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대마도를 정벌하다 2 *..역........사..*



왜구의 준동은 태조, 태종 대에도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고려말처럼 대규모의 준동은 아니라 해도 연안에는 상시적인 습격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조정은 이 대비책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왜구는 평안도까지 출몰했기 때문에(물론 중국 연안도 약탈하고 있었다) 습격을 받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아군의 배가 왜선을 쫓아가려 해도 왜선은 작고 빨라서 도저히 잡을 수가 없는 것도 문제였다. 태종 3년(1403) 의정부에서는 작은 배를 만들어 쫓아가 잡게 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작은 배는 승선 인원이 적고 왜구와 단병접전을 하면 이긴다는 보장이 없으니 그렇게 쫓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태종 8년(1408) 전라도 수군 도절제사는 다시 한 번 빠른 배를 만들어서 왜구를 제압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린다.

태종 13년(1413)에는 항왜 평도전平道全[다이라도오젠]에게 왜선을 만들게 해서 조선 병선과 속도를 비교했는데, 물길을 내려갈 때도 뒤쳐질뿐만 아니라 거슬러 올라갈 때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이 무렵 재미있는 기록이 하나 있는데, 바로 거북선에 대한 것이다.

태종 13년(1413)에 태종은 임진강 나루 근처에 있다가 거북선이 왜선과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된다. 거북선은 배 갑판 위에 덮개를 씌운 배이기 때문에 왜구가 배로 뛰어들 수가 없다. 이 때문에 태종 15년에 거북선을 더 개량하고 튼튼하게 만들어 왜구에 대비해야 한다는 상소도 올라온다.

세종 1년(1419)에 충청도 비인현에 왜선 32 척이 들어와 대규모 분탕질을 친다. 죽은 사람만 3백이 넘는 대참극이었다.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된 태종은 즉각 원군을 보내도록 하고, 지난 번에 왜선을 제조했던 평도전도 충청도 조전병마사로 삼아서 항왜 16인을 거느리고 달려가게 했다.

본래 전라도 감사가 왜선들의 이동을 보고 충청도에 알려주었는데도 충청좌도 도만호 김성길金成吉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술을 마셔 만취한 상태에서 적을 맞이하는 바람에 대패하게 된 것이다. 왜구들은 본래 중국 절강을 털려고 출발했지만 식량이 모자라자 비인을 털고 다음에는 해주를 치는 걸로 계획을 바꾸었다.

김성길은 적이 쳐들어오자 아들 김윤과 함께 맞서 싸웠다. 접전 중에 왜구의 창에 찔려 김성길이 물에 떨어지니, 활을 쏘며 왜구를 쓰러뜨리고 있던 김윤은 아버지가 죽은 줄 알고 낙담하여 물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 하지만 김성길은 부상만 당했을 뿐 죽지는 않았다. 김성길은 뒤에 충청도 체복사 조치에 의해 참수형을 받고 말았다. 비록 방비는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부자가 용감히 싸웠는데도 둘 다 죽고 말았으니 사람들이 슬퍼했다. 특히 아들 김윤의 화살에 왜구 두목이 죽은 것도 나중에 밝혀져서 애석함을 더했다.

비인현에 침입한 왜구들은 비인 현감 송호생의 부상을 무릅쓴 투혼에 물러나서 애초 목표대로 해주를 공격했다. 왜구 두목이 당한 사실은 해주 목사 박영이 사로잡은 왜구를 통해서 알려진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해주를 구원하게 하는 한편, 차제에 대마도를 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논의를 시작했다. 쉽게 말하자면 대마도 왜구들이 몰려나와 해주에 있으니 이 기회에 빈 곳간이 된 대마도를 친 뒤에 왜구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 반격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었다. 이 때가 세종1년(1419) 5월 13일. (왜구가 비인현을 공격한 것은 5월 4일경, 해주를 공격한 것은 5월 12일 경이었다.)

이 회의는 다음날도 계속 되었다. 대신들이 태종의 빈집 털이에 반대하는 와중에 조말생만이 찬성을 하고 나섰다. 이에 힘을 입은 태종은 군사를 보내 왜구들의 처자식을 잡아와 거제도에 숨어 있다가 돌아오는 왜선을 공격하라는 작전을 수립한다. 왜구를 잡을 때 대마도 사람과 본토 사람을 구분하라는 세심한 명령까지 같이... (본토에는 대마도 정벌을 미리 알려 공연한 의심이 일지 않게 중의를 기하기도 했다.)

편제는 이러했다.

중군
삼군 도체찰사 이종무
중군 절제사 우박·이숙묘(이숙묘는 뒤에 박성양으로 교체됨)·황상

좌군
좌군 도절제사 유습
좌군 절제사 박초·박실

우군
우군 도절제사 이지실
우군 절제사 김을화·이순몽

경상·전라·충청의 3도 병선 2백 척을 동원하고 6월 8일에 견내량에 모이기로 했다.

