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의 갑과 을 *..문........화..*



기획시대 300호 특집에 실려있는 변정수의 <엔터테인먼트가 된 책, 연예인이 된 저자>에 출판사 계약서의 갑과 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흔히 계약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을 '갑'이라고 한다. 계약을 문서로 작성하는 과정에서 계약 당사자를 '갑', '을' 등으로 지칭하는데서 유해한 표현일 게다. (중략)

저자와 출판사의 관계에서는 당연히 저자가 '갑'이다. - 변종수, 위 책 42쪽


나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런데 연전에 교원출판사와 계약을 하면서 뜻밖의 일에 부딪쳤다. 보내온 계약서에는 내가 '을'로 명기되어 있었던 것이다.

몇 해 전 저작권 강의를 하면서 이 점을 당연히 전제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다가 뜻하지 않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저작자가 갑인가요? 한 번도 그렇게 계약서를 써본 적이 없어서요. 저희는 당연히 저작자가 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그는 학습서를 출판하는 어느 공기업 출판팀의 중견 편집자였다. - 위 책, 42쪽

나는 전화 통화를 하다가 슬쩍 왜 내가 '을'인지 물어보았다. 편집자는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들은 한 번도 저작자를 '갑'으로 계약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결국 누가 갑이냐는 건,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하게 현실에서의 '힘의 관계'의 문제였다. (중략) 저자를 '선생님'으로 깎듯이 존대하며 계약서에도 '갑'으로 표기하는 관행이란 그저 일종의 자기기만적인 허위의식은 아닌 것일까? - 위 책, 42~43쪽

나는 술자리에서 교수 몇 분과 내가 '을'이 된 사연을 이야기했는데, 교수들이 깜짝 놀라며, "그럼 지금까지 당신은 '갑'이었단 말이냐?"라고 해서 더 놀란 기억이 있다.

사실 지금까지는 변죽을 울리는 이야기였고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변정수는 저작자가 갑이었던 시대는 상업출판물로 완결된 원고를 만들 수 있는 저자가 소수였던 옛날이었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지식인 사회의 장벽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그들이 '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저작의 장벽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기반을 만나 과거보다 훨씬 다양하게 변화했다는 것. 그리고 이 다양성이 장벽을 극단적으로 낮추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렇게 장벽이 낮아지면서 아예 출판의 기준 자체가 모호해지고, 그 결과 실패의 가능성도 높아졌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을 저자에기대는 '스타 시스템'으로 출판이 변화하고 있으며, 그것 때문에 출판 장벽은 오히려 높아지는 기현상을 일으킨다는 것. 앞뒤가 안맞는 것 같은 이런 이야기는, 기회로서는 출판 장벽이 낮아졌으나 실질 출판으로는 장벽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로 설명이 된다.

신인의 작품을 무엇으로 검증하고 판단할 것인가?

기회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이제 '진입장벽'은 거의 없다. 누구나 원한다면 출판물의 저자가 될 수 있고 심지어 출판사들이 계약서를 들고 줄을 서는 대중적인 저자를 꿈꾸며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작료에 기대 절치부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몇 만 부짜리 '대박'까지도 아니고 그저 초쇄라도 소화시키며 다음 저서를 준비할 수 있는 저자조차도 얼마 안 될 것이다. 시장 위험이 높아진 만큼 실질적인 진입장벽도 훨씬 더 높아진 것이다. - 위 책, 46쪽

나는 이 이야기가 왜 도서대여점 시스템 속에 있는 장르소설판으로 읽힐까?

원고만 가져오면 출판이 되는, 그러나 이제는 정말 편의점 알바가 더 번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고료가 지급된다는 말을 듣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재능있는 작가들이 스러지고 있지는 않는지 안타깝다. 하지만 장르소설판에는 소설의 질에 대해서 기준을 삼을 '무엇'이 부재하다.

이 문화적 황폐함에서 벗어나려면, 적어도 저술 의지가 있는 잠재적 저자가 안정적으로 저술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확보하려면, 시장 바깥에서 저작물의 질에 대한 평판이 형성될 수 있는 다양한 공공 커뮤니케이션의 채널이 마련되어야 한다. - 위 책, 46쪽

변정수는 출판물 일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이 역시 장르소설에 집어넣어도 그대로 성립하는 말이 된다. 출판계가 앞뒤로 부딪친 문제들을 생각하다 보면...

