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 뇌를 가진 사나이 *크리에이티브*



옛날에 머릿속이 온통 망상으로 된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이지 뇌가 완전히 망상으로 만들어진 사나이였습니다.

그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의사들은 그 아이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의 머리가 이상하리만큼 가벼웠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의사들의 예상과는 달리, 아이는 아름다운 올리브나무들이 햇볕을 받고 자라나듯이 쑥쑥 자랐습니다. 다만 크고 가벼운 머리 때문에 걸어다니기가 좀 힘들었을 뿐이지요. 걸핏하면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비틀거리며 떨어지곤 했으니, 참 보기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계단에서 천장으로 날아올랐다가 천장에 달린 연회등에 이마를 세게 부딪쳤습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공기가 새아나가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금방 바닥으로 떨어져버렸지요.

모두들 그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를 일으켜 보니 금빛 머리카락에 두세 개의 풍선껌 같은 망상 부스러기가 붙어있을 뿐 큰 상처는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의 부모는 아이가 망상으로 된 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모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그 아이 자신에게조차 그 사실을 감추었습니다. 그가 망상에 빠져 망가질까봐 두려웠던 것이죠.

아이는 이따금 부모이게 왜 전처럼 밖에 나가 동네 아이들과 놀지 못하게 하느냐고 묻곤 했습니다.

"누가 너에게 헛바람을 넣을까봐 그런단다."

어머니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그때부터 아이는 누군가가 자신을 유괴해 갈까 봐 겁이 나서 집 밖으로는 아예 나갈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아무런 불평도 없이 이 책 저 책을 읽으며 놀았습니다. 불행히도 그 책들의 지은이는 문군수, 최의사, 김쥬신, 덕박사 등이었습니다.

아이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에야 부모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무서운 선물에 관한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들은 지금껏 아이를 키우느라고 무던히 애를 썼으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 머릿속의 망상을 조금만 버려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호두알 크기만 한 망상 한 덩어리를 자신의 두개골로부터 뿜어내어 어머니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어머니는 그 댓가로 적지 않은 돈을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아이가 망상에서 벗어나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죠.

하지만 그는 머릿속에 들어 있는 황당한 망상에 정신이 팔려서 이 세상에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자신의 망상에 도취된 아이는 부모의 집을 뒤로 하고 정처 없이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망상을 마구 뿌려가면서 세상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만날 때마다 헛소리를 해대며 논박을 당해도 지치지 않고 똑같은 소리를 지껄여대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그의 머릿속에 망상이 무진장으로 들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할 것 같으면, 망상은 그가 쓰는 대로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그의 두 눈에서는 날이 갈수록 혼란의 빛이 생겨나고, 점차 카피-페이스트 밖에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유사역사학 신봉자들과 어울려 진탕 떠들고 욕을 해가며 놀음으로 밤을 새운 다음날 아침, 쓰다 버린 엉터리 역사책과 희미한 촛불 빛 속에 혼자 남겨진 이 불행한 사나이는 자신의 머리에 뚫려있는 커다란 구멍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망상 생활을 이제는 그만두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혼자 힘으로 돈을 벌면서 사람들과 떨어져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는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이제는 손을 대기조차 겁이 나는 환단고기의 망상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어느 몹쓸 친구 하나가 그가 혼자 사는 집까지 뒤를 밟아 쫓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망상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학자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좀 더 망상이 필요했던 나머지 친구의 뇌까지 손에 대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밤, 이 가엾은 사나이는 머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은 그는 달빛 속에서 외투 자락에 무언가를 감추고 허둥지둥 도망치는 친구를 보았습니다.

또 얼마간의 망상이 뿜어져나간 것이었습니다!

그 얼마 뒤, 망상 두뇌를 가진 그 불쌍한 사나이는 아름다운 금발 머리 소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나이는 그 소녀를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소녀 역시 그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사나이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대륙을 지배한 고조선과 환국과 배달국, 구리 머리에 쇠이마를 가진 치우천황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새처럼 인형처럼 사랑스러운 이 소녀의 손에서 망상은 잘도 녹아 사라졌습니다. 소녀는 끊임없이 환국의 역사를 듣고 싶어 했고, 사나이는 소녀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나이는 이 사랑스러운 소녀가 괴로워할까 봐 망상의 슬픈 비밀을 끝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린 굉장한 민족이죠?"

