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백성은 언제 간도에 들어가 살았을까? *..역........사..*



간도가 조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대개 이렇습니다.

1. 조선에서 6진을 개척했을 당시는 두만강이 국경 맞음.
2. 청나라가 건국한 뒤 중원으로 들어가 봉금령(1677년)이 내리고, 간도는 무주공산이 되었음.
3. 그후 그 땅으로 조선 사람들이 넘어가 개척하기 시작했음.
4. 청나라에서 이 문제로 영토를 획정하고자 목극등을 파견함(1712년).
5. 목극등은 토문강(송화강 지류)을 국경으로 했기에 간도는 조선 땅이 되었음.
6. 일제가 만주로 진출하기 위해 간도협약을 맺어 간도를 팔아넘긴 뒤,
7. 백두산정계비를 폭파해서 증거를 날려버렸음.


1번은 이야기할 게 없고요.
2번을 봅시다. 봉금령은 여진족 이외의 종족이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지, 그 동네를 무주공산으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뭐 그렇다 칩시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저 1677년에서 1712년 사이에 조선이 국경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었는지나 한 번 보죠.

이 직전인 1675년의 숙종실록 기록을 먼저 볼까요?

숙종 3권,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5월 28일(병술) 2번째기사
청나라 사람 3인이 쌀을 구걸하자 주어 돌려 보내다

청(淸)나라 오랑캐 3인이 두만강(豆滿江) 상류(上流)에 이르러 쌀을 구걸(求乞)한 일이 있었다. 북병사(北兵使) 이간(李旰)이 아뢰기를,
“오랑캐 옷을 입은 3인이 풍산진(豊山鎭)의 강 북쪽에 이르러서 큰 소리로 부르면서 강을 건너려 하며 말하기를, ‘나는 실제 중국인(中國人)인데, 청(淸)나라는 오삼계(吳三桂)가 반란(反亂)을 일으킨 뒤로부터 더욱 외롭고 약해졌습니다. 나는 귀국(貴國)으로 피해 들어가고 싶습니다.’ 하고 인하여 슬피 울면서 약간의 쌀을 구걸하였는데, 만호(萬戶) 김경록(金景祿)이 이를 거절하여 강은 건너오지 못하게 하고 한 말 가량의 쌀을 주어 돌아가기를 독촉하였습니다.”


굶주린 한인이 국경인 두만강으로 와서 구걸을 하는 장면입니다. 두만강이 국경이라는 점에 의문이 있을 수 없지요.

1697년 숙종실록의 기록을 볼까요?

숙종 31권, 23년(1697 정축 / 청 강희(康熙) 36년) 5월 18일(정유) 2번째기사
영중추부사 남구만이 《성경도(盛京圖)》라는 지도를 바치다

대체로 두만강(豆滿江) 북쪽은 지금은 비록 다른 지역이 되었지만 실로 이곳은 우리 목조(穆祖)·익조(翼祖)께서 임금을 탄생하게 한 곳이니, 주(周)나라에 비교하면 바로 불굴(不窋) 이 스스로 융적(戎狄) 틈으로 도망한 것과 고공(古公)이 도혈(陶穴)에서 살았던 것과 같습니다. 지금 두만강 북쪽인 알동(斡東)과 해관성(奚關城) 사이는 옛날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만하며, 그 곳에는 철룡(鐵龍)이 산에 묻히고 백마(白馬)가 물을 건넜다는 고사는 변방의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이야기로 전하고 있습니다. (중략)
압록강과 두만강 두 강의 근원이 모두 백두산 꼭대기에서 출발하여 동서(東西)로 나뉘어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나라의 계한(界限)입니다. 때문에 지금 이 성경도(盛京圖)에도 이렇게 조선(朝鮮)의 경계를 두 강의 남쪽으로 쓴 것입니다.


중국에서 만든 지도 [성경도]를 바치면서 남구만이 올린 말인데, 보시다시피 두만강 북쪽은 다른 지역이라는 말과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경계를 삼는다는 말이 분명히 나옵니다. 이 시기에 조선 백성들이 월경을 해서 간도 지방을 개척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네요. 그랬건 안 그랬건 이 시기에 두만강을 국경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지면서 '토문강'이 등장해서 문제가 많아졌는데, 이 당시 정계비에 의거해서 푯말을 세우러 갔던 관리 홍치중이 조정에 바친 내용이 왕조실록에 있습니다. 홍치중은 백두산에서 발원한 네갈래 강물을 모두 조사했는데, 이때 목극등이 이야기했던 첫번째 발원수가 두만강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내버립니다.

