/24 16:10 #

    나름대로 전문대 다녔을때 공부 열심히 했던거 같은데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끝나면 도서관에서 실컷 책읽고 사정에 의해서 당분간 학생증 안나왔을때 책에 관심있는구절을 공책에 적고
    뭐 지금은 전공과 관련없는곳에서 일하지만 좋았던거 같네요..
  • 들꽃향기 2010/03/24 16:11 #

    말씀하신대로 대학의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봅니다. ^^ 그리고 그 기쁨을 누려왔다고 자부(?)하는 편이라 격하게 공감합니다. ㅋ

    뱀다리로 옵션과 같은 기쁨은 스스로 하는 공부를 공유할 수 있고, 서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죠. 사실 저는 그 기쁨을 별로 맛보지 못해서, 제 후배들은 맞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 Allenait 2010/03/24 16:30 #

    전 나름대로 제가 듣고 싶어하는 것만 듣고 있습니다.

    ...뭐 저도 지금 4학년인데 '4학년이 이런 강의를 왜..' 하는 소리도 들어 봤군요
  • Ya펭귄 2010/03/24 16:35 #

    뭐 개인적인 대학 경험으로는...


    대학은 (레포트를) 스스로 공부하(여서 푼 다음 제출하)는 곳이기는 했지요....


    .......



  • 夢影 2010/03/24 16:37 #

    숙제가 없다니요... 발표 하나 미친듯이 파고 숨 좀 돌리려 하면 레포트를 내주는 게 교수님들이거늘... 그치만 재미 있었죠. 스스로 책파고 공부하는 것도 재밌지만 교수님이 내주는 숙제는 왠지 도전과제 같아서 짜릿한 맛이....어중간한 세대라 대학 까짓거 설렁설렁 다녀 윗분 말씀처럼 교양머리 하나도 없는지라 도저히 어느 과 나왔다고는 창피해서 말도 못할 지경이지만 그렇게 공부하면서 정보 자체는 잊었다 해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정립해 갈 수 있었으니까 아깝지 않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이란 그래서 중요한 것 같아요. 특히 역사는 역사적인 지식이나 정보보다는 그를 통해서 세상을 인식하는 틀을 만들어가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치만 전 '강독' 수업은 싫었어요... orz 논어 맹자가 싫은 게 아니고 백화가 싫은 것도 아니지만... 이른 아침에 웅얼웅얼 한문을 읊으시면 자장가로 밖에 안 들리잖아요.
  • 초록불 2010/03/24 17:09 #

    요즘은 더 빡세게 돌아가나 봅니다...^^

    저 이야기는 1학년 신입생 때 처음 감상이니까요. (그때는 그래도 좀 널럴하지 않나요?)

    그리고 저희는 강독 시간에 사서를 읽어서... (먼산)
  • 잠본이 2010/03/24 21:15 #

    전공이나 과목에 따라 다를 겁니다. 쪽지시험으로 후덜덜하게 하는 과도 있겠고...
    특히 이공계는 과제와 실험의 연속으로 정신없다고들 하니 T.T
  • 夢影 2010/03/25 13:31 #

    에, 그러고보면 저도 1학년때는 너무 널널해서 내가 이 과를 잘못 선택한 건가 하는 생각을 했었네요. ㅡ,ㅡ;; 요즘 1학년들은 기본 수업(영어 수업에 한문이 아닌 한자 수업이라든가, 참고문헌 작성법, 레포트 작성법 등)만으로도 빡빡하게 돌아가는 모양이지만요.
  • Niveus 2010/03/24 20:07 #

    ...서류떼러 학교갔더니 마침 OT날이었는데 OT끝나고나니 줄줄줄 도서관으로 가더군요(...야)
  • 코토네 2010/03/24 22:02 #

    그러고보니 초록불님께서는 어떠한 계기로 역사학에 발을 들이밀게 되셨는지 무척 궁금해지는군요.
  • 초록불 2010/03/24 22:31 #

    저는 소설가가 되려고 사학과에 들어간... 주변에서 이해를 잘못하는 청춘이었지요. 사실 사학과 동기들도 글 쓰려면 국문과를 가야지, 왜 사학과를 왔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문학공부는 동아리에서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문학반에 들어갔는데...

    거기에서도 반절은 시위 관련으로... (먼산)
  • 현암 2010/03/24 23:02 #

    저는 역사가 좋아서 사학과 내지 역사교육과로 갈려고 했으나 어찌하다 보니 지금 교육학과에 와있네요.

    저도 어서 공부를 더 해야지요....
  • 초록불 2010/03/24 23:03 #

    좋은 학문이지요.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데는 교육심리학 공부한 덕을 많이 보았습니다...^^
  • 현암 2010/03/24 23:11 #

    복수전공으로 역사를 할 수 있다지만 그걸로는 제 성이 차지 않을것 같습니다. 대학원 과정이라도 밟아야 할까요.,...??
  • 초록불 2010/03/24 23:48 #

    그, 글쎄요... 그건 저로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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