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간도 문제 *..역........사..*



1882년 청나라는 경원부사 이희영에게 공문을 보냈습니다. 공문의 내용은 조선의 빈민들이 국경을 넘어와 땅을 차지하고 개간하고 있으니 이들에게 세금을 걷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종 19권, 19년(1882 임오 / 청 광서(光緖) 8년) 8월 7일(경신) 3번째기사
의정부에서 길림과 훈춘에 공문을 보내는 문제에 관하여 아뢰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유연(金有淵)이 경원 부사(慶源府使) 이희영(李熙榮)의 치보(馳報)를 낱낱이 들어 말하기를, ‘훈춘(琿春) 사람이 공문(公文)을 가지고 왔기에 뜯어보니, 우리나라의 빈민(貧民)들로서 국경을 넘어가 땅을 차지하고 개간한 자에 대해 본국(本國)의 공문을 받아서 세금을 수납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중국의 각 아문(衙門)이 회답을 받아 길림(吉林)과 훈춘에 행회(行會)하였으니, 길림과 훈춘의 관부에서는 세금 수납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회답하는 조회(照會)를 지체해서는 안 되므로 일단 결재하여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조사하는 기일을 약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은 봄에 이미 자문(咨文)을 보내 회답하였으므로 이번에 철저히 조사하는 기일을 약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도신(道臣)이 좋은 쪽으로 헤아려 처리한 뒤에 등문(登聞)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청나라는 세금을 걷는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유민들을 아예 자국민화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조선 정부는 이에 대해서 그들을 다시 불러들이려 합니다.

고종 19권, 19년(1882 임오 / 청 광서(光緖) 8년) 8월 11일(갑자) 2번째기사
중국에서 길림 변경의 땅을 경작하는 함경도 빈민들에게 조세를 부과한 일 등을 토의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난번에 중국(中國) 예부(禮部)에서 길림 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이 아뢴 것에 근거하여 길림 변경의 땅을 차지하여 경작하고 있는 조선 함경도(咸鏡道) 빈민들에게 모두 본국의 공문(公文)을 받아서 세금을 바치게 하고, 저들의 판도(版圖)에다 예속시켜 저들의 정교(政敎)를 따르게 하며, 밖으로 드러난 것은 연한을 정해 놓고 옷차림을 바꾸게 하겠다고 자문(咨文)을 보내 왔습니다.
중국이 우리 백성들을 즉시 쫓아내지 않는 것은 대체로 회유하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므로 쇄환(刷還)하는 일을 속히 도모하지 않으면 거의 막을 방도가 없게 될 것입니다. 법의(法意)로 볼 때 어찌 빈둥거리며 헛되이 시간만 보낼 수 있겠습니까?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자문을 지어 들여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청나라가 막무가내로 조선인을 청국인으로 바꾸려 한 것은 아니고 이들은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고종 21권, 21년(1884 갑신 / 청 광서(光緖) 10년) 5월 14일(무자) 3번째기사
혜산진을 옮겨 설치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함경 감사(咸鏡監司) 임한수(林翰洙)의 장계(狀啓)를 보니, 종성 부사(鍾城府使) 홍시형(洪時衡)의 치보(馳報)를 낱낱이 들어 아뢰기를, ‘중국 사람 세 명이 와서 공문(公文)을 전하기에 그 내용을 보니, 길림(吉林) 돈화현(敦化縣)에서 보낸 공문이었는데, 토문강(土門江) 북쪽 기슭을 차지한 채 개간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유민들을 다 데려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회답 공문을 먼저 만들어 보내고 유민을 찾아오는 문제는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변경을 조사하는 문제는 종성 부사가 작년에 이미 돈화현에 공문을 보내어 알린 것이 있으니, 도신(道臣)이 다시 이 내용으로 자세히 공문을 보내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토문강이 등장했습니다! 백두산 정계비에 나오는 토문강. 토문강이 경계였다면 왜 토문강 북쪽 기슭에 있는 조선 사람을 내쫓겠다고 한 것일까요? 물론 이전 간도 관련 포스팅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백두산 정계비의 토문강은 두만강을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1884년 5월에 조선과 청나라는 무역협정을 합니다. 길림조선상민수시무역장정吉林朝鮮商民隨時貿易章程이라는 것인데, 여기에는 국경에 대해서 이런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제1조
두 나라의 변경은 토문강(土門江)을 경계로 한다. 토문강(土門江) 북안(北岸)과 동안(東岸)은 길림(吉林)에 속한 땅으로서 태반(太半)이 황폐해서 지난날 마을이 없었고 돈화현성(敦化縣城)은 강안(江岸)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이로부터 회령(會寧)과 강을 사이에 둔 화룡골[和龍峪]의 연강(沿江) 일대에 세무국(稅務局)을 설치하고 길림(吉林) 상인들이 집을 짓고 화물을 보관하게 하고 회령(會寧)과 강을 사이에 두고 상인들이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올 수 있도록 왕래에 편리하게 해준다. 길림(吉林)에서 상업업무를 감독하고 처리할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하고 불량행위를 하는 자들을 조사해내게 한다. 혼춘(琿春)과 경원부(慶源府)는 거리가 비교적 가까우므로 혼춘에서 관할하는 서보강(西步江) 나루터에 분국(分局)을 설치하고 따로 위원(委員)을 보내 세금을 징수하면서 조사하는 일까지 맡아보게 한다.


