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범한 불행 - 백정 당래 *..역........사..*



이것을 읽으며 저는 한 편의 소설을 떠올렸습니다. 언젠가 이 내용을 소재로 하여 뭔가 쓰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연산군 때 김포 현령으로 있던 박영창朴永昌은 백정 당래唐來와 미륵彌勒 형제를 만납니다. 당래와 미륵은 백정 출신이지만 몸이 날래고 용맹하니 대적할 이가 없었습니다. "당래"라는 말은 곧 올 것이라는 이야기고, 뭐가 곧 오냐 하면 미륵불이 곧 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당래나 미륵이나 다 같은 말로 이들 형제가 미륵신앙 - 세상을 개혁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정은 소를 잡는 일을 하는 천역 중의 천역이니 천하장사라 해도 그 힘을 어디 쓸 데가 없습니다. 더구나 양민들에게까지 천대를 받으니 울화는 얼마나 치밀었겠습니까? 결국 당래와 미륵은 강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박영창은 이들의 재주를 높이 사 심복으로 두었습니다. 불행히도 박영창은 연산군의 패악을 무심히 털어놓았다가 자리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박영창의 동생 박영문朴永文은 본래 생원시에 급제한 문관이었으나 무과로 전향해서 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당래, 미륵과 친해졌습니다. 박영문은 형 박영창이 잘린 다음 해에 중종반정에 참여합니다. 이때 당래와 미륵을 불러 함께 거사를 성공시킵니다. 박영문 휘하에는 이런 뛰어난 무사들이 많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자, 이제 문제가 생겼습니다. 원종공신(중종반정에 참여한 사람들)에 이름을 올린 전직 강도범인 당래와 미륵을 어떻게 대우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던 거죠.

당래와 미륵은 거사가 성공한 후에 몸을 숨겼습니다. 자칫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포도장捕盜將'을 시켜달라고 요구했죠. 포도장이란 도둑을 체포하는 관리로 이 시기에는 아직 포도청이 없어서 포도장이 각처에 임명되어 도둑 잡는 일을 전담했던 것 같습니다. 당래와 미륵은 자기들을 포도장을 시켜주면 도둑들을 다 잡아들이겠다는 말도 덧붙였죠.

대신들은 요구대로 포도장을 시켜서 이용하거나, 아니면 충찬위忠贊衛에 넣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말합니다. 충찬위는 원종공신의 자제들이 들어가는 특수 부대입니다. 어떻게 같은 반열에 세우겠어요.

중종은 백정 출신 강도를 충찬위에 넣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죠. 충찬위는 대궐 안에서 근무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포도장을 시키는 것도 어림 없는 이야기라 생각한 중종은 갑자기 새로운 벼슬을 만들어냅니다.

"도둑을 잘 아는 것들이니 숙지熟知라 이름 붙여서 포도장 밑에 두고 도둑을 잡아올리게 하라."

이렇게 해서 당래는 포도숙지가 되어서 한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난데없는 벼슬이니 제대로된 녹봉도 없고 생활만 어려워질 뿐이었습니다. 두달 여만에 가진 것 다 까먹은 당래가 투덜대기 시작하자 대신들은 당래에게 봉족奉足 두 사람을 붙여 먹을 것을 장만하게 했습니다. 봉족이란 나랏일 하는 사람에게 붙여주는 보조역으로 생활을 책임지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정도로는 궁핍이 해결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 시기에 한양에는 백정을 비롯한 천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연산군이 민가를 헐고 그곳에 재인과 백정들을 불러들였기 때문입니다. 당래는 이런 천민들과 친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들과 작당하여 다시 도적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반 년 후, 당래는 고향인 김포에서 포도대장 전림田霖에게 채포됩니다. 일당이 무려 23명. 아마도 동생 미륵도 같이 체포되었겠지요. 당래가 김포에서 무리를 모아 설치니 전림을 특별히 임명해서 체포하게 한 겁니다.

전림은 무인 출신이나 글도 제법 하여 이름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청렴하고 분수를 지킬 줄 안다고 평가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전장에 임해서는 냉혹하기 이를 데 없어서 도망치는 말을 활로 쏘아 죽여버리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는 걸 풀베듯이 해치우는 인간이어서 도적들 사이에서 전림을 만나느니 사나운 호랑이를 만나는 게 낫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전림이 병조참판일 때 밑에 아전 하나가 간사한 꾀를 부리고 있자 불러다가 "목을 뽑아버리겠다"고 호통을 쳐서 찍 소리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일화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전림은 아들이 미친 행패를 부리고 다니자 아들을 죽여버립니다. 그러고도 안타까워 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 정도의 인물이니 도적들에게는 어찌 대했겠습니까?