이리하여 5월 16일 좌군 절제사 박초와 중군 절제사 우박이 충청·전라도의 병선과 군졸 및 기계를 점검하러 먼저 출발하고 18일에는 이종무와 장군들이 출발했다. 이날 중군과 우군이 떠나고 19일에 좌군이 떠났다.

6월 1일에 작은 사고가 있었다. 최윤덕(1편에 나온 최운해의 아들로 바로 4군 개척의 주역인 그 장군이다)은 내이포(창원)의 왜인들을 격리시키고자 했는데, 왜인들이 협조하지 않았다. 최윤덕은 난동을 부리는 자 21명을 참수해버렸는데, 그 중 하나가 평도전의 아들 평망고平望古였다.

평도전은 이미 이 원정에 앞서 벌어진 황해도의 싸움에서 열심히 싸우지 않고 아는 사람을 만나 목숨을 구해달라 청하기도 하고 대마도에는 조선이 대마도를 깔보고 있으니 한 번 대차게 대들어야 조선이 예전처럼 대접을 해줄 거라고 말하는 등 도를 넘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결국 평안도 양덕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것 같다.

6월 9일 태종은 대마도 정벌의 대의를 천명했다. 여기에 이 유명한 대목이 들어있어서 대마도는 우리땅이라는 말이 돌게 되었다.

"대마도는 본래 우리 나라 땅인데,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으로부터 변경에 뛰놀기 시작하여 마음대로 군민을 살해하고, 부형을 잡아 가고 그 집에 불을 질러서,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는 일이 해마다 없는 때가 없으니, 뜻 있는 선비와 착한 사람들이 팔뚝을 걷어 부치고 탄식하며, 그 고기를 씹고 그 가죽 위에서 자기를 생각함이 여러 해이다."

대마도 귀속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땅인데 왜 정벌을 떠나느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다. 이후 경과에서도 이곳이 조선의 영토가 아님은 명약관화하다.

6월 11일에 거제로 출발하기로 했으나 그날 떠나지 못하고 12일에야 거제로 이동했다. 17일 이종무는 227척(경기도 10척, 충청도 32척, 전라도 50척, 경상도 126척)에 17,258명의 군대와 65일치 양식을 가지고 대마도로 출발했다.

그러나 역풍이 부는 통에 돌아와 이피게니아를 아르테미스에게 바치고 다시 6월 19일 오전 10시 경 출발해서 다음날 12시 경 선발대가 대마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마도의 왜인들은 이 배가 자신들의 해적선이 돌아오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하기는 5월 13일 밤 원정 논의가 이루어져 한달여만에 원정군이 도착한 것이니 아직 정보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왜인들은 술과 고기를 가지고 환영하러 나왔다가 그 뒤로 수많은 배들이 속속 도착하는 것을 보고 멘붕!

그 와중에 용감한 왜인 50여 명이 대항하며 다른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고는 자기들도 퇴각하여 숨어버렸다. 아군은 왜인 104명을 죽이고 21명을 포로로 잡았다. 또한 정박해 있던 왜선 129척 중에 쓸만한 배 20척은 압수하고, 나머지는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마을도 불살라버렸다. 이때 타버린 가옥이 1,939 호였다.

이종무는 배 위에서 머무르며 군대를 섬으로 보내 수색을 계속하게 했다. 가옥 68호와 배 15척을 불사르고 9명을 참살했으며 조선인 포로 9명과 중국인 포로 15명을 구출했다. 하지만 왜인들은 깊이 숨어 접전을 꺼리고 있었기에 이종무는 제장들을 독려해 전투를 벌이게 했다. 이종무는 삼군이 모두 내려서 싸우라고 했다가 마음을 바꿔서 일 군만 파견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각 군 절제사에게 제비를 뽑게 했는데, 좌군 절제사 박실이 걸렸다.

26일 좌군 절제사 박실이 전진하다가 적의 복병을 만났다. 박실은 적이 강력하여 급히 구원 요청을 두 차례나 보냈다. 하지만 원군이 오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편장 박홍신, 박무양, 김해, 김희가 전사하고 병사도 백 수십여 명이 죽었다. 뒤늦게나마 우군절제사 이순몽과 병마사 김효성이 힘껏 싸워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순몽은 앞서의 전투에서도 우군의 다른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어도 자기 부대를 이끌고 선봉에서 열심히 싸웠던 인물이다.

이 전투 중에 중군은 배에서 내려 돕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대마도주 종정성宗貞盛[일명 도도웅와]은 화친을 바라는 편지를 보냈고 이 패전으로 기가 죽은 조선군은 철군을 결정한다.

7월 3일 이종무 군은 거제도에 입항했다.

