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대마도를 정벌하다 1 *..역........사..*



고려는 내내 왜구의 침입에 시달렸는데, 조선이 건국된 뒤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규모는 작아졌지만 여전히 출몰하고 있었다.

태조 2년(1393) 3월에는 왜구에게 병선을 세 척 빼앗긴 고만량(충청도 보령 부근) 만호를 사형에 처하려다가 용맹을 아까워하여 용서하고 싸움에 나서게 하기도 한다. 이곳은 왜구들이 주로 노리던 곳으로 두 달 후에도 침입해서 병선 다섯 척을 빼앗고 만호 최용유崔用濡와 두 아들이 전사하기도 했다. 이 무렵에 왜구들이 전국에 걸쳐 발호했던 모양으로, 강화도, 인천 쪽은 물론 평안도 정주 쪽에도 나타났다. 정주에서는 왜구를 무찌르고 포로로 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을 구출하기도 했다.

왜구의 본거지는 대마도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태조는 드디어 대마도 정벌을 결심하게 된다.

태조 5년(1396) 한겨울인 12월 3일 대마도 출정군이 떠난다. 편성은 다음과 같았다.

오도 병마 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에 문하우정승 김사형金士衡 : 김사형은 이때 53세의 장년이었다. 침착하고 지혜가 깊으며 중후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도병마사都兵馬使에 예문춘추관 태학사 남재南在 : 남재는 이때 45세의 장년. 계산에 능해 어려운 문제도 척척 풀어서 남산南算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한다.
병마사兵馬使에 중추원 부사 신극공辛克恭 : 이모가 이성계의 후처인 신덕왕후 강씨이다.

태조 이성계는 원정군 대장인 김사형을 남대문 밖까지 전송하고 5도의 병선을 모아 일기도와 대마도를 치게 했다. 대신들은 한강까지 전송했으니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이성계는 김사형에게 내린 교시에서 정벌의 의지를 이렇게 분명하게 내보이고 있다.

"이제 하찮은 섬 오랑캐가 감히 날뛰어 우리 변방을 침노한 지가 3, 4차에 이르러서, 이미 장수들을 보내어 나가서 방비하게 하고 있으나,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수륙으로 함께 공격하여 일거에 섬멸하지 않고는 변경이 편안할 때가 없을 것이다."

김사형은 울주로 내려가 정벌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는데, 마침 이때 왜구들이 이곳으로 쳐들어왔다. 경상도 도절제사都節制使 최운해崔雲海와 계림부윤雞林府尹 유양柳亮·안동 부사安東府使 윤저尹柢 등은 왜구와 맞서 싸웠다. 일전에 아군이 패했으나 형세는 왜구들에게 불리했다. 왜구는 만호萬戶 임온林溫에게 항복하겠다고 전했는데, 최운해 등은 믿지 않았다. 항복을 맞으러 갔다가 왜구에게 살해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때 계림부윤 유양은 무장해제를 하고 당당하게 왜구에게 달려가 항복을 받았다.

한양에서는 12월 13일에 정벌군에 참여하고 싶다고 두 사람이 자원했고, 항복한 왜구 소식을 들은 태조는 12월 22일에 김사형에게 궁온宮醞(임금이 하사하는 술)을 내려 노고를 치하했다.

남은 왜적들도 항복을 하겠다고 전해와서 김사형은 일단 이들에게 양식을 주게 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유양이 몸이 아파 나갈 수가 없었기에 시일이 지체되었고 그러는 사이에 시간을 끄는 것은 왜구를 토벌하려고 시간벌기를 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고...

아무튼 동래의 의운義雲이라는 중이 왜구에게 가서 "관군이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공격하려 한다"고 말하는 통에 왜구는 지울주사 이은 등을 납치하여 대마도로 달아나버렸다. 이 중은 경상도관찰사 한상질韓尙質이 보낸 것인데, 유양이 잘 달래보라고 말해서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 중은 협박을 하면 되리라 생각해서 과장해버린 듯. 그리고 어마 무서라 한 왜구는 엉뚱한 관원을 납치해서 달아난 것이다. 이때가 1월 3일.

김사형은 급히 경상도 도절제사 최운해에게 왜구를 쫓으라 하였지만 최운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왜구들은 달아나버렸다. 열 받은 김사형은 최운해 뿐만 아니라 도착에 늦은 충청, 전라, 경기우도 절제사까지 모두 파직하고 영창에 가둔 뒤 후임을 임명해버렸다. 최운해는 매우 용감한 무장이었는데 이런 돌발사태에는 미처 대비치 못했던 모양이다. 최운해의 아들이 4군 개척의 명장 최윤덕이다.

다행히 이은 일행은 오해가 풀려서 한달여 만인 2월 9일에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은이 잡혀갈 때 울산군 아전 이예李藝와 박준朴遵은 배 뒤꽁무니에 올라타 함께 잡혀가기를 청했다. 왜구는 그런 모습에 감동해서 쫓아오는 것을 허락했다. (이때 이예는 22세의 청년이었다.)