숙종 52권, 38년(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12월 7일(병진) 3번째기사
백두산 정계가 잘못된 것에 대한 겸문학 홍치중의 상소. 이에 대한 논의와 거산 찰방 허양의 공술 내용

그래서 신이 허(許)와 박(朴)【거산 찰방(居山察訪) 허양(許樑)과 나난 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이다.】 두 차원을 시켜 함께 가서 살펴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고하기를,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東北)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홍치중은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미 강의 수원이 과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청차가 정한 것임을 핑계로 이 물에다 막바로 푯말을 세운다면, 하류(下流)는 이미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향해간 곳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국경의 한계는 다시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뒷날 난처한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에 빠집니다. 목극등이 잘못했다고 고했다가 앙심을 받게 되거나 다른 질책이 떨어지게 될까 걱정이 된 겁니다. 그야말로 약소국의 비애입니다. 그러니까 조선 조정은 이 착오로 땅을 더 얻게 되어서 기쁘다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없고, 이걸 청나라한테 알리면 긁어 부스럼이 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을 합니다. 이런 걱정은 현장에 있던 이런 목소리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한치익은 또한 ‘저는 변방 국경에서 생장한 사람이기에 피차(彼此)의 지형을 잘 알고 있는데, 이 물은 분명히 북쪽으로 흘러가고 두만강으로는 들어가지 아니합니다. 만일 혹시라도 두만강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한다면 뒷날에 제가 마땅히 터무니없이 속인 죄를 입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부동산 계약서에 상대가 실수를 했는데, 그걸 기화로 날로 먹으려 드는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걸 날로 먹으려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무서웠던 거겠지만... (청나라와는 두 번 싸워서 대패한 전력이 있습니다.-정묘호란, 병자호란)

그럼 백두산정계비 이후에는 뭔가 상황이 바뀌었을까요? 별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경종 10권, 2년(1722 임인 / 청 강희(康熙) 61년) 12월 1일(임자) 4번째기사
제조 이태좌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방도에 대해 아뢰다

저들의 경계(境界)인 선춘령(先春嶺) 이남은 우리 북로(北路)와 서로 연화(煙火)를 볼 수 있고, 일대(一帶)의 두만강으로 대략 저들과 우리의 경계를 한정하였을 따름이니, 만약 무산(茂山)·갑산(甲山) 사이에 이르게 되면, 곧바로 텅비어서 거침이 없는 사람이 없는 땅입니다.


이때 이태좌는 목극등이 와서 두만강을 경계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강희제 사후에 저들이 만주로 돌아오면 일어날 변란에 대해서 대비해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시점에도 여전히 두만강을 국경으로 인식하고 있지요,

그럼 영조 때 기록을 한 번 볼까요?

영조 74권, 27년(1751 신미 / 청 건륭(乾隆) 16년) 8월 2일(을미) 1번째기사
명천·부령·온성에 들쥐가 두만강을 건너 넘어오다

명천현(明川縣)·부령부(富寧府)·온성부(穩城府)에 들쥐[田鼠]가 여진(女眞)의 경계로부터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넘어왔는데 부리는 길고 꼬리는 짧았다. 온 들판에 가득하여 낮에는 땅속에 들어가 숨어 있고 밤에는 밭 사이로 나와 서직(黍稷) 등 여러 곡식을 혹은 씹어 놓기도 하고 혹은 꺾어 놓기도 하여 한 줄기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두만강이 국경이라는 점이 여기도 분명합니다. 영조 때 기록을 하나 더 볼까요?

영조 92권, 34년(1758 무인 / 청 건륭(乾隆) 23년) 7월 26일(경술) 1번째기사
함경도 온성 유학 오태섭이 올린 청의 차사원의 폐단에 대한 상서

(전략) 무산(茂山)과 경흥(慶興)의 경우는 하나는 두만강 상류에 있고 하나는 두만강 하류 지방에 있어서 오랑캐 사람[虜人]들의 거래(去來)하는 것과 관계가 없으며, 오로지 종성(鍾城)과 온성의 두 고을만은 두만강 중반의 요충지에 있으면서 회령부·경원부 2부의 사이에 끼어 한 해를 걸러서 청나라 차사원이 반드시 경유하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상소 내용을 보면, 두만강 상류와 중류, 하류를 모두 다루고 있습니다. 호시互市가 열려서 거래를 했던 것을 지목하고 있는데, 여기에 시장이 열렸다는 것도 두만강이 국경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송화강이 국경이었다면 국경을 지나서 한참이나 들어와서 동쪽 끝에 있는 시장에 왔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영조 114권, 46년(1770 경인 / 청 건륭(乾隆) 35년) 5월 13일(기축) 1번째기사
병조 참의 신일청이 산성의 수리와 봉수로의 정비 등에 대한 상소를 올리다

