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이 본 선조 *..역........사..*



선조 7년(1574), 선조의 나이 23세. 선조는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이에 승정원 우부승지로 있던 관직 10년차 이이 율곡(39세)이 <만언봉사>로 알려진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엎드려 살피옵건대, 전하께서는 총명하고 지혜로움은 많으시나 덕을 쓰심이 넓지 못하고, 좋은 말 듣기를 매우 좋아하나 많은 의심을버리지 못하십니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이 힘써 건의하는 것을 지나치지 않은가 의심하고,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는 자를 교만스럽거나 과격하다고 의심하십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명예를 얻으면, 그에게 당파가 있지 않은가 의심하고, 남의 죄와 허물을 공격하면 편파적으로 모함하지 않은가 의심하십니다. 더욱이 명령을 내리실 때면 말씀하시는 기풍이 곱지 못하고, 좋아하고 싫어함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율곡. 확실히 똑똑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선조의 저런 의심은 평화 시에는 그럭저럭 넘어살 수 있었지만, 이로부터 18년 후에 발생한 임진왜란을 맞이해서는 거의 광기 수준으로 발현되지요.

<만언봉사>의 마지막 대목에서는 군정의 개혁을 논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볼 것 같으면, 군정은 무너지고 모든 변방이 무방비 상태이니 만일 돌발사태라도 일어난다면, 비록 한나라 장량이나 진평이 지혜를 짜내고, 오기와 한신이 통솔한다 하더라도 거느릴 병사가 없는데 어떻게 혼자 싸울 수 있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마음이 오싹하고 두렵기 짝이 없습니다.

율곡은 군적을 제대로 정리하고 군포 징수의 폐단을 막고 장수의 생활을 보장하여 군졸을 착취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야 하며 병사들의 훈련 상태를 점검하여 장병을 포상하라고 말합니다.

여담이지만 이 다음 해에 김효원과 심의겸의 다툼으로 동인과 서인이 생겨나게 되고요.



[추가]
선조는 이이의 상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소의 사연을 살펴보니 요순 시대를 만들겠다는 뜻을 볼 수 있었다. 그 논의는 참으로 훌륭하여 아무리 옛 사람이라도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하가 있는데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까 어찌 걱정하겠는가. 그 충성이 매우 가상하니 감히 기록해 두고 경계로 삼지 않겠는가. 다만 일이 경장(更張)에 관계된 것이 많아 갑자기 전부 고칠 수는 없다.”

그러니 말은 들었지만, 고치진 못하겠다고 한 것이지요. 두달 쯤 후에 유희춘이 다시 이이의 계책을 시행하시라 재촉하였으나 선조는 가타부타 이야기를 하지 않았네요.

덧글

  • 진성당거사 2010/05/10 21:11 #

    글 잘 읽었습니다.
  • 초록불 2010/05/10 21:12 #

    어이쿠, 거의 실시간 댓글입니다...^^
  • 을파소 2010/05/10 21:16 #

    율곡이 정곡을 찔렀군요. 정확한 평입니다.
  • catnip 2010/05/10 21:17 #

    저 글을 본 선조의 반응이 궁금하네요..
  • 초록불 2010/05/10 21:27 #

    추가했습니다...^^
  • 곧은나무 2010/05/10 21:18 #

    선조가 뜨끔 했겠는데요.
  • ArchDuke 2010/05/10 21:19 #

    뭔가 저와 선조가 오버랩이 되면서 쓸쓸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 암호 2010/05/10 21:37 #

    결국 이이와 같은 가문 출신 인물이 선조의 광기로 인한 최대 피해자로 역사에 기록되니....
  • 위장효과 2010/05/11 08:03 #

    동시에 우리 민족 최대의 구원자로도 기록되지요...
  • 들꽃향기 2010/05/10 22:18 #

    어쩌면 선조도 율곡이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꺼리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하곤 합니다...ㅎㄷㄷ
  • hyjoon 2010/05/10 22:42 #

    율곡은 더 나아가서 아량부족, 불공정성, 지나친 승벽이 선조가 가진 세가지 병통이며, 신하들이 잘 따르지 않는 것은 스스로가 자초했다고 선조에게 직언했다고 하는군요. 율곡이 어렸을 때 이웃사람에 대한 평도 정확했던 것을 보면 확실히 사람 보는 눈이 날카로웠던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 네비아찌 2010/05/10 23:20 #

    저는 김성일이 선조에게 전하는 걸주와 같다고 했다가 하마터면 큰일이 날뻔한 에피소드는 알았는데, 율곡선생까지 선조의 단점을 지적할 정도였군요....
  • 2010/05/10 23:37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10/05/11 09:39 #

    선조의 경지에 오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 천지화랑 2010/05/10 23:39 #