이제 갑과 을이 무슨 문제람...

그저 답답하다.

덧글

  • sharkman 2011/08/03 14:28 #

    이거 거저 생각할 건 많지만 그런 저런 문제는 다 내버리고 내가 마음놓고 사서 읽을만한 장르소설이 지금 얼마나 나와있는지 궁금하네요. 양판소에는 알러지가 있어서.
  • 초록불 2011/08/03 16:14 #

    에... 일단 <아이, 뱀파이어>를 보시고... (이건 장르소설이 아니잖아, 라고 누가 호통을 친다)
  • Allenait 2011/08/03 14:37 #

    그러게요.. 소설의 질의 기준이 없는 것 같네요. 잘 팔리는게 기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는것 같군요.
  • 초록불 2011/08/03 16:15 #

    잘 팔리는 것도 기준이긴 한데, 그 기준은 스타 시스템의 기준이라는 거죠.
  • 카라준 2011/08/03 14:39 #

    그런데 갑이셨나요? 내 계약서는 어디에 있더라?
    난 항상 내가 을이었던 것 같은데.
  • 초록불 2011/08/03 14:52 #

    카라준님도 갑 맞습니다...
  • 카라준 2011/08/03 15:58 #

    갑이구나. '-';;
    다른쪽 계약서에 을인가? 아니 갑이었던가?
    이쪽 계약에서 제가 갑인지 을인지에 대해서, 오늘 처음 인식을 했네요.
  • 라세엄마 2011/08/03 15:23 #

    피마새...보다 잘쓰면 갑 못쓰면 을 어때요
  • 라세엄마 2011/08/03 15:38 #

    아니면 판매부수가 더 많으면...으헉 엉엉
  • 초록불 2011/08/03 16:15 #

    판매부수가 더 많은 거야 검증할 수도 있지만...

    더 잘 쓰고라는 문제는 멱살 잡고 잡히는 문제가 되지요.
  • 라세엄마 2011/08/07 13:07 #

    극렬빠순으로 하면...
    ...
    아 그럼 귀여니가 제일 잘쓰겠구나 젠장
  • 비홀더 2011/08/03 15:52 #

    제가 갑이었다니....
    근데 계약서에는 을이었는데.
  • 초록불 2011/08/03 16:16 #

    계약서에 을이면 을인 거죠.
  • 표류소녀 2011/08/03 16:57 #

    저는 지금까지 "돈 주는 쪽이 갑, 돈 받는 쪽이 을"로 알고 있었어요. 물론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서 어쨌든 출판사가 돈을 주는 쪽이니까 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네요. 하청업체도 일하고 돈을 받아가는 쪽이니까 을이고... 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구요.
  • 루드라 2011/08/03 18:59 #

    읽어가면서 점점 장르 소설쪽이랑 비슷해져 가는구나 싶었는데 역시군요. -_-
  • 소하 2011/08/03 19:14 #

    조금 다른 관점이지만 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진보를 담보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인쇄술이 나오면서 대량보급이 가능해졌지만, 대량의 서적들이 판각되지 못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졌으니까요. 필사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니까요...
    시대의 변화~~ 급격하는 변화하고 변화 주기가 빠른 세상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오히려 불행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 듭니다.
  • sleipnir 2011/08/04 04:30 #

    얼마전에 안하던 학습만화 쪽 일을 하나 했었는데 작가인 제 쪽이 갑이었습니다. 한번도 그런 경우가 없어서 그저 신기한 경험이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여러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었네요;
  • 초록불 2011/08/04 10:24 #

    형식적인 것이긴 하지만 콘텐츠를 생산하는 작가를 사회에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작은 잣대일수 있겠지요.
  • 2011/08/04 08:5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11/08/04 10:25 #

    어떤 유형의 스토리가 필요한지 모르면 소개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 animator 2011/08/04 12:56 #

    저는 단순히 "아쉬운 쪽이 을, 안아쉬운 쪽/파워있는 쪽이 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비 출판계...)
  • 누군가의친구 2011/08/04 19:23 #

    갑자기 생각나서 방금전에 예전에 계약한바 있는 모 업체와의 계약서 3건을 보니 저도 '을'로써 계약했었습니다.(...)
  • 2011/08/10 21:4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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