경성(鏡城)의 5진보(鎭堡)는 장백산(長白山) 밑 가장 궁벽한 곳에 있어 변경을 지키는 자와 관계가 없으니, 합하여 한 대진(大鎭)으로 만들어 무산의 서북, 두만강(豆滿江)의 발원처(發源處)로 옮겨 설치하고, 그 진졸(鎭卒)에게 요미(料米)를 후히 주며 병기(兵器)를 보강하여 본부(本府)와 군세(軍勢)를 서로 호응하게 하면, 저들이 비록 승승 장구하는 기세가 있을지라도 반드시 뒤를 돌아보는 데에 견제(牽制)되어 감히 경솔히 무산령(茂山嶺)을 넘어서 남쪽으로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청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 강구인데, 국경인 두만강을 지킬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왜 송화강(토문강)을 지킬 계획은 이야기하지 않을까요? 그 강이 국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조 때 기록도 봅시다.

정조 5권, 2년(1778 무술 / 청 건륭(乾隆) 43년) 1월 13일(갑술) 1번째기사
유학 남재흥이 폐사군(廢四郡) 지역 중 후주에 고을을 설시할 것을 상소하다

대개 압록강(鴨綠江)·두만강(豆滿江) 두 강의 근원은 다같이 백두산에서 나와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흐르다가 바다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는 곧 우리 나라의 경계(境界)입니다.


여기서도 두만강이 국경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정조 16권, 7년(1783 계묘 / 청 건륭(乾隆) 48년) 12월 8일(을축) 1번째기사
감진 어사 이재학이 치계하여 교제곡을 이운해 주기를 청하니 회유하다

남관(南關)은 북관보다 비록 백성은 많고 곡식은 적다고는 하지마는, 땅이 양서(兩西)와 접해져 있으므로 민생들을 옮기거나 곡식을 옮기거나 하여 본시 서로가 필요해지는 방도가 있지만, 북관에 있어서는 이미 영동(嶺東) 곡식의 운반이 힘든데다가 또한 교제곡 수송(輸送)을 아끼고 있고, 두만강(豆滿江) 이북은 곧 우리 땅이 아니므로, 아! 저 부황이 든 무리들이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북도에 흉년이 들어서 곡식을 보내는데, 수송이 어려운 점을 한탄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남도는 땅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운반이 편하지만, 북도는 두만강 이북은 남의 나라라서 쉽게 곡식을 받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점에도 여전히 두만강이 국경입니다. 이보다 분명한 이야기가 있겠나요?

그러니까 대체 언제 간도에 조선 사람들이 들어가 살고 있을까요? 역시 정조 대 기사를 하나 봅시다.

정조 20권, 9년(1785 을사 / 청 건륭(乾隆) 50년) 7월 14일(신유) 3번째기사
장진에서 후주까지의 지형과 장진보 설치에 대한 논의

대체로 무산(茂山)은 저들(청나라) 지역과 땅이 연결이 되어 육진(六鎭)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만강(豆滿江) 수백 리에 번호(蕃戶)가 가까이에 사는 일이 전혀 없고, 장파의 동쪽은 사냥하는 오랑캐도 이르지 않는 곳이므로 파수(把守)를 드물게 설치한 것도 역시 이러한 때문인 듯합니다. 요컨대, 무산의 서쪽 수백 리에는 한 곳의 관방(關防)도 없으니 장파에 진을 설치하는 것은 별로 말할 만한 폐단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먼저 조그마한 진보(鎭堡)를 설치하고 새로이 입주(入住)한 백성에게 세역(稅役)을 견감(蠲減)하고 환곡(還穀)을 출납(出納)하다가 백성이 많아지고 토지가 개척(開拓)되기를 기다려서 고을을 설치하고, 진으로 승격시킴은 오직 전하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두만강 상류 부근에 진보를 개척하는 논의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이 근처가 황량하고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죠. 두만강 이남에는 아무도 안 살고, 두만강 이북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당연히 그 문제가 이야기되었어야 하겠지요?

두만강 방어에 대해서 논의하는 장면을 봅시다.

정조 21권, 10년(1786 병오 / 청 건륭(乾隆) 51년) 1월 22일(정묘) 21번째기사
북관의 방어, 금군, 능에 거둥할 때 백성들의 구경 금지 등을 논의하다

부총관 유진항(柳鎭恒)이 북관의 방어에 관한 일을 말하였는데, 묘당에 하달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북병사가 행영(行營)으로 이주하는 일을 구례에 따라 변경하지 않은 것은 어찌 의의가 없겠습니까? 두만강이 얼어붙은 뒤에는 저쪽의 육지와 연결되므로 애당초 조그만 경계도 없습니다. 지금은 번호(藩胡)가 작란하는 우환은 없으나, 강변에 파수를 세워서 불의의 우환을 대비하는 것은 나아가면 나아갔지 물러나지 않는다는 병가(兵家)의 계략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북쪽에 본영과 행영을 두어 옮겨 가서 주둔하거나 돌아와서 주둔하는 것과 남병사가 교대로 하나의 비장(裨將)을 파견하여 행영을 지키게 하는 규모와는 사세를 비교해 볼 때 큰 차이가 납니다. 그냥 두소서.”


