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가 8 [수정] *..역........사..*



14. 고려 : 박인량

박인량(? ~ 1096)은 앞에서 다뤘어야 하는데, 깜빡 빼먹은 케이스. (먼산)

박인량은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1075년(문종 29)에 요나라에 진정표陳情表를 보내 요가 보주(지금의 의주) 지역에서 철군하게 만들었다. 박인량은 천하에 왕토가 아닌 곳이 어디 있느냐는 말로 요나라를 띄운 뒤에 춘추전국시대에 제나라가 노나라에게 땅을 돌려준 문양지전의 고사와 한나라 경제 때 장사정왕 발의 고사를 들어 땅을 돌려받았다. 장사정왕이 경제 앞에서 춤을 추는데 소매를 시원하게 휘두르지 못하고 서투르게 춤을 추어 그 이유를 물었더니 봉국이 좁아서 제대로 출 수가 없다고 대답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스스로를 낮추는 말로 영토를 넓혔으니 충분히 남는 장사를 했다 하겠다.

1080년에는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여기서도 글재주로 주목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태풍을 만나 공물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통에 귀국한 뒤에는 한차례 야단을 겪기도 했다. 송나라 황제가 특별히 죄를 묻지 말라고 해서 무사할 수 있었다.

지은 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설화집인 <수이전殊異傳>이 있다. <수이전>은 지금 전해지지 않지만 열 편의 글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전해지고 있다. (삼대목은 못 구해도, 이건 어디서 좀 나와주면 좋으련만...) 설화를 통해서도 역사의 편린을 볼 수 있긴 하지만 박인량을 굳이 언급하는 것은 그가 <고금록古今綠>이라는 열 권짜리 역사책을 썼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만들어진 뒤 비부秘府(비밀스런 장소라는 이야기인가?)에 보관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전해지지 않아서 그 내용을 알 수는 없다.

15. 고려 : 실록편수자들 (1)

고려에서는 실록 제작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초기 기록을 복구하기 위해

고려사 세가 현종 4년 9월
병진일에 이부상서 참지정사 최항(崔沆), 감수국사 예부상서 김심언(金審言), 수국가 예부시랑 주저(周佇), 내사사인(內史舍人) 윤징고(尹徵古), 시어사 황주량(黃周亮), (右拾遺) 최충(崔冲) 등을 모두 수찬관(修撰官)으로 임명하였다.


이런 팀을 꾸린 바 있고, 이중 황주량에 대해서는 야스페르츠님이 정리한 바도 있다.

7대실록 제작 후에 실록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숙종실록에 대한 이야기가 나타난다.

고려사 세가 인종2년(1124) 3월
기사(己巳)에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 이덕우(李德羽)가 사망하였다. 그는 문한(文翰)으로 자부(自負)하여 일찍 《숙종실록(肅宗實錄)》을 편수(編修)한 공로로서 호부 시랑(戶部侍郞)을 제배(除拜)하였다.


이덕우는 1100년, 숙종5년에 우습유右拾遺 벼슬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서문하성 소속의 종6품 벼슬이다. (습유가 벼슬 이름이고 좌, 우로 붙여서 부르는 것임) 1108년 요나라에 천흥절天興節(황제의 생일) 사신으로 다녀왔고, 1110년에는 종4품인 중서사인으로 승진했다. 1112년(예종7년)에는 종3품의 전중감殿中監으로 승진하고 다시 요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전중감은 고려 왕실의 족보를 담당하는 관청이다. 책임자는 판사(정3품)이고 그 바로 밑이 전중감이다. 이 언저리에서 숙종실록을 편찬했던 것일까?

역사책은 아니지만 이덕우가 손댄 또 하나의 희한한 책이 하나 있다. 음양지리, 그러니까 풍수학에 대한 내용을 집대성한 책 <해동비록海東秘錄>이다.

고려사 세가 예종 1년(1106) 3월
정유(丁酉)에 유신(儒臣)과 태사관(太史官)에게 명하여 회령전(會寧殿)에 모여 음양 지리(陰陽地理)에 관한 제가(諸家)의 서적(書籍)을 산정(刪定)하게 하였다. 이에 1책(冊)으로 편찬(編纂)하여 올리니 책명(冊名)을 하사(下賜)하여 《해동비록(海東秘錄)》이라 하였다. 정본(正本)은 어부(御府)에 소장하여 두고, 부본(副本)은 중서성(中書省)·사천대(司天臺)·태사국(太史局)에 하사(下賜)하였다.

