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과 친일파 *..역........사..*



이 포스팅은 아래 책을 정리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단군릉수축운동 - 10점
김성환 지음/경인문화사


중종 25년(1530)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강동군에 단군묘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북한이 주장하는 단군릉이 이것)

조선시대 유림들은 이 단군묘에 제사를 지냈는데(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단군을 이단시하거나 홀대했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강동현감이 주관하여 봄가을로 올렸다고 한다.

갑오경장 이후 제사는 더 진행되지 않았던 모양.

1909년 단군묘는 능으로 숭봉되었다. 하지만 수리는 이루어지지지 못해서(수리비로 중앙정부가 책정해 준 금액이 2천원~3천5백원이었지만 집행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후 단군릉은 점점 더 황폐회되었다. 그래서 단군묘인지, 단군릉인지 여전히 모호한 상태였다.

1918년 5월 단군교(대종교에서 갈라진 친일 종교)의 정훈모가 단군릉을 방문했을 때, 잡초가 무성해서 벌초를 부탁하며 재실에 사는 가람에게 몇십 전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단군교부흥경략)

1923년 강동 유림단체인 강동명륜회에 의해서 2백여 원을 갹출하여 담장과 문이 만들어지는데 , 이 당시 명륜회장은 강동군수, 즉 친일관료가 맡고 있었다. 이들은 내선일체, 동조동근론에 의해 단군을 이용하고 있었다.

1929년부터 평남유림연합회가 주도로 단군묘 수호계(본래 단군릉이라 불러야 하는데 여전히 묘라고 불리고 있음)가 조직되었는데, 평남유림연합회 역시친일단체였다. 이들은 1927년 강동명륜회의도움 요청을 받아들여 계를 만든 것이다. 수호계는 수호각 건립을 목표로 모금 운동을 벌인다. 그러나 2년이 지나도록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32년에는 강동군에서 단군릉수호각건축기성회가 조직되어 단군릉수축운동이 벌어진다. 평남유림연합회의 활동에 더 이상 기댈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 강동명륜회의 김상준과 강동군수 김수철이 앞장 선 것이다.

김상준은 평안도평의회원으로 역시 친일파였다. 1881년 생으로 소유하고 있는 토지만 150정보(당시 시가 5~6만원)에 소작인 80여명을 거느린 강동의 대지주였다. 한일병합 후 1911년에 강동군 초대 참사로 일제의 행정에 참여했으며 1912년에는 강동면장, 강동면평의원, 1916년에는 명치신궁봉찬회 조선지부 평안남도 군위원 등등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하고 있었다.

3.1운동 당시에 강동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노력한 바 있다. 특히 장남 김대우가 당시 경성공업전문대 학생으로 3.1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되자 자신의 충성심을 호소하며 아들의 석방을 위해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1924년에는 평안남도평의회원, 1937년에는 평안남도 도의원이 되었다.

김상준의 동생 김상무도 강동면장을 역임했고 다른 동생 김상화는 의사였는데, 평안남도 도회의원을 역임했다.

한때 3.1운동에 참여했던 아들 김대우는 아버지 덕에 무사히 풀려난 후 일본 유학을 떠났으며 귀국 후 총독부 관리가 되었다. 1928년에는 평북 박천군수로 취임했다. 스물아홉의 나이였다. 1930년에는 용강군수. 이후 도이사관, 평북 내무부 산업과장, 경상남도 이사관, 총독부 학무국 사회과 사무관, 조선사편수회 간사로 2년을 지내기도 했다. 그 뒤 총독부 사회교육과장이 되었다.

1937년에는 <황국신민서사>를 작성했다. 1938년 당시 총독부 내 고등관은 12명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선두를 달리는 인물이었다. 1943년에는 전북도지사, 1945년에는 경북도지사로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무죄로 풀려났다.

김대우의 동생 김호우는 경찰이었다. 쿄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평남 양덕경찰서에서 경부보로 시작, 평양경찰서 경부로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마포서장을 거쳐 내무부 치안국 수사과장, 충청남도 경찰국장을 지냈다. (아, 속 터져!)