두만강이 얼어붙을 때 오랑캐가 공격을 해올까 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죠. 역시 이곳이 국경이기 때문에 나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두만강을 넘어가는 이야기는 순조 때인 1803년이 되면 나옵니다. 도망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하러 가는 등의 이야기네요.

순조 5권, 3년(1803 계해 / 청 가경(嘉慶) 8년) 5월 11일(갑진) 2번째기사
북평사에서 체임되어 돌아온 부교리 박종정이 변금(邊禁)이 엄중하지 못함을 논하다

이보다 앞서 부교리 박종정(朴宗正)이 북평사(北評事)에서 체임(遞任)되어 돌아온 뒤로 상소하여 변금(邊禁)이 엄중하지 못함을 논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육진(六鎭)은 모두 극변(極邊)입니다. 단지 두만강(豆滿江) 일대로서 남북의 한계(限界)를 삼고 있는데, 그 너비는 거룻배도 용납할 수 없고, 그 깊이는 치마를 걷고 건널 수 있으므로, 금방(禁防)이 조금 허술해지고 방수(防守)가 점차 해이해지면, 범월(犯越)의 근심이 곳곳마다 도사리고 있습니다. 무산(茂山)의 초피(貂皮)와 인삼은 모두가 우리 나라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고, 경원(慶源)의 은화(銀貨)는 대부분 피지(彼地)에서 무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이 잠시라도 얼어 붙으면 나무하고 꼴을 베는 아이들이 다니는 길이 이루어지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은 마치 외부(外府)처럼 보고 완악한 풍속이 법기(法紀)를 알지 못하니, 구탈(甌脫)이 서로 바라보이는데도 간두(奸竇)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또 오랑캐의 산에는 초목(草木)이 무성한데, 우리 나라 경내(境內)에는 민둥산이 되었으니, 백성들이 금법(禁法)을 무릅쓰는 것은 오로지 이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빨리 본도에 신칙(申飭)해서 거듭 변금(邊禁)을 엄중히 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땔나무가 부족한 지역에 이르러서는 또한 그 땅을 관할하는 수령으로 하여금 특별히 나무 심는 법을 할당해 가르치게 함으로써 10년의 이로움을 기다려 훗날의 용도에 이바지하게 한다면, 폐해를 구제하는 한 가지 방도가 될 듯합니다. 묘당(廟堂)에 하문(下問)한 뒤에 인하여 엄중히 신칙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다.


우리 땅에는 나무가 없고 두만강 너머 남의 땅에는 나무가 많은 이유가 뭘까요? 네, 그쪽에는 사는 사람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조선 사람들이 넘어가서 살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1877년에 이르러서야 두만강을 살기 위해 넘어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종 14권, 14년(1877 정축 / 청 광서(光緖) 3년) 3월 5일(신유) 4번째기사
함경도 차수곡 마련과 육진에서 변경을 넘는 문제 등에 관해 의정부에서 아뢰다

백두산의 북쪽은 청(淸) 나라의 경계와 서로 잇닿아 있고 두만강(豆滿江)의 동쪽은 직접 러시아〔俄羅斯〕의 경계와 접해 있습니다. 토착 주민들의 생계가 열악하고 백성들의 부역(賦役)은 점점 무거워지니 짐을 메거나 지고서 변경(邊境)을 넘는다는 놀라운 소식이 종종 들립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백두산 북쪽은 청나라 경계라고 나옵니다. 간도에 대한 영토 인식은 전혀 안 보이죠. 사람들이 넘어가는 이야기는 1884년에 보입니다.

고종 21권, 21년(1884 갑신 / 청 광서(光緖) 10년) 5월 14일(무자) 3번째기사
혜산진을 옮겨 설치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함경 감사(咸鏡監司) 임한수(林翰洙)의 장계(狀啓)를 보니, 종성 부사(鍾城府使) 홍시형(洪時衡)의 치보(馳報)를 낱낱이 들어 아뢰기를, ‘중국 사람 세 명이 와서 공문(公文)을 전하기에 그 내용을 보니, 길림(吉林) 돈화현(敦化縣)에서 보낸 공문이었는데, 토문강(土門江) 북쪽 기슭을 차지한 채 개간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유민들을 다 데려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회답 공문을 먼저 만들어 보내고 유민을 찾아오는 문제는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변경을 조사하는 문제는 종성 부사가 작년에 이미 돈화현에 공문을 보내어 알린 것이 있으니, 도신(道臣)이 다시 이 내용으로 자세히 공문을 보내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자, 토문강이 국경이었다면 청나라는 왜 이 사람들을 데려가라고 했을까요? 아무튼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이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점은 1903년의 기록을 보아도 분명한 것 같습니다.