    선조가 걸주라.... 그의 말희는 인빈김씨인가요 ㅎㅎ~
  • Mjuzik 2010/05/10 23:46 #

    와... 무섭네요;;;
  • aatheung 2010/05/10 23:54 #

    남명 조식의 상소도 있지요 ㅎㅎ
  • kumasoma 2010/05/10 23:59 #

    뭐 우리 선조님 덕에 왜란도 속수무책이구
    뭐 왜란 대비는 동인들 때문에 못했다고 쳐도
    이순신도 유배 보내시고 ㅋㅋ
    아 자기가 이순신한테 딸린다고 생각하나? =-=;;
    이성계처럼 반란 일으킬까봐? =-=;; 뭐 선조 성격하나는
    알아줘야 된다니까요''
  • 누군가의친구 2010/05/11 00:29 #

    여러가지 의미에서 율곡의 지적은 무서울만치 정확합니다.
  • 2010/05/11 00:4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10/05/11 09:41 #

    이 포스팅이라면 제 자료라고 하기도 어렵죠...^^;;

    가능하다면 출처와 같이 링크를 걸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때때로 글을 수정합니다...^^
  • 삼천포 2010/05/11 01:57 #

    놀라운 통찰력이군요
  • 마무리불패신화 2010/05/11 02:26 #

    역시 율곡입니다.ㄷㄷ
  • 일국지 2010/05/11 03:23 #


    당대 최고의 학자 율곡 이이 선생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여러모로 정가기 힘든 군왕 중 한명이네요.

  • 아빠늑대 2010/05/11 04:51 #

    의심의, 의심에 의한, 의심을 위한 정치.


    ...선조가... 멍청한건 아닌데... 분명히 아닌데...
  • 초록불 2010/05/11 09:37 #

    똑똑한 사람의 의심병이 더 무섭다는 것을 증명한 게 아닐까요...
  • 反영웅 2010/05/11 05:14 #

    율곡이 선조재위 기간 내내 살아있었다면 볼 만 했을 듯?
  • 회색인간 2010/05/11 09:26 #

    선조는 그놈의 의심병 때문에 인생 조졌죠. 문제는 지 인생만 조지면 말을 안하겠는데 지자식 게다가 이사람이 왕이야....그래서 백성 목숨까지 조졌죠....
  • 명랑이 2010/05/11 13:31 #

    고등학교때 국사선생님께서 저 분의 의심병 때문에 아들(광해군)까지도 고생했다고 하셨습니다만..
  • 베르디만세 2010/05/11 14:52 #

    오항녕이 쓴 <조선의 힘>에서는 선조가 그래도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바른 건의를 받아들일 정도의 판단력을 갖춘 임금이라고...워낙 선조를 조선을 말아먹은 임금으로 보는 것을 변호하고 있더라고요. 선조 시대 자체도 연산 이후 다 거덜난 조선을 물려 받은터라 당장 무엇을 쉽게 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하고요.

    선조도 참 다양한 모습을 가진 임금인데 그의 어떤 점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달라 보이고 그 시대도 다르게 받아들여지는것이 역사 공부의 재미라는 생각이 드네요.
  • 초록불 2010/05/12 00:59 #

    조선을 말아먹었다기보다는 장수들을 말아먹었지요...^^
  • Fedaykin 2010/05/11 21:21 #

    선조의 답변은 : ㅇㅇ

    이거군요. 선조가 너무 욕을 먹긴 했지만..그래도 나라 안망한게 어딥니까. (?)
  • 노송인 2010/05/11 21:25 #

    참. 좋은 글.(자료)를 보여주십니다. 이 자료의 原典(原文). 또는 원전을 볼 수 있는 주소를 알려주십시오.
  • 초록불 2010/05/12 00:58 #

    제가 본 것은 절판된 책입니다만

    http://sillok.history.go.kr/ 로 들어가셔서

    선조수정실록 7년 1월 1일자 기사 세번째를 보시면 되겠습니다.

    번역문은 물론 원문도 보실 수 있습니다.
  • 동굴아저씨 2010/05/12 00:05 #

    율곡 이이 曰 : 임금님아. 우리 이제 슬슬 군대좀 어찌해야 되지 않겠음?
    선조 曰 :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
    이정도?
  • 루드라 2010/05/12 18:32 #

    의심과 지나친 승벽 등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버릇이기도 했죠. 선조가 숭정제와 달리 망국의 군주가 안 된 건 조선의 사회 시스템이 군주의 절대독재가 아니라서 완충 장치 노릇을 해줬기 아닐까 싶네요.
  • 초록불 2010/05/13 01:12 #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 夢影 2010/05/12 22:13 #

    흐하. 선조가 좀 심하긴 하죠. 근데 저는 율곡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율곡이 좀, 스승이고 임금이고 제 눈에 안 차면 가차없이 혹독하게 말하는 사람이라서 사료만 읽어도 좀 무섭던데요. 어디서 슥삭 안 당한 게 신기할 정도. 게다가 프라이드도 엄청 강했던 거 같고... 왜 제 머릿속의 율곡은 엄청 재수없고 걍팍한 천재로 남아 있는 걸까요.
  • 초록불 2010/05/13 01:11 #

    천재들은 좀 그렇게 보이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