소녀가 물으면 사나이는 언제나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굉장한 민족이지!"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자신의 뇌를 조금씩 조금씩 덜어내고 있는 이 작은 파랑새에게 언제나 다정한 미소를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하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제는 좀 망상을 덜 꺼내야겠다고 다짐할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소녀는 팔랑거리며 그의 곁으로 다가와 귀엽게 재잘대곤 했습니다.

"당신은 굉장한 민족의 후예죠? 그러니까 내게 아주 비싸고 귀한 걸 사 줘요."

그래서 그는 다시 소녀를 위해 망상을 팔아치우고 그 대가로 값비싼 물건을 사들이곤 했습니다.

그런 생활이 2년 정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까닭을 알 수 없이 소녀가 죽었습니다. 이제 지니고 있는 망상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나이는 그 남은 망상을 쥐어짜 사랑하던 여인의 장례를 배달국 식으로 훌륭하게 치러 주었습니다.

은은하게 울리는 천부경 독경 소리, 치우천황의 모습으로 수놓은 붉은 천을 장중하게 둘러친 마차, 삼족오로 장식한 말들과 빌로드로 싼 환국의 청동 거울……. 참으로 성대한 장례식이었지만 사나이의 마음에는 차지 않았습니다.

이제 망상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는 남은 망상을 유사역사학 사이트에 헌납하기도 하고, 언론 방송이며 출판사며, 아무에게나 마구 주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장례가 끝나고 묘지에서 나왔을 때 그의 머리 속 망상은 거의 없어져 버렸고, 뇌라고는 스펀지 밥처럼 두개골 사이에 겨우 몇 조각 붙어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가엾은 사나이가 두 손을 쳐들고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가게마다 불이 켜질 무렵, 사나이는 어느 커다란 서점의 책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책장 안에는 철학책이며 역사책이며 여러 인문학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습니다. 사나이는 귀면와로 꾸며진 유사역사학 책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이 책을 사다 주면 얼마나 좋아할까?"

그는 중얼거리면서 빙그레 미소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소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책을 사기 위해 서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서점 뒤쪽 방에 있던 여주인은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달려나왔다가, 계산대에 힘겹게 몸을 기댄 채 멍한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사나이를 발견하고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사나이는 한손에 귀면와를 치우라고 우기는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을 여주인에게 내밀었는데, 피로 물든 그 손의 손톱 밑에 끼여 뽀글뽀글 소리를 내며 날아오르고 있는 것은 사나이의 두개골에서 긁어낸 마지막 망상 부스러기였습니다.




- 원작 : 알퐁스 도데의 <황금 뇌를 가진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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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김현 2010/04/26 17:20 #

    요 사이 부쩍 환빠들이 준동하는 느낌입니다. 흠...
  • 아빠늑대 2010/04/26 17:57 #

    최후의 발악 같지 않습니까? 마치...
  • 김현 2010/04/26 18:14 #

    회광반조군요. ㅋㅋㅋ
  • 들꽃향기 2010/04/26 17:24 #

    오늘도 쓰신글 덕분에 대차게 한번 웃고 시작하는 하루입니다. ㄷㄷ
  • 2010/04/26 17:2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10/04/26 18:01 #

    수정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치오네 2010/04/26 17:28 #

    어릴 때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 무척 무서운 동화였군요;;;
  • 프뢰 2010/04/26 17:35 #

    어릴 때 읽고 무척 무서워했었는데(...). 오랫만에 기억나네요.
  • 회색인간 2010/04/26 18:01 #

    ㅋㅋ 오랜만에 패러디 작업이시네요......
  • 까마귀옹 2010/04/26 18:04 #

    그런데 알퐁스 도데 자신이야말로 환빠 비스무리한 작자였다는 반전이 있지요. <마지막 수업>의 무대인 알자스-로렌 지역이 본래는 오랬동안 독일계 주민이 거주하고 사용하는 언어도 독일어가 우세한 것을 생각하면...
  • 초록불 2010/04/26 18:18 #

    http://orumi.egloos.com/3900110

    재밌게 보세요...^^
  • 김라면 2010/04/26 21:12 #

    그 아들인 레옹은 본격 파시스트였답니다.