고종 43권, 40년(1903 계묘 / 대한 광무(光武) 7년) 8월 11일(양력) 1번째기사
이범윤을 특별히 관리로 임명하여 북간도에 주재시키다

내부 대신 임시 서리 의정부 참정(內部大臣臨時署理議政府參政) 김규홍(金奎弘)이 아뢰기를,
북간도(北間島)는 바로 우리나라와 청(淸) 나라의 경계 지대인데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북쪽 변경의 연변의 각 고을 백성들로서 그 지역에 이주하여 경작하여 지어먹고 살고 있는 사람이 이제는 수만 호에 십 여만 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청인(淸人)들의 침어(侵漁)를 혹심하게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에 신의 부(部)에서 시찰관(視察官) 이범윤(李範允)을 파견하여 황제(皇帝)의 교화를 선포하고 호구를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이번에 해당 시찰관(視察官) 이범윤의 보고를 접하니, ‘우리 백성들에 대한 청인들의 학대가 낱낱이 진달하기 어려우니, 특별히 굽어 살펴 즉시 외부(外部)에 이조(移照)하여 청나라 공사와 담판을 해서 청나라 관원들의 학대를 막고, 또한 관청을 세우고 군사를 두어 많은 백성을 위로하여 교화에 감화되어 생을 즐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우선 호적(戶籍)을 만들어 수보(修報)한 것이 1만 3,000여 호(戶)입니다.
이 사보(査報)에 의하면, 우리나라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아 온 것은 이미 수십 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인데 아직 관청을 설치하여 보호하지 못하였으니 허다한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청나라 관원들의 학대에 내맡기니 먼 곳을 편안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소홀함을 면치 못합니다. 우선 외부(外部)에서 청나라 공사와 상판(商辦)한 후에 해당 지방 부근의 관원(官員)에게 공문을 보내어 마구 재물을 수탈하거나 법에 어긋나게 학대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의 경계에 대해 논하는데 이르러서는, 전에 분수령(分水嶺) 정계비(定界碑) 아래 토문강(土門江) 이남의 구역은 물론 우리나라 경계로 확정되었으니 결수(結數)에 따라 세(稅)를 정해야 할 것인데, 수백 년 동안 비어 두었던 땅에 갑자기 온당하게 작정하는 것은 매우 크게 벌이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선 보호할 관리를 특별히 두고 또한 해당 간도 백성들의 청원대로 시찰관(視察官) 이범윤(李範允)을 그대로 관리로 특별히 차임하여 해당 간도(間島)에 주재시켜 전적으로 사무를 관장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게 하여 조정에서 간도 백성들을 보살펴 주는 뜻을 보여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보다시피 1903년에 수십년 전부터 간도에 들어갔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인식의 틀에서는 간도 지방이 본래 우리땅인데, 단지 비어져 있었을 뿐이었다고 규정되고 있죠.

1884년에 이런 식의 인식이 등장한 바 있습니다. 사실은 계약서의 잘못(목극등이 애초에 잘못해놓은 것이죠)을 이용해서 간도를 차지할 수 있다는 논의가 생겨난 것이지만.

고종 21권, 21년(1884 갑신 / 청 광서(光緖) 10년) 6월 17일(기축) 5번째기사
친기위의 일 등에 관하여 지현룡이 상소하다

부호군(副護軍) 지현룡(池見龍)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함경도(咸鏡道) 변경에서 나서 자랐으니, 함경도에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두만강(豆滿江) 북쪽과 백두산(白頭山) 아래의 분수령(分水嶺)을 기준으로 동쪽, 남쪽, 서쪽으로 1,000여 리 둘레의 비옥한 땅은 바로 선덕(宣德) 연간에 절제사(節制使) 김종서(金宗瑞)가 강토를 개척하여 목책(木柵)을 세운 지대이며, 지금 경원부(慶源府) 동북쪽 700리와 선춘령(先春嶺) 이남의 2,000여 리 둘레의 땅은 바로 고려(高麗) 때 시중(侍中) 윤관(尹瓘)이 고을을 설치하고 성을 쌓은 지대입니다.
강희(康熙) 계미년(1703)에 오라 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이 칙지(勅旨)를 받들어 변방을 조사할 때에 돌을 캐어 비석을 세워 ‘서쪽은 압록강(鴨綠江)이고 동쪽은 토문강(土門江)이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에 이것은 실제로 중국에서 경계를 정해서 땅을 갈라놓은 것인데 까닭 없이 그 땅을 상국(上國)에 돌려준 것은 본디 예가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상국에 자문(咨文)으로 진달하여 기어코 얻어냄으로써 영토를 넓히기 바랍니다. (중략)

이에 대한 조정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조목은 시폐(時弊)를 논한 것이기는 하지만, 제대로 살피지 않아 망령되고 경솔한 말이 많으니 매우 놀랍고 한탄스럽다.”
하였다.


