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익명성은 난잡함을 동반한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사생활 - 즉 개인적인 영역에서도 그러하다.
공산 체코에서 경찰이 반체제 인사 얀 프로샤츠카가 친구와 나눈 이야기를 비밀리에 녹음했고 그 내용을 국영 라디오를 통해 방영했다고 한다. 체코인들은 얀 프로샤츠카가 행한 거친 말과 야한 농담과 바보 같은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 물론 이것이 체코 정부가 바란 바였다.
여기에 밀란 쿤데라의 흥미로운 지적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점차 깨달았다. 진정한 추문은 프로샤츠카의 대담한 대화가 아니라 그의 삶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임을. 그들은 전율하듯 깨달았다. 사적인 세계와 공적인 세계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세계이며, 차이에 대한 존중은 자유로운 인생의 필수 조건임을. - 앤서니 루이스,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 박지웅·이지은 역, 간장, 2010, 125쪽에서 재인용
2.
아이작 아시모프의 SF <죽은 과거>는 남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되고, 정부 당국이 그것을 막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그러나 결국 실패하는 내용이다. 마지막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3.
뉴욕 대학의 토머스 네이글 교수의 한 말씀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
우리처럼 복잡한 생명체들이 거듭되는 사회 붕괴 없이 상호작용할 수 있으려면, 대중의 눈 앞에 드러내는 내용과 감추는 내용 - 또는 오직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드러내는 내용 - 을 구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 내면의 삶은 다들 생각과 감정, 환상, 충동이 뒤얽힌 정글이며, 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모두 표현한다면 문명이란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 앤서니 루이스, 위 책, 124쪽에서 재인용
4.
문제는 인터넷이다.
인터넷 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생활과 관련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익명의 모든 사람과 교류하고자 하지 않을 수 있다. 공개된 곳에 글을 쓰면 안 되는 것이다라고 쉽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사람이란 본래 모순적인 존재다. 적절한 선에서 - 냉정하게 말하자면 자신과 의견이 맞는 사람들(이것을 감정적, 이성적 부분으로 다시 세분화할 수 있다)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실제 생활에서도 인간 관계는 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 거리를 함부로 무시하면 관계가 깨지게 마련이다. 온라인 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거리를 재지 못하고 들이대는 인간을이 있고, 그 중에서도 악의까지 지닌 인간들을 악플러라고 부른다.
5.
때로는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를 이런 거리에 대입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이것은 명백하게 카테고리의 오류라고 생각한다.
6.
인터넷의 공간에서 현실성을 잃어버릴 때 문제가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무심히 자신의 사생활을 노출한다. 그것을 알아도 괜찮은 사람들 사이에만 보여지는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인터넷 공간에 접속하는 순간, 그 사람은 개인적인 공간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모니터 뒤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뇌는 3D 게임에 속는 것처럼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온라인 상에서는 아무튼 컴퓨터라는 도구를 이용하여(그것이 컴퓨터가 아닌 무엇이든 상관없다) 접속하기 때문에 인간이 상대를 판단하는 기초적인 정보에서부터 자유롭게 마련이다. 얼굴, 키, 음성, 성별, 나이 같은 것들이 사라진다.
실제로는 모니터의 글 뒤에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역시 그 뒤에 있는 생명체를 느끼지는 않는다.
이 부분에서 자칫 잘못하면 "평면화"가 시작된다. 비로그인과 로그인은 같다라든가, 로그인의 경우에도 실명과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같다든가, 욕설과 비판이 같다든가...
사실상 대부분의 경우, 인터넷 상에서 사람들의 정보는 "예의상" 모른 척 해주거나 굳이 파헤치려 하지 않을 뿐이다. 이런 부분을 악의를 가지고 파헤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는 이미 많은 사례들이 있으므로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위 책에 나온 한 대목을 의미심장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브라이언 대법관은 사생활의 중요성을 논하면서 새로운 주장을 펼쳤다. 사람들에게 사생활을 보장해주는 것은 "간섭받지 않을 권리"를 보호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자유로이 말할 수 있게끔 사람들을 북돋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사적인 대화가 공개될까봐 두려워서 개인적인 사안들을 의논하기 꺼리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성향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준다. 따라서 법으로 명시된 규제들은, 다른 경우라면 일어나지 않을만한 대화들을 북돋운다."
달리 말하자면,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취지에서 대화의 사생활을 보호하자고 주장하는 셈이었다. - 위 책, 121~122쪽
인터넷 실명제와 같은 이야기를 할 때, 떳떳하게 못할 이야기가 어딨어,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그렇지 않다는 점을 위 글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7.
실제로 인터넷에서 "익명"이라는 것은 "의지"(악의든 선의든)만 가지면 거의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저 열려 있는 창문에 붙은 커튼 정도의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까?
그러나 그 정도의 차폐만으로도 자유로운 논의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8.
딱히 결론은 없는 글이지만, 생각의 정리를 위해서 일단 올려놓는다.
평면화의 개념에 대해서는 평면화 [클릭]를 보기 바란다.
익명성은 난잡함을 동반한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사생활 - 즉 개인적인 영역에서도 그러하다.
공산 체코에서 경찰이 반체제 인사 얀 프로샤츠카가 친구와 나눈 이야기를 비밀리에 녹음했고 그 내용을 국영 라디오를 통해 방영했다고 한다. 체코인들은 얀 프로샤츠카가 행한 거친 말과 야한 농담과 바보 같은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 물론 이것이 체코 정부가 바란 바였다.