고려사 열전 김인존金仁存
일찍이 최선(崔璿)·이재(李載)·이덕우(李德羽)·박승중(朴昇中) 등과 더불어 음양(陰陽)·지리(地理)의 제서(諸書)를 산정(刪定)하여 올리거늘 《해동비록(海東秘錄)》이라고 이름을 하사하였다.


1106년에 편찬된 책이니, 종6품과 종4품 사이일 때 참여한 것이다. 저 이름의 순서가 관직의 순서라면 뒤에서 두번째인 셈이다.

이 <해동비록>이라는 책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아마도 <고려사>에 등장하는 <신지비사神誌祕詞>·<도선밀기道詵密記>·<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삼한회토기三韓會土記> 등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이거 어디서 안 나오나...)

<해동비록> 편찬자 중 박승중은 실록 편찬에도 관여했다.

고려사 세가 인종 즉위년(1122) 9월
을해(乙亥)에 명하여 《예종실록(睿宗實錄)》을 편수(編修)하게 할 때,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 박승중(朴昇中)·한림 학사(翰林學士) 정극영(鄭克永)·보문각 대제(寶文閣待制) 김부식(金富軾)을 편수관(編修官)에 충용(充用)하였다.


예종실록 편찬자에 들어있는 정극영은 박승중과는 사이가 무척 나빴을 것 같다. 박승중은 이자겸의 딸랑이였는데, 정극영은 이자겸을 무척 싫어했기 때문이다. 정극영은 이자겸 때문에 귀양을 가기도 했고, 이자겸의 난이 평정된 뒤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박승중은 이자겸이 생일날 생일 이름을 지어보라고 했을 때 - 이런 건 굉장히 참람된 짓 - 관원들이 거부하자 얼른 "인수절仁壽節"이라는 이름을 지어올릴 정도였다. 박승중의 아들 박심조도 이런 아첨꾼이어서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을 때 궁중 변소에 있었는데, 상황이 급박하다 여기고 똥물이 질펀한 채로 변소에서 뛰쳐나와 이자겸에게 달려가 상황 보고를 했을 정도. 이자겸은 새옷을 주어 위로를 했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전해온다.

예종실록의 편찬을 주장한 사람은 정극영의 보스라 할 수 있는 한안인韓安仁이었는데, 당연히 이자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자겸은 한안인도 섬으로 유배시켰고(이때 한안인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하여 50여 명을 숙청했음) 자객을 보내 바다에 던져버렸다. (고려 시대에는 이렇게 섬으로 보내는 배에서 바다로 던져버리는 일이 자주 있었던 것 같다. 개중에는 헤엄쳐서 살아돌아온 사람도...)

인종실록은 김부식이 편찬했음은 김부식 편에서 이야기했고...

고종14년(1227) 9월 경진(庚辰)에 감수국사(監修國史) 평장사(平章事) 최보순(崔甫淳), 수찬관(修撰官) 김양경(金良鏡)·임경숙(任景肅)·유승단(兪升旦) 등이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찬(撰)하여 사관(史館)에 장치(藏置)하고, 또 한 본(本)으로써 해인사(海印寺)에 장치(藏置)하였다.

최보순(1162 ~ 1229)은 문장을 잘하고 청렴한 사람이었는데, 금나라 황제 즉위 축하문이 금황제의 비위를 거슬리는 바람에 일시 파직되는 필화를 겪은 바 있다.