네, 이때만 해도 망령된 말이라 생각했으나 20년이 지난 후에는 조정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간의 인식은 여전히 두만강이 국경입니다.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2월 2일(갑진) 3번째기사
김우용이 강한 군사를 길러내는 방법에 관하여 상소문을 올리다

그런데 피차간의 경계선을 가른 형편을 보면 백두산(白頭山) 위에 큰 못이 있어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두만강(豆滿江)이고 서쪽으로 흐르는 것이 압록강(鴨綠江)인데 그것이 우리와 저들 사이의 경계로 되고 있습니다. 압록강 첫 어귀의 읍인 갑산(甲山), 삼수(三水), 후창(厚昌), 자성(慈城) 등 10개의 읍으로부터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는 강변의 아래위가 1,500여 리이고, 두만강 첫 어귀의 읍인 무산(茂山)으로부터 회령(會寧), 종성(鍾城) 등 5개 고을을 거쳐 경흥(慶興)에 이르기까지는 강변의 아래위가 700여 리입니다. 만일 강한 군사로 서쪽과 북쪽을 단단히 지킨다면 우리나라를 만 년의 천연 보루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다시피 여전히 두만강을 국경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인 거죠.

긴 이야기였으므로 세 줄 요약을 하자면...

1. 압록강과 두만강은 조선 전기 이래 조선의 국경이었다.
2. 숙종 때 청나라 사신 목극등은 국경 획정에서 실수를 했다.
3. 간도에 조선 백성이 이주한 것은 1880년대 이후였다.






생각난 김에 거의 왕조실록만 보고 작성한 것이니 놓친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추가]
간도 문제에 대해서는 슈타인호프님의 아래 포스팅을 보시면 좋습니다.

http://nestofpnix.egloos.com/4235131 [클릭]
http://nestofpnix.egloos.com/4233539 [클릭]


덧글

  • 진성당거사 2012/10/06 23:14 #

    실록만 보고도 저렇게 명백한 얘기를 끝까지 안보여 안들려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저 답답하고 한심할 뿐이지요.
  • 초록불 2012/10/06 23:17 #

    조상님들이 일처리를 상당히 꼼꼼히 하고 있다는 것을 실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Masan_Gull 2012/10/06 23:21 #

    그런거 없고 우리나라의 고대 영토는 바이칼호까지 였으므로…(퍽퍽}
  • 초록불 2012/10/06 23:58 #

    고대 영토는 바이칼호까지...
    연대 영토는 파미르 고원까지...
    서울대 영토는 시베리아까지... (퍽퍽퍽!)
  • santalinus 2012/10/07 16:21 #

    틀려요! 고대 우리나라 영토는 은하계까지라구욧!
  • swordprime 2012/10/13 17:56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을파소 2012/10/06 23:35 #

    실록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다 변조한 겁니다.(퍽)
  • 초록불 2012/10/06 23:59 #

    나름 진지하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인간이 있어서 진심 놀란 적이 있습니다.
  • 곧은나무 2012/10/06 23:39 #

    하지만 한국사 교과서도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지라. 그 교과서로 배운 다음에 인터넷에서 간도 떡밥 관련 글을 보면 더 그럴듯 해 보이죠.
    거의 대부분의 교과서가 같은 논조를 취하고 있는 걸로 봐서는 교과부의 검정기준에 포함돼 있는 듯 합니다.
  • 초록불 2012/10/07 00:00 #

    원래 교과서가 만악의 근원입니다... (먼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교과서와 어긋나는 이야기를 하면...

    - 저 놈은 교과서도 따르지 않는다! 라고 하고,

    교과서와 일치하는 이야기를 하면...