당래는 결국 처형되어 죽었을 것입니다.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웠어도 결국 벽을 넘어서지 못한 인물. 신분의 벽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인재를 옥 죄어서 이렇게 불행한 끝을 보게 했을까요. 이로부터 수십 년 후에 또 한 명의 백정 출신 도적인 임꺽정이 등장해서 세상을 흔든 일을 생각해도 참 아득한 생각이 들 뿐입니다.





후일담.

당래를 체포한 전림은 반 년쯤 후에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이때 친구인 김전金詮이 찾아오자 아픈 몸을 일으켜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이제 세상을 떠날 것이니 공과 전별하는 술을 마셔야 하겠소."라고 하면서 큰 잔으로 두 잔을 마시고 김전이 문을 열고 나가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당래를 반정에 끌어들인 박영문은 훗날 관직에서 밀려나고, 이에 불만을 품고 다시 한 번 반정을 꾀하다가 노비에 의해 발고되어 처형되었습니다. 박영문을 발고한 노비는 정막개鄭莫介라는 자로, 의정부의 관노로 박영문의 집을 들락거리다가 모반을 알고 발고해서 박영문의 가택과 전답, 노비를 모두 상으로 받고 벼슬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본래 교활해서 사람들이 싫어했고, 나중에는 발고를 늦게 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벼슬도 빼앗기고 사람들에게 놀림을 당하다가 보살펴주는 사람도 없어서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덧글

  • 2013/02/23 18:4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2/24 00:1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부여 2013/02/23 18:58 #

    정말 극적인 비극이네요. 초록불님 소설이라니, 평소 초록불님이 쓰시던 스토리 분위기와 정말 잘 맞는 소재인 것 같습니다. 방송국에 선수 뺏기지 않게 조심하시길...?
  • 초록불 2013/02/24 00:14 #

    장편용은 아니라서 그런 일은 별로 생길 것 같지 않습니다...^^
  • 셔먼 2013/02/23 19:48 #

    신체적으로 비범한 두 사내였지만 안타깝게도 시대를 잘못 만나 이런 파국으로 치달았군요.
  • 초록불 2013/02/24 00:14 #

    재주를 강도짓으로 밖에 쓸 수 없었으니...
  • 지녀 2013/02/23 19:58 #

    제일 처음에 등장한 인물이 저희 아버지 함자와 완벽하게(한자까지) 같아서 깜짝 놀랐네요 ㅎㅎㅎ
  • 초록불 2013/02/24 00:14 #

    무협작가 분 중에도 같은 성함이 있습니다. 혹시...
  • 지녀 2013/02/24 00:41 #

    네 그런 분이 있죠. 그때도 깜짝 놀랐던 경험이 있습니다 ㅎㅎㅎㅎ
    꽤 클래식(?)한 무협 작가이신데도 아시네요 ㄷㄷㄷ
  • 존다리안 2013/02/23 20:31 #

    전림 이양반 하드보일드하군요. 조선조 하드보일드라고
    이양반 일대기를 드라마로 만들면 어떨까요?
  • 초록불 2013/02/24 00:15 #

    조선의 하드보일드... 인기가 있을라나요...^^
  • 2013/02/23 21:39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2/24 00:1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검은하늘 2013/02/24 00:47 #

    주인의 반역을 발고한 노비에게 내려진 벼슬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초록불 2013/02/24 00:55 #

    당상관(정3품 이상)인 절충장군 상호군을 받았습니다.
  • 검은하늘 2013/02/24 01:38 #

    어디서 상호군을 봤나 했더니... 같은 성씨인 장영실 공이였군요..
  • 놀자판대장 2013/02/24 01:56 #

    인생무상이라는 느낌이 드는 이야기네요. 잘 봤습니다.
  • 초록불 2013/02/24 08:17 #

    고맙습니다...^^
  • jjangso 2013/02/24 23:19 #

    조선시대 느와르 한 편 나올 법한 이야기네요~~!!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 초록불 2013/02/24 23:39 #

    고맙습니다.
  • 하르페 2013/02/24 23:57 #

    윤승운 화백이 다룬 이야기에서 비슷한 걸 본 것 같은데...잠시 그것은 인조반정이었군요.

    거기서도 천한출신의 인물이 활약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이야기도 백정이었던가?

    오래전에 본 거라 잘 기억이 안나네요.
  • 초록불 2013/02/25 00:02 #

    인조반정 때 이야기면 이기축일 겁니다.
  • 하르페 2013/02/25 00:14 #

    정말 빨리 답변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백정 당래와 같은 이야기를 보니 옛날에 봤던 장길산 만화의 결말 장면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 명랑이 2013/02/26 18:34 #

    거참.. 벼슬을 시원찮게 줄것 같았으면 재물이라도 많이 쥐어줄 것을..
  • 초록불 2013/02/27 10:17 #

    글쎄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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