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 *..역........사..*



단재丹齋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양력) 지금의 대전에서 태어났다. 신채호의 집안은 몰락한 남인으로 직계 조상은 신숙주다. 이곳은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친가가 있는 충북 청원으로 이사했다.

8세 때부터 서당 훈장이었던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9세에 <자치통감>을 읽고 12~3세에는 사서삼경을 떼었다. <삼국지>과 <수호지>를 즐겨 읽었다. (<삼국지> 소리만 나오면 파르르 떠는 저쪽 동네는 어쩔?)

15세가 된 1894년 동학농민군이 이웃마을로 들이닥치는 사건이 있었다. 신채호는 여기서 권력에 투쟁하는 민중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던 모양이다.

1898년 성균관에 입학. 성균관 남재에서 변영만, 조소앙 등과 독서회를 조직해 사회과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해 10월 독립협회에 가입. 이상재, 김규식 등과 활동하다가 12월에는 체포되기도 했다. 풀려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1904년 황무지 개간권이 일본에 넘어가자 성균관으로 올라와 학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1905년 장지연의 권유로 황성신문에 들어가 활동하였으나 "시일야방성대곡" 사건으로 신문을 발행할 수 없게 되자 1906년 <대한매일신보>로 옮겨가서 계속 활동했다.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해서 취지서를 작성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금연으로 모은 돈 2원을 성금으로 내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의 멸망이 기정 사실화 되자 신채호는 동지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 망명길에 오산학교에 들렀는데, 이때 꼿꼿이 선 채 세수를 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청도 회의에서 무관 학교 교원으로 임명된 신채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러나 계획은 한국 병합으로 무산되고 신채호는 그곳에서 언론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여러가지 어려운 사정으로 인해 1913년 상해로 가게 된다.

상해에서 정인보, 문일평, 홍명희, 이광수 등과 교류하다가 1914년 대종교 교주 윤세복의 초청으로 봉천성으로 가서 국사를 가르쳤다. 1915년 북경으로 옮겨가 신한혁명당에 참여했다.

이때까지 신채호의 사상은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것으로, 강국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으며, 역사 연구의 기본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는 1916년에 쓴 소설 <꿈하늘>에서,

외교를 의뢰하여 국민의 사상을 약하게 하는 놈들은 댕댕이 지옥에 두어야 하며, 의병도 아니요 암살도 아니요 오직 할 일은 교육이나 실업 같은 것으로 차차 백성을 깨우자 하여 점점 더운 피를 차게 하고 산 넋을 죽게 하는 놈들은 어등 지옥에 가야 한다.

라고 써서 외교독립론이나 실력양성론을 모두 비판하고 있다. 그는 힘에 의한 독립 쟁취를 바라고 있었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라면 강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나서, 그 영향은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미쳤다. 1919년 2월 신채호는 무오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를 통해 힘의 논리가 아닌 평등 공존의 세상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신채호는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자 임시의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직을 사임했다. 왜?

이승만은 1919년 2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요청했다. 미국에 있던 그는 3.1운동 중에도 이러한 조건 하의 해방을 주장하고 있었고, 신채호는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라고 비난했다.

그 후 김두봉 등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노선을 비판했다. 그는 아나키즘에 입각한 민족해방운동론을 주장했다.

신채호는 1921년 1월 잡지 <천고>를 통해 아나키즘을 선전하고, 테러를 통한 폭력 투쟁을 민족해방운동의 수단으로 택했다. 그 해 5월 상해에서 이동휘에 의해 고려공산당이 결성되고, 공산당은 아나키스트들의 테러 활동을 모험주의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항해서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했다. 의열단원들은 이 선언문을 항상 지닌고 다녔다고 한다.

신채호는 1923년경 조직된 것으로 알려진 다물단에도 관여했다. (다물단의 뜻에 대해서는 용감, 전진, 단결의 의미 혹은 입을 다물어라, 라는 뜻이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고토 회복의 고구려어 다물과도 관련이 있으리라 주장한다.)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동안 점점 더 생활이 어려워져 1924년 관음사라는 절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한국사 연구에 노력을 기울였다.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말로 유명한 <조선상고사>의 총론도 이때 집필한 것이다.

그는 일반적인 공산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무산계급의 연대에 대해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무산 계급이라 해도 제국의 그늘 아래 있는 일본의 무산 계급과 식민지 조선의 무산 계급은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1927년 9월 신채호는 북경에서 개최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창립 대회에 참가했다. 1927년 말에는 재중국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1928년 4월에는 천진에서 한국인 아나키스트 대회를 개최했다. 여기서 신채호는 경찰, 군대, 황실, 은행, 회사 등 지배계급의 지배 도구인 정부를 파괴하고 무산계급에 의한 해방을 이룩할 것을 주장했다. 그 글의 한 구절을 보자.