    - 저 놈은 교과서만 신봉하는 놈이다! 라고 하죠. (이것은 꽃놀이패!)
  • 슈타인호프 2012/10/06 23:45 #

    http://nestofpnix.egloos.com/4233539

    http://nestofpnix.egloos.com/4235131

    제가 했던 옛날 포스팅인데 보조자료가 되면 좋겠네요^^;;
  • 초록불 2012/10/06 23:58 #

    본문에 부기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위장효과 2012/10/06 23:45 #

    원래 우리의 영토는 저기 중동-수밀이!-까지 였다능!!!!!(재빨리 도주)
  • 초록불 2012/10/07 00:01 #

    그에 대해서 저들의 교주 문정창 선생의 견해를 저들이 알면 기절할 것 같습니다. (이 떡밥은 손 대면 정말 귀찮아서 안 던집니다...)
  • 굔군 2012/10/06 23:47 #

    하여간 그 놈의 봉금령 떡밥이 문제죠.
    봉금령은 그냥 사람들의 출입을 금한 거지, 자기네 영토가 아니라고 선포한 게 아니죠.
  • 초록불 2012/10/07 00:02 #

    이건 사실 울릉도에 왜인들이 들어와서 울나라 땅이야, 니들은 안 살잖아! 라고 말하는 상황과 똑같은 거죠.
  • 루드라 2012/10/07 00:04 #

    설사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그려진 양국간의 국경선 지도가 실제로 존재해서 그걸 눈 앞에 가져다 바쳐도 그 사람들은 인정 안 할 겁니다.
  • 초록불 2012/10/07 00:07 #

    존재하죠... 대동여지도가 있잖아요...^^

    그런데 진지하게 대동여지도도 일제가 날조한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 DeathKira 2012/10/07 00:05 #

    재밌는 걸 보면 강희~건륭 연간에는 조선이 저건 청 거라고 확신하는데 광서 연간에 이르러서야 인식변환.. 어찌보면 청의 성쇠도 인식 변환에 한 몫했을지 모르겠군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만주족이 자신들의 발상지인 만주를 조선령으로 인정할 리가 없는데 왜 기본적인 걸 생각하지 못할까요..
  • 초록불 2012/10/07 00:10 #

    그것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근대적인 영토 개념이 발생한 것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위에 적지는 않았지만 영조 때 백두산을 시찰하고 온 관리한테 정계비에 대해서 물어보는데, 그 동네 땅은 쓸 수 없는 땅인지라 잃어버려도 상관없다고 대답하기도 하거든요. 지금 입장에선 있을 수 없는 대답이죠.
  • DeathKira 2012/10/07 00:12 #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있었군요. 확실히 영토 관념의 차이도 고려해야 하겠죠.
  • 2012/10/07 00:0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10/07 00:1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누군가의친구 2012/10/07 00:34 #

    이젠 교과서도 간도에 대해서 솔직히 말해야 합니다.ㄱ-
  • 초록불 2012/10/07 14:49 #

    그럴 용기가 있을지...
  • 不慍_불온 2012/10/07 00:38 #

    간도협약 드립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간도협약과는 별개로 중국과 북한이 국경을 확정지었는 데, 이제와서 남한에서 뭐라고 한다는 게 참...
  • 초록불 2012/10/07 14:50 #

    100년 떡밥은 어디로 갔을까요...
  • 셔먼 2012/10/07 00:43 #

    어느 땅에 우리 나라 사람이 이주해 살면 그게 다 우리땅인 줄로만 아는 인식부터 뜯어고쳐야겠죠.
  • 초록불 2012/10/07 14:50 #

    그러니까 하와이도 우리땅! LA도 우리땅!
  • 셰이크 2012/10/07 01:35 #

    그나저나 "당신네 사람이 계약서를 잘 못 썼어요"라는 말 한자리를 그네들이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까 끙끙대며 못하는 모습이 참으로...
  • 초록불 2012/10/07 14:50 #

    약소국의 비애죠...
  • 검투사 2012/10/07 02:11 #

    일본이 하면 침략이고, 중국이 하면 공정이고, 우리가 하면 수복이죠.

    아무튼 조선에도 샘 휴스턴 같은 이가 없었던 게 누구들에게는 유감일 거라는...
  • 초록불 2012/10/07 14:54 #

    미국사는 수박 겉핥기라 무슨 말씀인지 대강만 알겠습니다...^^
  • 검투사 2012/10/07 19:27 #

    http://blog.naver.com/spartacus2/80036736133 이런 양반입니다.

    저도 책 만들면서 알게 된 양반인지라...

    그건 그렇고 조선족 사람들을 "반짱깨"라 부르며 무시하고 차별하려 드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의 대한민국은 절~대~~로~~~ 나오기를 기대할 수 없는 인물이 아닐까 합니다. -ㅅ-
  • Masan_Gull 2012/10/07 04:49 #

    문정창 관련 이야기도 포스팅 부탁드리면 안될까요?

