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가 1 *..역........사..*



1. 백제 : 고흥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375)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백제는 개국 이래 아직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일이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흥에 대해서는 일찍이 다른 책에는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제기百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백제본기百濟本記>가 등장하는데 <서기>와 이들 <백제삼서>가 어떤 관련을 가지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2. 고구려 : 이문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11년(600) 정월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조서를 내려 옛 역사를 축약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게 했다. 국초로부터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어떤 사람이 사실 100권을 기록, 이름을 <유기留記>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것을 산수刪修(쓸데없는 글자나 구절을 깎고 다듬어서 글을 잘 정리함)한 것이다.

대개 미천왕 때까지의 기록에 설화적인 이야기들이 들어있는 것은 <유기>의 흔적이라고 본다. 그러니 이문진이 깎아버린 것에 얼마나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었을까 안타깝다. 사실 <삼국사기>만 해도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읽어보면 설화적인 부분을 대폭 깎아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신라 : 거칠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6년(545) 7월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아뢰기를, "국사라는 것은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포폄을 만대에 보이는 것입니다. 사기를 수찬하지 않으면 뒷날 무엇을 보고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저으기 옳게 여겨 대아찬大阿飡 거칠부居柒夫 등에 명하여 널리 문사文士를 모아 <국사國史>를 수찬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
진흥대왕 6년 을축에 왕의 명령을 받아 여러 문사를 모아 국사를 수찬하니 파진찬波珍飡으로 관직을 올렸다.

삼국이 모두 왕명, 즉 국가 사업으로 역사서를 편찬한 것은 동일하나 백제와 고구려가 일 개인에 의해 역사서가 만들어진 것과 달리 신라는 집단이 역사를 편찬했다는 점이 특기할만한 사항이다.

또한 고흥이나 이문진에 대해서는 자세한 자료가 없지만 거칠부는 열전이 남아있어 그의 생애를 재구성해보는 것이 가능하다. 일단 간략하게 그의 생애를 살펴보자.

거칠부(502~579)의 한자명은 황종荒宗이다. 荒은 거칠다는 뜻으로 지금도 쓰이니, 언어의 유구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역사를 증명하는 역사가다운 이름이라 하겠다. 성은 거 씨가 아니고 김 씨... 내물왕의 5세손으로 당당한 왕족이다.

젊어서는 차분하지 못한 건들거리는 성격에 허풍이 센 인물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점잖게 원대한 뜻을 품었다고 쓰지만...) 젊은 시절에 중이 되어 사방을 유람했는데, 고구려를 염탐할 뜻을 가지고 국경을 넘어갔다. 그곳에서 혜량惠亮법사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혜량법사는 한 눈에 거칠부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어디서 온 사람인지 물었다. 거칠부는 담대하게 자신의 출신을 그대로 고했는데, 혜량법사는 "그대의 관상을 보니 제비턱(두툼하고 넓직하게 생긴 턱)에 매의 눈(눈이 둥글고 위협적임)이라 장차 반드시 장수가 되겠다. 만일 군사를 거느리고 오면 내게 해를 끼치지 말라."라고 당부했고, 거칠부는 해를 두고 맹세를 한 뒤 신라로 돌아왔다.

혜량법사의 말에 자신감을 얻은 거칠부는 관직에 나가 대아찬의 지위까지 올라갔고, <국사> 편찬의 공으로 파진찬이 되었다.

진흥왕 12년(551)에 거칠부, 구진 대각찬, 비대 각찬, 탐지 잡찬, 비서 잡찬, 노부 파진찬, 서력부 파진찬, 비차부 대아찬, 미진부 아찬의 여덟 장군이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 작전은 백제와 공동으로 펼친 것으로 한강 유역 탈환 작전이었을 것인데, 거칠부 열전에는 백제군이 평양을 쳐부수었다고 나온다. 이때 평양은 물론 남평양 - 즉 서울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거칠부 등은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개 군을 빼앗았는데, 이때 혜량법사와 다시 만나게 된다. 이것으로 보아, 거칠부가 넘어갔던 고구려 땅도 이곳이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혜량법사는 신라로 귀순하여 승통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561년에 진흥왕과 함께 창녕 지방에 갔으며 이 사실은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에 남아 있다.

568년에는 진흥왕과 함께 마운령에 갔으며 이 사실도 마운령진흥왕순수비에 남아 있다. 이때 거칠부의 관등은 이찬이었다.

576년, 진지왕 원년에 상대등이 되어 군사와 정치를 도맡았는데, 아마도 역사가로서는 최고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 아닐까 싶다. 거칠부는 579년에 죽었다고 나오는데, 열전에는 몰년이 적혀 있지 않다. 글을 쓰다보니 어디에 몰년의 근거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진평왕이 즉위한 뒤에 상대등이 갈린 것으로 추정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그렇게 보기에는 물음표도 없이 단정지어져 있어서 내가 모르는 근거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대체로 좋은 역사가는 발로 뛰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래도 잡학을 두루 섭렵하여 박학다식해지는 것이 좋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거칠부는 젊어서 사방을 돌아다니며 이런 역사가로서의 소양을 갖추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덧글

  • 꽃곰돌 2012/04/16 01:29 #

    발로 뛰어야 한다는 건 기자도 비슷한 게 아닌가 싶네요
  • 초록불 2012/04/16 07:55 #

    그런 면이 있습니다. 천관우 선생은 기자이면서 뛰어난 역사가이기도 하셨죠.
  • 2012/04/16 06:49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12/04/16 07:57 #