여기에 밀란 쿤데라의 흥미로운 지적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점차 깨달았다. 진정한 추문은 프로샤츠카의 대담한 대화가 아니라 그의 삶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임을. 그들은 전율하듯 깨달았다. 사적인 세계와 공적인 세계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세계이며, 차이에 대한 존중은 자유로운 인생의 필수 조건임을. - 앤서니 루이스,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 박지웅·이지은 역, 간장, 2010, 125쪽에서 재인용
2.
아이작 아시모프의 SF <죽은 과거>는 남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되고, 정부 당국이 그것을 막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그러나 결국 실패하는 내용이다. 마지막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3.
뉴욕 대학의 토머스 네이글 교수의 한 말씀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
우리처럼 복잡한 생명체들이 거듭되는 사회 붕괴 없이 상호작용할 수 있으려면, 대중의 눈 앞에 드러내는 내용과 감추는 내용 - 또는 오직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드러내는 내용 - 을 구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 내면의 삶은 다들 생각과 감정, 환상, 충동이 뒤얽힌 정글이며, 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모두 표현한다면 문명이란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 앤서니 루이스, 위 책, 124쪽에서 재인용
4.
문제는 인터넷이다.
인터넷 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생활과 관련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익명의 모든 사람과 교류하고자 하지 않을 수 있다. 공개된 곳에 글을 쓰면 안 되는 것이다라고 쉽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사람이란 본래 모순적인 존재다. 적절한 선에서 - 냉정하게 말하자면 자신과 의견이 맞는 사람들(이것을 감정적, 이성적 부분으로 다시 세분화할 수 있다)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실제 생활에서도 인간 관계는 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 거리를 함부로 무시하면 관계가 깨지게 마련이다. 온라인 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거리를 재지 못하고 들이대는 인간을이 있고, 그 중에서도 악의까지 지닌 인간들을 악플러라고 부른다.
5.
때로는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를 이런 거리에 대입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이것은 명백하게 카테고리의 오류라고 생각한다.
6.
인터넷의 공간에서 현실성을 잃어버릴 때 문제가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무심히 자신의 사생활을 노출한다. 그것을 알아도 괜찮은 사람들 사이에만 보여지는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인터넷 공간에 접속하는 순간, 그 사람은 개인적인 공간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모니터 뒤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뇌는 3D 게임에 속는 것처럼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온라인 상에서는 아무튼 컴퓨터라는 도구를 이용하여(그것이 컴퓨터가 아닌 무엇이든 상관없다) 접속하기 때문에 인간이 상대를 판단하는 기초적인 정보에서부터 자유롭게 마련이다. 얼굴, 키, 음성, 성별, 나이 같은 것들이 사라진다.
실제로는 모니터의 글 뒤에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역시 그 뒤에 있는 생명체를 느끼지는 않는다.
이 부분에서 자칫 잘못하면 "평면화"가 시작된다. 비로그인과 로그인은 같다라든가, 로그인의 경우에도 실명과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같다든가, 욕설과 비판이 같다든가...
사실상 대부분의 경우, 인터넷 상에서 사람들의 정보는 "예의상" 모른 척 해주거나 굳이 파헤치려 하지 않을 뿐이다. 이런 부분을 악의를 가지고 파헤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는 이미 많은 사례들이 있으므로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위 책에 나온 한 대목을 의미심장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브라이언 대법관은 사생활의 중요성을 논하면서 새로운 주장을 펼쳤다. 사람들에게 사생활을 보장해주는 것은 "간섭받지 않을 권리"를 보호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자유로이 말할 수 있게끔 사람들을 북돋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사적인 대화가 공개될까봐 두려워서 개인적인 사안들을 의논하기 꺼리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성향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준다. 따라서 법으로 명시된 규제들은, 다른 경우라면 일어나지 않을만한 대화들을 북돋운다."
달리 말하자면,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취지에서 대화의 사생활을 보호하자고 주장하는 셈이었다. - 위 책, 121~122쪽
인터넷 실명제와 같은 이야기를 할 때, 떳떳하게 못할 이야기가 어딨어,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그렇지 않다는 점을 위 글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7.
실제로 인터넷에서 "익명"이라는 것은 "의지"(악의든 선의든)만 가지면 거의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저 열려 있는 창문에 붙은 커튼 정도의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까?
그러나 그 정도의 차폐만으로도 자유로운 논의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8.
딱히 결론은 없는 글이지만, 생각의 정리를 위해서 일단 올려놓는다.
평면화의 개념에 대해서는 평면화 [클릭]를 보기 바란다.
덧글
80년대 중반생으로서는 저보다 뒷세대인 90년대생은 어릴때부터 인터넷을 접해서 오히려 자연스럽게 자기의 자리를 잡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사회화가 덜 된 과정에서의 인터넷 진입은 피바다만 불러오던(;;;)
아마 1-2세대가 더 지날때까지는 계속 혼란기가 이어지지 않을까 싶어집니다.
(사실 익명이라 해도 어지간히 철저히 자기관리 하지 않는한 익명이란 존재하지 않죠.)
개인적 층위에서의 표현의 자유와 언론이 가지는 표현의 자유는 서로 다르고, 이 문제에 대해서 미국 사회에서는 치열한 법리 공방이 오갔으며, 현재도 오가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