우리의 세계 무산대중! 더욱 우리 동방 각 식민지 무산 민중의 혈血, 피皮, 육肉, 골骨을 빨고, 짜고, 씹고, 물고, 깨물어 먹어온 자본주의의 강도제국 야수군들은 지금에 그 창자가 꿰어지려 한다. 배가 터지려 한다. 그래서 피등彼等이 그 최후의 발악으로 발끝까지 박박 찢으며 아삭아삭 깨물어, 우리 민중은 사멸보다 더 음참한 불생존의 생존을 가지고 있다. 아, 세계 무산민중의 생존! 동방 무산민중의 생존!

이뿐이 아니라 암살과 폭파 등을 실현하기로도 결의했다. 당연히 자금이 필요한 일이었다. 신채호는 이를 위해 외국환 위조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위조지폐 계획은 주모자 중 하나가 체포되면서 탄로났고, 이 때문에 신채호도 1928년 5월, 대만에서 체포되었다. 신채호는 대련으로 호송 되어 여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10년 형을 선고받은 신채호는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1936년 2월 18일 뇌일혈로 쓰러졌고 21일 사망했다. 가족도 그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의 병세가 악화되자 형무소 당국은 병보석을 허락했지만, 그를 위해서는 친일인사가 보증을 서야 했다. 신채호는 병보석을 거절하고 죽음을 맞았다. 향년 57세.

그는 감옥 안에서도 아나키스트로 살았고 끊임없이 아나키스트 이론을 전파했다.





심산 김창숙이 신채호의 죽음을 듣고 지은 시가 있다 해서 옮겨 놓는다.

단재를 애도하며

1
들으매 그대의 시신을
금주金州의 불로 태웠다 하니
이 땅의 정기 그대와 함께
모두 거두어졌도다
옥루玉樓의 수문修文(하늘의 관리)으로
그대 잘 갔네만
항아리 속에 갇힌
하루살이 같이
뒤에 죽은 사람들 이 부끄러움 어찌하랴

2
들으매 그대 여츤旅儭(영구)
청주로 돌아왔는데
오직 한 줌 재로
수구首邱(고향)에 묻혔도다
묻노니 그대의 혼백도
따라 돌아왔는가
그대 아마 앞서 간
보로溥老(이상설)를 따라 놀겠지





[참고서적]
한영우선생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한국사 인물열전3, 돌베개, 2003
김삼웅, 단재 신채호 평전, 시대의창, 2005
박환, 식민지시대 한인 아나키즘 운동사, 선인, 2005

덧글

  • 셔먼 2012/03/19 01:03 #

    신채호 선생이 쓴 글은 읽는 사람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힘이 있죠. 한때 존경하던 위인이었는데 지금은 아나키즘적인 행적이나 조금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약간 시들해졌습니다.
  • 초록불 2012/03/19 07:32 #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긴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살아가면서 신념과 가치관이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단재는 민족주의, 계몽주의, 영웅사관에서 시작해서 점차 민중사관, 혁명사관, 아나키즘으로 옮겨갔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영웅사관, 민족주의건 혁명사관, 아나키즘이든 유효하지 않은 것이겠지만, 일제의 폭압 아래 독립을 갈구하던 식민지 시대에서 자신의 이상을 위해 단지 펜대만 놀린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실천에 나섰다는 점만 보아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거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재의 역사관은 후대에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으로만 해석되어 그의 본질과 멀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본질이 극우인 유사역사학 쪽에서 단재를 이용해 먹는 꼴을 보면 아나키스트 신채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군요.
  • 잠꾸러기 2012/03/19 10:39 #

    신채호 선생에 대해서 몰랐던 부분을 알고 갑니다.
    편한 길을 택했으면 말년에 감옥에서 병사하실 분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의열단선언문을 남기고 무정부주의 활동을 위해 만주에서 풍찬노숙을 하셨던 점을 생각하면 존경심이 생길수 밖에 없네요.

    어느 시대나 실천하는 삶을 사셨던 분들을 보면 고개가 숙여질수 밖에 없습니다.
  • 초록불 2012/03/19 11:45 #

    당대로 보면 이만한 통찰력과 학식을 지닌 사람이 드물었으니, 적당히 지사연하면서 지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그런 길을 걷지 않은 것만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지요.
  • 푸른화염 2012/03/19 10:59 #

    단재의 풍찬노숙, 그 이면에 남아 있는 실천의 족적은 그를 비판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요소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요. 다시금 숙연해지는 대목입니다.
  • 초록불 2012/03/19 11:45 #

    동감입니다.
  • hyjoon 2012/03/19 12:58 #

    개인적으로는 신채호의 역사학을 따르지 않습니다만, 사상사적으로나 지성사적으로 이만한 분을 찾기 힘들다고 봅니다. 자신이 사는 세계에서 구축한 프레임을 깨는 것 자체가 굉장히 힘든데, 신채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프레임도 시대의 요구에 따라 바꾸어나갔고, 이를 실천했으니까요.
  • 초록불 2012/03/19 13:34 #

    신채호는 역사 속의 인물이죠. 역사 속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고...
  • E랜드 2012/03/19 13:04 #

    극우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이 양립하지 못하는 이유가
    '극우 민족사관이 권력을 지향하기 때문'인가요..?