강동군수 김수철은 메이지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929년 영변군수가 되었다. 오산학교에 기부를 약속하고 이행하지 않아 고소당했고 이에 져서 군수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1933년 12월말까지 약 822원의 돈이 모였다. 이 중 동아일보가 기부한 돈이 5백원. 성과가 미미한 탓에 조직 개편이 이루어지고 강동군 전체에 걸쳐 모금운동이 펼쳐졌다. 1934년 봄까지 성금은 2천8백여 원이 들어왔다(총 3천 6백여 원). 그러나 이 비용으로는 능을 수축하는데 필요한 재원에 턱없이 부족했다. 동명왕릉이나 기자릉에 준하는 모습으로 꾸미려면 수 만 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나마 있는 돈으로 아쉬운 대로 수축작업이 시작된다. 그러나 결국 수호각은 건립하지 못한 채 1935년 10월 단군릉제를 끝으로 단군릉수축기성회의 활동은 마감되었다.

그러나 성금의 일부분은 어디에 사용되었는지 내역이 확인되지 않는다. 일제식민통치를 위한 자금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일제는 단군릉 수축운동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는 내선일체, 일선동조를 내걸은 문화통치의 영향이다. 단군릉 수축운동에 기부한 많은 사람들은 일제에 대한 반감과 민족운동에 참여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나,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일제에 적극적으로 친일하고 있던 사람들이며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일제의 문화통치에 기여하고 있었다.

단군을 숭배하는 일이 친일과 양립할 수 있는가? 있다.

바로 이런 문제를 통해서 역사라는 얽힌 실타래를 푸는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 섬세한 일인지 잘 알 수 있다.



덧글

  • hyjoon 2010/06/15 11:11 #

    일제 때 단군이 끊겼다고 우기는 환빠들은 저런 고급스러운 소리 모릅니다. 『조선사』 앞부분에 『삼국유사』 단군이야기가 실려 있어도 못보는 애들인데 친일파와 단군이 공존(?)한다는 고급소리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각설하고, 덕분에 좋은 책 정보 알아갑니다. ^^
  • 초록불 2010/06/15 11:16 #

    유사역사학 신봉자들 보라고 올리는 글은 아니니까요...^^;;
  • 네비아찌 2010/06/15 11:24 #

    많은 사람들의 순수한 뜻을 친일파들이 이용해 먹은 거군요.
    김대우라는 사람은 어쩌다가 3.1 운동 참여자에서 황국신민서사 작성자가 된 건지.
    역사의 큰 물결 앞에 한번 덤볐다가 좌절하자 맘을 바꿔 그대로 큰 물결을 타고 흘러가기를 선택한 사람인 걸까요.
    나는 그런 상황에서 그러지 않으리라고 감히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김대우를 욕하기가 쉽지 않네요.
  • 초록불 2010/06/15 11:28 #

    이상적으로, 낭만적으로 생각하다가 현실의 강고한 벽에 부딪치면 돌아서서 벽의 일부가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김대우는 동료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비열한 모습까지 선보였다고 하더군요. 이런 자세가 되어버리면 이제는 진영을 바꾸는 수밖에 없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자기 모멸감을 견딜 수가 없으니까...

    우리가 역사 속의 인물이 된 사람들을 보면서 감정적으로 욕하거나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런 인생을 살았다고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 rumic71 2010/06/15 11:54 #

    최린이나 윤치호 같은 거물급들도 전향하는 마당이었으니...
  • 야스페르츠 2010/06/15 11:35 #

    친일파 문제는 참 복잡한 것 같습니다. ;;;;
  • 초록불 2010/06/15 11:42 #

    그렇습니다.
  • 누군가의친구 2010/06/15 12:02 #

    친일파 문제는 여러모로 복잡하지요. 적어도 사죄하는 과정이 있어야 했지만, 냉전으로 인한 이데올로기문제로 인해...ㄱ-

  • 초록불 2010/06/15 12:59 #

    그런 면에서 얼마 전에 친일행위를 사과한 반야월 씨께는 큰 박수를 드리고 싶습니다.
  • 2010/06/15 13:3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10/06/15 13:35 #

    그러고보니 오늘날의 애국심 마케팅과 비슷하군요.
  • 연이랑 2010/06/15 14:58 #

    단면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을 내리려 하는 사고 방식 자체가 더 큰 문제네요.
  • Allenait 2010/06/15 15:51 #