    드레퓌스를 유죄로 몰아간 대표적 인사이기도 하구요~
  • hyjoon 2010/04/26 18:12 #

    덕분에 잘 웃고 갑니다. 알퐁스 도데의 '황금뇌를 가진 사나이'.....어찌보면 굉장히 무서운 소리지만 그 내면에 우리가 우리의 물질(황금)을 위해 정신(뇌)를 팔고 있다는 암시가 있는거 아닌가 싶어요.
  • snowall 2010/04/26 18:44 #

    음...
    "그냥 뇌를 가진 사나이"라면, 머리를 부딪쳤을 시점에 이미 죽었겠죠?
  • 차원이동자 2010/04/26 19:12 #

    하지만 그는 머릿속에 들어 있는 황당한 망상에 정신이 팔려서...까진 제이야긴데요...으허허헝!
  • 흑태자 2010/04/26 19:57 #

    원작은 머리에 망상대신 금이 있었죠
    아 좋은 패러디네요-ㅅ-
  • Initial_H 2010/04/26 20:55 #

    아 신나게 웃으면서 봤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원전은 저런데 이런 패러디가ㅠㅠㅠㅠ
  • 잠본이 2010/04/26 21:07 #

    >그러나 소녀는 사나이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대륙을 지배한 고조선과 환국과 배달국, 구리 머리에 쇠이마를 가진 치우천황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센스 대박 OTL
  • 초록불 2010/04/26 21:21 #

    감사합니다...^^
  • 청풍 2010/04/26 22:16 #

    그런데...누가 그가 팔아치우던 망상을 비싼값을 주고 사들였는지...ㅋㅋ
  • Allenait 2010/04/26 22:20 #

    어디서 보던 건데.. 했는데 도데의 황금 뇌를 가진 사나이였군요.

  • ArchDuke 2010/04/27 01:46 #

    유명하죠 이거
  • 가엘 2010/04/26 22:23 #

    이거 되게 재밌게 봤었어요. 비록 초중학생때 읽은거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지요.
  • 가엘 2010/04/26 23:09 #

    물론 이 글은 초록불님의 패러디지만요..(원작이 기억나서요.)
  • 나인테일 2010/04/26 22:52 #

    예전에 알퐁스 도데의 단편집을 한 번 읽어본 적이 있는데 이 양반이야말로 원조 치유계 소설 작가로 분류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은 덕스러운 생각이 들더군요... OTL..;;;
  • 을파소 2010/04/26 23:19 #

    하지만 현실에선 망상도 무한증식하는 거 같군요.
  • LVP 2010/04/26 23:54 #

    딴 건 다 좋은데, '카피페이스트'가 영 그렇다능 'ㅅ';;;

    ※당사 개집격상기념 뻘플. (!?!?)
    (http://www.coo2.net/bbs/zboard.php?id=qna&page=1&sn1=&divpage=2&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523)
  • 초록불 2010/04/27 00:02 #

    뭐, 자기들도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던 걸요.

    그나저나 찍히셨군요...^^
  • 대도서관 2010/04/27 00:01 #

    이 이야기 처음 들었을 때가 매우 어릴 때라서 트라우마가 생겼었습니다. 뇌를 긁어낸다니...ㄷㄷ;;
  • 초록불 2010/04/27 00:02 #

    저는 사실, 어디로 손을 넣어서 뇌를 꺼낸 건지 궁금했었지요.
  • draco21 2010/04/27 02:08 #

    무섭습니다. 상황도 그렇고.. 한사람 두사람 이렇게 나타나는걸 보니 더 그렇고.. ^^:
  • 炎帝 2010/04/27 09:10 #

    처음 제목을 보고 007의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패러디인가 했습니다.;;
    쩝, 논리야~ 시리즈 읽으면서 인상깊게 본 단편이었는데 그걸 까먹다니..;;;
  • 역사학자 2010/04/27 10:24 #

    옛날에 [황금 뇌를 가진 사나이]라는 글을 봤을땐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까 재미있네요.
  • 태극도사 2010/04/27 14:01 #

    케이펙스의 파랑새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은근히 작가적 소양과 자질을 갖추신 초록불님 언제 대박소설 하나 내시길 기원해용
  • matercide 2010/09/13 21:28 #

    우하하 어릴적에 황금 뇌를 가진 사나이를 읽으면서 기묘한 기분에 빠진게 떠오르네요. 패러디 넘 웃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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