    눈을 더럽히게 해드려 죄송할 따름...^^

    상식이 있다면 유사역사학에 빠져들지도 옹호하게 되지도 않는 법이죠.
  • hyjoon 2012/04/16 08:19 #

    유지기는 사학자의 자질로 史學, 史識, 史才를 꼽았는데, 아무래도 발로 뛴 역사가들에게서 날카로운 史識(개인적으로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식견이라고 생각합니다)이 돋보인다고 느껴집니다. 사마천도 『사기』를 쓰기 전에 중국 전역을 돌았고, 투퀴디데스나 헤로도토스도 광범위하게 여행을 했던 사람들이니......
  • 초록불 2012/04/16 08:39 #

    말씀하신대로 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였습니다...^^
  • LVP 2012/04/16 08:59 #

    그나저나. 이제 이덕일+이유립도 넣어달라는 괴성이 들려올 때가 됬는데...'ㅅ')
  • 초록불 2012/04/16 09:02 #

    현대까지 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애초에 시비거리가 안 되죠.
  • LVP 2012/04/16 09:19 #

    고대 한반도에 잠수함이 나왔다고 빡빡 우기는 어린이가 있는데, 그까짓 사학자 생몰년도 조작쯤이야...'ㅅ')
  • 잠꾸러기 2012/04/16 09:55 #

    거칠부 이름 설명을 보니 삼국시대 인물들중 몇몇에 대한 궁금증이 반쯤은 해소되고 있습니다. 독특한 작명센스나 정말 '거'씨인가?? 등등 말이죠.ㅋ

    하지만 노리사치계는 음....--;;
  • 초록불 2012/04/16 13:29 #

    그런데 거칠부의 거칠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 야스페르츠 2012/04/16 10:23 #

    잘 보았습니다. 갑자기 쓸데없는 영감이 떠올라 트랙백했습니다. ^^
  • 초록불 2012/04/16 13:30 #

    잘 보았습니다. 가볍게 적은 글이라 그 부분을 깊이 논의할 필요가 있는가 싶었는데, 이후 언급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만... 게을러서 안 할 듯... (대체 뭔 말을 이렇게...)
  • zerose 2012/04/16 10:58 #

    확실히 고구려나 백제의 역사가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군요. 그리고 발로 뛰어야 한다는 건 역사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 초록불 2012/04/16 13:30 #

    부지런할수록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겠지요...^^
  • 파랑나리 2012/04/16 11:05 #

    역시 역사가는 발로 뛰어야 해요. 역사가로서 재상이 되었으니 이것 참 부럽군요. 그리고 유기, 신집, 서기, 백제삼서, 국사, 구삼국사, 그 밖에 삼국사기 이전에 나온 모든 사서가 몽땅 일서가 되어서 원통합니다.
  • 초록불 2012/04/16 13:30 #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 초효 2012/04/16 13:25 #

    "고고학자가 되고 싶나? 그럼 도서관을 벗어나라고!"

    인디아나존스4에 나오는 대사죠. 영화의 소재나 내용은 거시기 하지만 뭐...
  • 초록불 2012/04/16 13:31 #

    고고학자의 꿈을 길러주는 인디아나 존스... 하지만 현실은...^^
  • 셔먼 2012/04/16 15:32 #

    저도 발로 뛰어다니고 싶지만 아직 체력도 안 되고 역사가도 아니니 애매합니다.;;
  • 초록불 2012/04/16 20:00 #

    취미로 하는 거야 저도 마찬가지고, 발로 뛰지 않는 것도... (먼산)
  • 굔군 2012/04/16 15:52 #

    근데 저렇게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편찬해서 그런지, 저는 신라의 역사가 가장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당연히 신빙성에 대해서야 뭐(...)
    보통 신라인들이 정리한 기록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신라본기가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에 비해서 신빙성이 더 높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아요.
  • 초록불 2012/04/16 20:01 #

    이강래 선생은 거칠부 이전과 이후의 서술이 달라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 2012/04/18 02:29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12/04/18 07:00 #

    무슨 말씀인가 한참 생각했지 뭡니까...^^
  • CSH 2012/04/18 18:42 #

    서기, 유기, 국사.. 발견되면 한국사 완전 뒤집힐수도 있겠네요
  • 초록불 2012/04/18 21:59 #

    뒤집히는 정도가 아니라 곤두박질치더라도 좀 나와주면 좋겠어요..^^
  • 굔군 2012/04/18 22:37 #

    그런데 솔직히 그런 사료가 발견된다고 해도 한국사가 뒤집힐 거라는 데에는 조금 회의적입니다.

    아마 앞으로도 나올 일은 없을 거예요. 이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에도 없었던 것 같으니까...

    그리고 설령 발견된다 할지라도 그걸 사료로 취급하기에는 심히 병맛스러울(...) 가능성이 매우 높지요.

    내용이 <삼국사기>보다 좀 더 자세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걸 글자 그대로 믿기에는 매우 곤란할 겁니다. 사료의 발견이 곧 그것의 신빙성까지 담보해 주는 건 아니니까요.


    솔직히 <삼국사기> 이전의 사서들이 어떤 형태였을지는 이규보가 인용한 <구삼국사>의 편린만 봐도 대충 짐작이 가지요. 얼마나 많은 신화적인 기사들로 점철되어 있었을지...ㅡㅡ;
  • 붉은잎 2012/04/18 22:40 #

    굔군//꿹;;
  • Crescent Moon 2012/04/19 16:07 #

    역시 사람은 직접 발로뛰어야하는군요

    서기나 국사.유기가 사본이라도 발견되면 정말좋을텐데말입니다!

  • 초록불 2012/04/19 16:22 #

    타임머신이라도 개발이 되어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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