대마도에 도착한 뒤에 이은을 죽이려 했는데, 그 와중에도 이예가 이은을 깍듯이 모시는 것을 보고는 감탄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은은 진짜 조선의 관리인 모양이다. 죽여서 좋을 것이 없겠다."

이예는 몰래 가지고 온 은식기 등을 뇌물로 바쳐서 어촌 구석에 유배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시킬 수 있었다. 그곳에서 몰래 배를 준비해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보낸 통신사 박인귀朴仁貴가 왜구들을 설득해서 이은 일행은 무사히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박인귀는 왜구들도 설득하여 처음 예정대로 항복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예는 그후 일본을 오가는 통신사로 크게 활약하게 된다.

다시 김사형 이야기로 돌아오자. 김사형은 1월 30일 한양으로 돌아왔고, 태조는 흥인문까지 나가서 김사형을 맞이했으며, 2월 8일에는 김사형을 위한 잔치를 열고 서대犀帶를 하사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정리를 해보자.

김사형은 대마도 정벌을 위해서 떠나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대마도로 간 것 같지는 않다. 대마도 정벌을 위해서 떠났다가 울주에서 왜구들을 만나 접전을 벌이고 멍청한 도절제사들을 물갈이 한 뒤에 다시 돌아온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김사형의 졸기를 살펴보아도 대마도 원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원정을 나갔다면 그처럼 큰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을리 없었으리라.

이 건을 살피기 전에는 나도 이때 대마도 정벌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지만, 살펴본 끝에 생각이 바뀌었다. 본격 조선의 대마도 정벌 이야기는 다음 편에... (쓰긴 쓰냐?)

[사족]
이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계림부윤 유양이다.

이은 납치는 결과적으로 유양이 사주한 것이라는 논핵이 있어서 유양은 한 달여 동안 심한 고문을 당했다. 죽을 것 같아 풀어주었다가 다음 해에 다시 고문을 가해야 한다고 했으나 다행히 이방원이 그를 위해 변호에 나서서 재산을 빼앗기고 귀양가는 것으로 그치게 되었다. 이때 또 한 번 고문을 당했으면 유양은 죽었을 것이다. 유양은 일찍이 왜구 침략을 맞아 싸울만큼 무예도 뛰어났고 백성들을 잘 다스려 생사당이 설 정도로 문에도 뛰어난 인재였다. 이후 태종 아래서 우의정까지 역임했었다.


덧글

  • 을파소 2013/02/02 18:36 #

    아무래도 태조 대의 대마도 정벌은 그전이나 이후에 비해 유명도가 떨어지는 거 같습니다. 이 시대가 사극으로 자주 다루어져도 워낙 소재가 많으니 대마도 정벌은 스킵해도 괜찮아서 그럴까요?(...)
  • 초록불 2013/02/02 21:46 #

    보통 역사책에 안 실려 있으니 드라마 작가들이 몰라서 안 다룬 거겠지요.
  • 마무리불패신화 2013/02/02 21:32 #

    중얘기가 잘 이해가 안가네요 왜구를 회유하기 위해 보냈는데 중이 협박을 한건가요?
  • 초록불 2013/02/02 21:45 #

    왜구에게 항복하라 보낸 건데, 가서 거드름 피우며 그랬겠지요. "너희들 개기면 수륙양군이 너희를 어육으로 만들거다, 그러니 어서 항복해라."

    돌아온 반응은... "아, 씨바, X됐네. 사절로 온 놈 잡아서 튀자."

    이 중은 자기가 일을 망쳐 먹은 걸 알고 도망쳐서 유양이 고초를 겪는 동안에도 코빼기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 검은하늘 2013/02/03 00:29 #

    ....결국 정벌은 없었던 거군요?
  • 초록불 2013/02/03 01:43 #

    네, 저는 그렇게 봅니다.
  • 악희惡戱 2013/02/03 00:56 #

    오타가 있네요. 고만량은 보은이 아니라 보령 부근입니다. 보은에는 바다가 없어요ㅎㅎㅎ
  • 초록불 2013/02/03 01:43 #

    아, 그렇네요...^^
  • 누군가의친구 2013/02/03 09:19 #

    드디어 칼을 뽑았는게 잡은건 모기라고 밖에는 설명할수 밖에 없군요.ㄱ-
  • 초록불 2013/02/03 14:12 #

    꼭 그렇다기보다는 다들 가기 싫었던 모양이에요.
  • 루드라 2013/02/03 14:45 #

    저때 이름이 등장한 울산군 아전 이예(李藝)는 이후 학성 이씨의 시조가 되죠.
  • 초록불 2013/02/03 14:48 #

    오호,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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