유승단(1168∼1232)은 최우가 강화도 천도를 결행할 때 홀로 과감하게 천도 반대의 의견을 낸 꼿꼿한 인물이다. 그는 침착하고 박학다식하며 문장에 뛰어났다고 한다. 유교 뿐 아니라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고 누군가 질문을 하면 의심이 가지 않게 잘 해석해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충렬왕3년(1277) 5월 임인(壬寅)에 감수국사(監修國史) 유경(柳璥), 수국사(修國史) 원부(元傅), 동수국사(同修國史) 김구(金坵)에게 명하여 《고종실록(高宗實錄)》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유경(1211∼1289)은 고종 실록만 편찬한 것이 아니라 신종, 희종, 강종, 고종의 4대 실록을 편찬했다. 유경은 최씨 무신정권을 끝장낸 공신이고, 임연이 김준을 죽인 것을 비난했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유배 중에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는데 그때 유배지 강화도를 탈출해서 고종에게 달려간 충신이기도 하다. 치부를 잘해서 삼한의 거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문장이 좋고 인물을 잘 알아보았다. 김방경이 무고를 당했을 때 끝까지 변호해서 김방경의 목숨을 구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원부(? ~ 1287)는 유경이 급제시킨 인물이다. 1284년 감수국사監修國史로서 <고금록古今錄> 편찬에 참여했다. 이름으로 보면 뭔가 역사와 관련되는 책이라 생각되는데, 불행히도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물론 위에서 이야기한 박인량의 <고금록>과는 다른 책이다. 이 책의 편찬에는 허공許珙과 한강韓康 등이 참여했다. 이중 허공은 원부와 함께 신종, 희종, 강종 실록 편수에 참여했다. (그리고 고금록은 공민왕 때 또 한 번 편찬된다. 이 편찬은 이인복李仁復(1308∼1374)이 했는데, 일부 사이트에서는 <고금록>을 원부, 허공, 한강, 이인복이 했다고 나온다. 살던 시대가 다른데, 이게 왠말이람. (원부나 허공이나 다 죽은 뒤에 이인복이 태어났다! 이인복에 대해서는 다음에 한 번 다루도록 하겠다.) 

허공(1233 ~ 1291)도 원부와 마찬가지로 유경이 급제시킨 인물이다. 그는 거문고를 잘 탔는데 하루는 그의 거문고 소리에 반한 옆집 처녀가 월장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허공은 흔들리지 않고 그 처녀를 예의로 설득하여 물러나게 했다. (사실 그 처녀가 못 생긴 건 아니었을지...) 무신 정권의 마지막 주자 임연은 허공의 딸을 며느리로 삼고 싶어했는데, 허공은 거절했다. 그 후 임연이 대숙청을 감행한 뒤 허공은 몇 안 되는 살아남은 대신이 되어 임연을 돕게 되었다. 후에 합단적 침공 때 몸을 사리지 않고 애쓰다가 병을 얻어 사망했다. 청렴하기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김구(1211 ~ 1278)는 유경과 함께 4대 실록편찬에 모두 참여했다. 김구는 할아버지가 중이었기 때문에 청직에 나갈 수 없다는 반대도 있었지만 사람이 워낙 강직한 것으로 소문이 나서 무사 통과를 했다. 김구 때는 몽고인들이 들어와 있던 터라, 통역들의 역할이 중대했다. 그런데 통역들이 사리사욕을 챙겨서 엉터리 번역을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김구는 국가에서 공인 통역 기구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통문관을 설립했다.

고종실록과 원종실록은 충선왕 때 만들게 했다는 기록은 있는데 누가 만들었는지는 고려사에 나오지 않는다.





너무 길어져서 (2)편은 다음에... (이래놓고 또 3개월 후에?)

*
박인량과 <고금록> 관련해서 몇가지 수정을 했음... (처음 할 때 잘하란 말이다!)

덧글

  • 굔군 2012/07/15 06:54 #

    음...고려실록이 현재까지 전해졌다면 고려시대의 역사가 좀 더 풍부해졌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게 가장 궁금합니다.
  • 초록불 2012/07/15 09:44 #

    당연한 이야기죠...^^

    그나마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남아있어 다행이지만, 이렇게 걸러지지 않은 당대의 기록이 남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편에서 언급할만한 사건이 있긴 합니다.
  • 역사관심 2012/07/15 13:35 #

    쓸데없는 상상:
    1080년에는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여기서도 글재주로 주목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태풍을 만나 공물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통에 귀국한 뒤에는 한차례 야단을 겪기도 했다

    >> 사실 잃어버린게 아니라, 이분이 어떤 섬에 숨겨뒀다는. 그래서 그 사실을 가문의 대를 잇는 장자한명에게만 대대로 알려왔는데, 21세기에 마지막 후손이 그것을 알게 되어...어쩌구저쩌구.

    일본 드라마나 만화는 이런식의 실사를 약간 뒤튼 전개가 꽤나 많죠 ㅎㅎ. 우리도 한번 해봄이.
  • 초록불 2012/07/15 16:33 #

    고등학교 때 썼던 시놉시스 중에 그런 게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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