    진짜 이거 쉬운 문제가 아니군요...
  • 고독한별 2010/06/15 17:04 #

    역사를 보면 정말 언뜻 생각하면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룹끼리 서로 손을 잡기도
    하고, 언뜻 생각하면 굉장히 친해야 정상일 것 같은 그룹끼리 서로 싸우기도 하는 등
    당혹스러운 사례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도 (자연과학과 마찬
    가지로) 단순히 상식과 직관에만 의존하면 안되고 실제로 자료를 조사해서 철저하게
    검증하는 절차가 필수적이라는 얘기겠지요?
  • 초록불 2010/06/15 20:48 #

    그렇습니다. 진실을 알기는 쉽지 않죠.
  • RedPain 2010/06/15 17:27 #

    아, 속 터져!(2)
  • 누렁별 2010/06/15 18:01 #

    모금도 못하는 "입보수"는 일제시대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이군요.
  • 疲豺 2010/06/15 18:03 #

    단지 하나의 '특별한' 사례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단군문제는 친일문제와 넝쿨처럼 얽혀있는 부분이 많지요.

    그걸 좀 의도적으로 외면해왔고,
    그 대가를 지금 치루고 있는 것이고.
  • 초록불 2010/06/15 20:48 #

    책은 疲豺님 덕분에 알았는데, 값이 무시무시했습니다... ㅠ.ㅠ
  • 고독한별 2010/06/15 22:12 #

    초록불님 댓글 보고 생각나서 문득 알라딘 링크를 클릭해 보니까
    가격이 무려 3만 5천원이네요. (커헉~)
  • 까마귀옹 2010/06/15 18:23 #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추천해 준 <우리 역사를 의심한다>(혹시 제목만 보고 '환빠 책이냐!'란 분이 있으실 것 같은데, 강만길 교수 등 진짜 사학자 분들이 쓴 책입니다.)에서 '단군 신앙을 식민 사학과 친일파들이 악용한 형태가 존재했다'란 내용을 읽고 잘 이해가 가질 않았었지요.
  • 초록불 2010/06/15 20:48 #

    좋은 책이죠.
  • 들꽃향기 2010/06/15 23:13 #

    잘 읽었습니다. 사실 하나의 역사적 소재-인물 '자체'가 민족주의적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아이콘화 하는 방식'을 주목해야 한다던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ㄷㄷ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일제가 단군 등의 인물-소재 '자체'를 말살시키고 멸절시키려 했다는 생각은, 오히려 식민통치-식민주의의 복잡성과 무서움을 단순화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ㄷㄷ
  • 초록불 2010/06/15 23:14 #

    맞습니다.
  • 섀럿 2010/06/16 21:54 #

    치우천왕기/한단고기읽고 쓰레기의 나락에 빠지려다 초록불님 글보고 나오게 됬네요 ㅎㅎ

    역사 잘 알아야 겠다고 생각되서 임용환 교수님의 수업을 듣는데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나 역사의식이 정말 개차반인것 같더군요. 민족주의도 일제가 중국과 단절을 위해 만들어냈다고 들었습니다.
    일제시대에 나온 역사는 확실한 검증이 필요한것 같네요
  • 예니체리 2010/06/21 12:29 #

    그분들 이유립욕하지말라면서 자기들은 송호정같은 교수를 욕하는 이상한 모순ㅋㅋㅋ 왠지 저글까지 부인할것같내요 쿠투넷에서 자기들은 이유립욕하지말라면서 송호정교수 정보를 누출시키질않나 ㅋㅋㅋ
  • 초록불 2010/06/21 17:17 #

    흠... 넷상에 개인정보를 유출했다는 이야긴가요? 그건 불법 아닌가 모르겠네요.
  • 예니체리 2010/06/22 12:34 #

    송호정교수에대한 기본정보나 논문등을 뿌리면서는 욕하고다니더군요
  • 파랑나리 2010/12/15 20:18 #

    조선시대에는 환인과 환웅과 동명왕까지 제사지내주었건만 오늘날에는 제사를 제대로 치르기는 커녕(단군을 모신다는 대종교도 전례를 무시하고 다르게 치렀으니) 반민족분자들이 단군을 이용해먹다니 슬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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