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0년. 고려 최고집권자인 최항은 계모 대씨의 아들 오승적吳承績을 바다에 던져 죽였습니다.
최항의 계모인데, 왜 아들 성이 최씨가 아니고 오씨였을까요?
대씨는 대장군으로 사공까지 오른 대집성의 딸로 본래 오씨 집안에 시집가서 오승적을 낳았는데, 최우의 후처로 들어간 것입니다. 대집성은 최우의 심복 중 한 명이었죠. 1232년에 과부가 된 딸을 최우에게 보냈습니다. 미모가 상당했는지, 최우는 몽고군과 전투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책임도 묻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승적이 살해된 이유는 그가 김미金敉의 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미는 누구일까요?
김미는 최우의 사위 김약선의 아들이었습니다. 김약선은 최우의 사위로 권력 후계자로 여겨지기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색을 하도 밝힌 것이 화근이 되지요. 김약선의 바람에 질려버린 아내, 즉 최우의 딸은 맞바람으로 대응합니다.
그러니까 "홧김에 서방질"이라는 속담을 실천한 것이죠. 상대는 자기집 종.
이 사실을 안 김약선은 자기가 한 일은 생각지도 않고 꼭지가 돌았습니다. 위기에 몰린 최씨 부인은 자기 남편을 무고해버립니다. 아버지 최우에게 김약선이 역모를 꾀했다고 말해버린 겁니다. 최우는 자객을 보내 김약선을 처치해버립니다.
김미는 바로 이렇게 제거된 김약선의 아들. 즉 최우의 외손자입니다. 김약선을 제거한 뒤 최우는 자기가 너무 성급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심복을 무고로 제거한 것을 후회하고, 딸을 쫓아내버렸죠. 이렇게 되면 김미에게는 동정표가 쏠릴 수 있습니다. 후계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때문일까요? 바로 무고가 들어왔습니다. 1243년의 일입니다.
최우는 김미의 측근 35명을 수장해버립니다. 김미는 강제로 출가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최우의 후계자는 서자 최항으로 기울어져갔습니다. 김미는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최우의 선심으로 강화도로 돌아온 김미는 1249년 삼촌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김미의 삼촌...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김경손金慶孫. 몽골군과 싸워 이겼고 백제도원수 이연년李延年의 난 때는 적군에게 포위 당했으나 30명의 부하만으로 싸워서 이연년의 목을 베어버린 레전드였죠.
하지만 그런 김경손도 최우를 거스릴 수는 없었는지, 혹은 정말 충심이 있었던 것인지 조카의 도움 요청을 고해바치고 맙니다. 이 일로 김미의 측근 40명이 강물에 던져지거나 귀양을 가게 됩니다. 김미는 고란도로 유배되고, 김경손도 백령도로 유배되고 말지요.
그리고 최우는 그 해 11월에 죽고 맙니다. 정권을 잡은 최항은 자신에게 밉보인 인물들을 아낌없이 죽여버리는데, 바로 그 숙청의 칼날에 오승적도 걸려든 것이죠. 오승적과 김미는 친척 관계인 모양인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승적은 죽지 않았습니다. 어두운 밤인 데다가 밀물 때여서 오승적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오승적은 일단 중으로 위장하고 금강산으로 피해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해, 오승적은 어머니 대씨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대씨는 아마도 사방으로 도움을 요청한 모양인데, 밀성(지금 밀양)으로 간 계집종이 일을 서투르게 해서 기밀이 누설되고 말았습니다. 밀성 부사는 이 사실을 최항에게 알렸고, 최항은 불같이 노하게 되죠.
대씨는 최항에 의해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독살되고, 오승적도 다시 붙들렸습니다. 오승적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한 야별초 황보창준皇甫昌俊 등 6명은 참수되었습니다. 이외에 이 일에 연관된 대씨 일족 등 70여 명이 죽거나 유배되었습니다.
그리고 충성심을 보였던 김경손도 이번 일로 살해되고 맙니다. 최항은 장군 송길유宋吉儒를 보내 김경손을 바다에 던져버리게 했죠. 다만 이 일로 김미도 처형되었는지 어땠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아마도 최항의 성질로 보면 이때 살해되었을 것 같습니다만...
한 번 바다에 던져졌던 오승적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래서 확실히 죽고 말았죠. 1251년, 구사일생한 것 치고는 안타깝게도 1년 밖에 목숨을 연장하지 못했네요.
바다에 던져지고 살아남은 인물은 하나 더 있는데, 그 친구 이야기는 역시 시간 날 때 하도록 하겠습니다...^^;;
덧글
라는 어떤 성불구자 모사꾼의 대사가 생각나는군요.... 요새 너무 얼불노만 파고 있나봅니다. ㅋㅋ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요즘 조폭처럼 살인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는 아닐테고요...
그낭 시신도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러고 보니 이성계도 고려 왕씨들을 수장시켰다는 의혹(?)이 있군요
권력을 '나에게 달라'고 떼쓸까봐 제거!
조선으로 오면 줄어드는 이유가 온전한 시신을 남겨 준다거나 최소한 뭍에다 묻힐 수 있게 해준다는 등의 사고관 변화가 한 몫한 거 아닐까 싶네요.
그러고 보니 마한인지 백제인지의 연못에서도 묶인 여자 시신이 발견된 적이 있었죠. 관나부인 일화도 그렇고 정말 오래된 풍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