    노멀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은 양립할 수 있는건가요?
    아나키즘이 개인적으로 조금 어려워서...
  • 초록불 2012/03/19 13:35 #

    아나키즘 자체가 좌파사상입니다.

    일반적으로 민족주의는 그 사상적 기반 자체가 빈약해서 어떤 사상과도 쉽게 결합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죠. 극우와 결합한 민족주의가 다시 아나키즘(이건 사실 극좌에 가깝습니다)과 결합할 수는 없는 것이죠.
  • 굔군 2012/03/19 16:25 #

    개인적으로 <조선상고사>라든지, 그의 역사관이 후대에 미친 영향들(특히 유사역사학이 그의 위광을 팔아먹고 있는 꼴;;)을 솔직히 그다지 좋게 보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는 점에서는 위대한 분이지요.

    <조선상고사>를 읽으면서 이토록 민족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사람이 어쩌다 아나키즘으로 선회하게 되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 같구요.

    뭐, 사실 그가 날조된 <천부경>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만 생각해 봐도, 유사역사학쪽에서 이용해 먹을 위인은 아닌데 말이지요. ^^;;
  • 초록불 2012/03/20 10:32 #

    깊이 파고 들면 신채호의 글들을 하나하나 연대에 맞춰 고찰해볼 수 있겠지요. 이번 글을 쓰면서 신채호가 쓴 선언문들을 다 읽었는데, 참 대단합니다.
  • dawnsea 2012/03/20 10:20 #

    좋은 글 늘 감사합니다.
  • 초록불 2012/03/20 10:33 #

    고맙습니다...^^
  • 누군가의친구 2012/03/20 14:14 #

    신채호가 아나키즘으로 간 데에는 독립운동진영의 행태에 대한 분노가 있던가 아닌가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그래서 일전에 말씀드렸던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말을 그런 의미로 곱씹었던 겁니다.
  • 초록불 2012/03/22 22:56 #

    그냥 분노로 움직일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駕洛之胤 2012/03/22 19:39 #

    신채호 선생이야말로 그 행적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존경을 표해도 아깝지 않으신 분이지요.
    조선상고사는 1931년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으로 완전한 역사서로 편찬된 것이 아닌것으로써.
    해방후에 단행본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압니다만...
    그런 연재물은 자신의 독선적인 인식을 별다른 여과없이 얼마든지 표현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때로는 심한 오류가 보이곤 하지만 이것을 일부 유사사학자들이 삼국사기등 기존 역사서와 동일하게 때로는 이 보다도 더욱 신뢰성있는 역사서로 취급하는게 문제라고 봅니다.
    단재 선생은 역사를 예리하게 꿰뚤어 보는 안목은 탁월 했지만 이를 맹신한 오늘의 일부 인사들이 자신의 목적으로 이를 이용하여 기존의 역사서를 마구잡이로 부정하는 지침서로 삼으니 조선상고사가 국민계몽의 연재물로써 역활했던 본래의 목적을 퇴색시키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초록불님의 좋은 글을 항상 재미있게 감상하고 갑니다.
  • 초록불 2012/03/22 22:57 #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것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었죠. 옥중에 있었던 때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지만... 이 발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질유키 2012/05/20 13:33 #

    (<삼국지> 소리만 나오면 파르르 떠는 저쪽 동네는 어쩔?) <- 그 동네가 뭐져?

    신채호의 인생 중에 민족주의적 면만 부각된 원인이 바로 국사교과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사책 어느 곳에서 신채호가 말년에 아나키스트가 되었다는 사실은 없고 단지 신채호가 독사신론,조선상고사,이태리영웅전,월남망국사라는 민족주의 서적만 저술했다는 이야기만 나와있습니다.

    민족주의로 위장한 파시스트들은 아나키즘이라고 하면 무정부주의라고 매도하려고 하지만 반면에 신채호는 민족주의를 아나키즘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 힘보다 문화를 중시한 김구가 암살되면서 올바른 민족주의가 계승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김구가 대통령했으면 유사역사가 활개치는 것을 어느정도 방지했을 것입니다.
  • 초록불 2012/05/20 14:31 #

    유사역사학 동네는 삼국지를 매우 증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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