    한때 초센 피플과 수밀이로 드립을 치고 다니던 입장에서
    사실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드립도 치는건데 말입니다;;
  • 초록불 2012/10/07 14:55 #

    이게 좀 긴 이야기가 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문정창의 세계관에서는 수메르는 동이에서 갈라져나간 역사일 뿐이고, 이스라엘은 또 수메르에서 이어진 역사로 사실상 우리 역사와는 아무 관련도 없지요.
  • 뒤죽박죽 2012/10/07 07:16 #

    어떤 대륙빠는 봉금령을 내린게 색불루 단군(맞나?)의 신성한 영토라 건들지 말라며 애초에 울나라땅이라는 궤변을...(도망)

    덤 : 근데 대륙빠는 이미 1번사항을 거부할 겁니다.
    덤2 : 진짜 간도를 되찾자고 주장하는 애들이 1번사항을 언급하나요?
  • 초록불 2012/10/07 14:56 #

    간도 떡밥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여기서 다룬 것은 정상적인 상태에서 낚여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죠. 대륙론자들은 애초에 대륙에 대한 환상을 깨주는 것으로 초점을 맞춰야죠.
  • 고독한별 2012/10/07 07:30 #

    예전에 어떤 분이 '땅이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으니, 간도가 우리 땅이라고
    우길만한 근거가 있으면 무조건 우겨서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시던 기억
    도 납니다.
  • 초록불 2012/10/07 14:57 #

    맞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접근시키면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주장을 하는 것도 일본 입장에서는 맞는 거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 고독한별 2012/10/07 21:10 #

    문자 그대로 대략 난감합니다.
  • 리리안 2012/10/07 09:21 #

    무주지하면 생각나는게 독도...ㅡㅡ; 울릉도 독도도 수백년간 비워뒀으니 같은 논리인데 무슨 생각으로 간도는 우리땅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초록불 2012/10/07 14:57 #

    우리 것은 우리 것. 남의 것도 우리 것이니까요.
  • 2012/10/07 10:2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10/07 14:5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천지화랑 2012/10/07 12:37 #

    여진족과 우리는 같은 겨레이니 만주는 당연히 우리땅이라능!(응?)
  • 초록불 2012/10/07 14:59 #

    하지만 여진족도 아닌 2~3세대 전에 갈라진 조선족과 부딪치자...

    이 뙤놈들! 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고 있죠.
  • 한도사 2012/10/07 12:47 #

    그랬군요... 이래서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 초록불 2012/10/07 14:59 #

    이 떡밥은 워낙 광대하게 퍼져 있어서요...
  • 붉은잎 2012/10/07 16:18 #

    네이버에서 뛰놀다가 대한제국때는 이범윤을 파견하기도 하는 등 간도에 행정권이 미치는 것 같긴 하던데.. 고종이 간도를 불법점령했던것 맞나요?
  • 슈타인호프 2012/10/07 19:51 #

    이범윤을 파견했을 때도 간도 지역의 청나라 행정관들은 그대로 주재하면서 자기 일 하고 있었습니다. 간도관리사를 파견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도 결국 허상입니다.
  • 굔군 2012/10/07 20:49 #

    간도에 관리를 처음 파견했던 게 1903년입니다. 이는 결국 뒤집어 말하면, 그 이전까지는 조선 땅이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조선시대에 관리가 파견되지 않은 영토는 존재하지 않았죠. 따라서 오래 전부터 간도가 조선의 영토였다면, 대한제국 시절에 와서야 처음으로 관리를 파견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겁니다.
  • 파랑나리 2012/10/07 23:57 #

    실록만 봐도 간도 떡밥은 논파될 수 있는 건데 국사교과서는 이 떡밥을 은근히 부추기고 있습니다. 교과서가 확실히 잘못되었습니다. 교과서가 문제입니다. 환빠와 다른 의미로. 조선까 부추기는 것도 그렇고요.
  • Leia-Heron 2012/10/08 12:10 #

    저것 때문에 낚여서 파닥거린게 몇 년인지...ㅠㅠ
  • santalinus 2012/10/09 12:46 #

    조선왕조실록이나 <<청사고>>(문제가 많은 책이긴 합니다만)의 관련부분을 조금만 꼼꼼히 읽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인데, 우기는 데는 답이 없긴 합니다;;;
  • swordprime 2012/10/13 17:54 #

    작년 한국사 수업때 간도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요 북간도 서간도 이주민들.. 그리고 간도 학살.

    근데 간도에 관한 언급은 고종이 간도 관리사를 파견하였다는 말에서 최초로 언급되는데 간도의 지형에 관한 지도도 없고 교과서나 학교수업에서는 좀 부실하다 느꼈어요...

    애들한테 간도가 어딜까? 물어보니 다 모름... 저도 처음엔 두만강 사이 섬인줄암...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유사역사아웃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구글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