이 시기에도 왜구들의 배는 연안을 약탈하고 있었다. 7월 3일 인천 앞바다의 소청도를 치고 4일에는 태안 앞바다를 지나 대마도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태종은 이 때를 기해 대마도로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왜구를 치면 되리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7월 9일 우의정 이원은 귀환 중인 왜구를 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반대론을 펼쳤다. 군사들이 돌아와 예기가 사라졌고 선박도 정비를 받아야 하며 언제 태풍이 불지 모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좌의정 박은은 지금 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태종은 이원의 주장으로 기울어진 상태.

7월 15일 현지의 장군들은 태종의 마음이 바뀐 것을 모르고 출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태종의 교지가 내려와 대마도 출정은 중지하고 왜선이 통과하면 그것만 격퇴하라는 명을 받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날 태풍이 불어와 병선 7척은 부서지고 1척은 침몰했다. 이때 7명은 물에 빠져 죽기까지. 그리고 8척은 바람에 날려가 버렸다.

결국 대마도에서 왜구의 뒤통수를 친다는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

7월 17일 태종은 대마도주 종정성에게 보내는 글을 조말생에게 쓰도록 했다. 이 편지는 항왜들에게 가져가게 했는데 만일 불손하게 나온다면 다시 정벌군을 일으키겠다고 말했다. 그 시기는 9월~10월 경으로 예정 되었다.

이번 전쟁에서 구출한 중국인들(총 142명)은 모두 중국으로 돌려보냈는데, 좌의정 박은은 그 중 11명은 아군의 패전을 목격한 사람들이니 돌려보내서 아군의 허실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돌려보내지 말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주장은 묵살되고 모두 돌려보내주었다.

8월 10일에 태종과 세종은 원정군 장수들을 불러 축하연을 열었다. 참석한 장군은 삼군도통사 유정현, 삼군 도체찰사 이종무와 최윤덕·이지실·이순몽·우박·박성양·박초·이천 등이었다. 유습, 박실, 황상은 병이나 아직 한양에 돌아오지 못해 참석하지 못했다.

특히 박실이 도착하지 못한 것은 좋지 못했다. 병조에서는 박실에게 패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장계를 올렸다. 박실은 13일에야 한양으로 왔는데 바로 의금부에 갇혔다.

그리고 의금부에서 조사 결과 이종무의 잘못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미 논공을 한 마당에 다시 벌을 준다는 것은 조정의 체면이 너무 깎이는 일이었다. 태종은 상관들도 벌을 줄 수 없는데 박실만 죄를 줄 수도 없어서 박실을 공신의 자식이니 면죄하라고 명해버린다. 박실의 아버지는 박자안으로 고려말에 박위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했던 인물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으로 9월 20일에 대마도주 종정성이 항복 문서를 보내왔다. 물론 이런 말을 조선 조정이 곧이 곧대로 믿은 것은 아니다. 그저 한 때의 위기를 넘기려는 수작으로 보고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이로부터 왜관을 지어서 그곳을 통해서만 교역과 사신이 지나다닐 수 있게 하자는 말이 나왔다.

또한 삼도에 명을 내려 재차 토벌에 나설 준비를 철저히 하라 명하는 한편 다시 대마도에 서한을 보내 제대로 항복하라고 재촉했다. 원정을 나가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닌 것으로 삼도의 백성들은 이 때문에 내빼기도 하는 등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결국 대마도의 상태도 좋아지는 것 같아서 2차 정벌은 없었던 일로 돌아가게 되었다.

왜구의 문제는 이 정벌 이후에도 획기적으로 개선되지는 않았다. 이보다 더 후일, 세종 22년(1440)에 전라도 고초도에서 어업을 허가해준 뒤로 서서히 줄어들게 되었다. 오히려 이때부터는 전선이 아닌 어선을 조선 군대가 때려잡아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아래 사족 말고 뜻밖의 에피소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건 다음 편에...

[사족]
세종 1년 12월 12일에 전라도 영광의 한 백성에게서 진정서가 올라왔다.

그 아비가 박실의 수하로 대마도 원정에 참여했다가 바로 그 패전 때 적 화살에 두 방을 맞고 칡넝쿨 아래 숨어 있었다는데, 지금껏 생사를 모르니 그것을 목격한 하인과 함께 대마도로 가서 아버지를 찾아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조정에서는 이것을 허락해 주었다는데, 과연 이 효심 깊은 아들은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을까?

덧글

  • 검은하늘 2013/02/03 15:37 #

    -.-a이종무가 칭찬받을건 하나도 없었군요. 근데 억울한 사람이 처벌받고도 보상이 없군요. 어디서 많이 봤는데요.
  • 초록불 2013/02/03 16:17 #

    식량을 65일분 준비하고 가서 보름만에 돌아왔으니 찜찜하죠. 처음 계획대로 왜구 선단을 두들기기라도 했으면 볼만 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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