위 1조에서 이야기하는 토문강은 두만강입니다. 조약 내용을 보면 회령에서 강을 건너면 중국 땅이 되는 것인데, 그 강은 두만강일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토문과 두만은 혼동이 되어 마구 쓰이고 있었고 이런 것들은 훗날 양국 사이의 분쟁으로 남게 됩니다.

심지어 저 조약의 11조에는 토문강이 사라지고 도문강이 등장합니다.

제11조
길림과 조선은 도문강(圖們江)을 경계로 하여 길게 땅이 연결되어 있다. 두 나라에서 논의하고 결정한 시장의 대안(對岸) 나루터에 관에서 나룻배를 만들어 놓고 날마다 들어오고 나가는 화물을 조사하며, 상인들이 다른 곳에 건너다니는 배를 마련하고 길을 돌아 몰래 빠져나가는 폐단이 없게 한다. 강이 얼어붙는 시기에는 곳곳에서 길을 질러갈 수 있어 더욱더 엄격하게 순찰하고 단속해야 하며 상업에 관한 업무를 감독하고 처리하는 관리가 수시로 그 정형을 살펴 군사를 보내달라고 청구하여 중요한 곳을 택하여 주재시켜 순찰하며 단속하게 한다.


토문과 도문과 두만은 다 이름이 틀린데 그게 어찌 같은 것이냐고 따질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점은 우리측 기록에도 명백합니다.

그런데 이해 10월 서북경략사 어윤중은 백두산정계비의 탁본을 뜨게 하고 정계비의 토문강을 근거로 간도 지방의 영유권을 주장하게 됩니다. 청나라는 강경한 자세로 대응하게 되고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국경을 정확히 하자는 요청을 합니다.

고종 22권, 22년(1885 을유 / 청 광서(光緖) 11년) 4월 21일(기축) 1번째기사
토문강 경계 문제로 중국에 자문을 보내도록 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관북(關北)의 토문강(土門江) 경계를 조사하는 것과 중강(中江)에서 새로 세금을 제정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 사리를 밝혀서 타당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사실을 자세히 밝혀서 자문(咨文)을 만들도록 하고, 자문을 가지고 갈 관리를 따로 정해서 들여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리하여 1885년 9월 30일 제1차 감계회담(을유감계회담)이 열립니다. 우리측 책임자는 안변부사 이중하李重夏였습니다. 청나라는 백두산정계비에 토문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것은 진짜 토문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두만강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두 발음이 만주어에서는 비슷하기 때문에 이렇게 적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중하 역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회담 자리에서는 그 점을 무시하고 토문은 토문이고 두만은 두만인데 강희제의 유지를 거스르는 것이냐고 청나라 관원들을 압박합니다.

결국 이 문제는 해결을 보지 못하고 회담이 종료됩니다. 그런데 이중하가 따로 고종에게 올린 장계가 있습니다. 별단초別單草라는 것입니다. 이 별단초를 보면 이중하가 얼마나 노련하게 회담에 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두만강의 이름은 예전부터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중국과 왕래하는 공문서에 혹은 토문강이라고 칭하고, 또는 도문강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일찍이 변계邊界를 밝히지 않아서 그 칭하는 바를 크게 분별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이중하는 청나라에서 토문과 두만을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청나라 관원들을 바로 그 점으로 압박했던 것입니다. 청나라 관원들은 이중하의 논리를 깨뜨리지 못했고, 그래서 회담은 성과없이 종결되었던 것입니다.

다음 대목도 읽어보세요.

두만강은 옛날부터 방금邦禁[나라에서 금하는 일]이 매우 엄격하여 강을 건너는 사람이 있으면 받드시 주살하였습니다. 기사년(1869, 고종6)과 경오년(1870, 고종7)의 대흉년 이후로부터 몰래 국경을 넘어간 사람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이중하는 두만강이 국경이라는 사실 역시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중하는 왜 청나라 관원들에게는 다른 이야기를 했던 것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한 가지 이유뿐입니다.

이중하는 어떤 식이 되었든간에 청나라의 양보를 받아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 백성들이 두만강을 건너가 남의 나라 땅을 개간한 것은 눈앞의 굶주림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피땀 흘려 개간한 땅을 청나라에 바치고 싶지도 않았고, 그들이 무일푼으로 쫓겨나는 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토문강을 국경으로 해야한다고 우기면 청나라는 결국 뭔가 양보를 해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결국은 이들 월경한 백성들을 무사히 귀국시켜야 한다고 이중하는 생각했습니다. 그 점은 별단초에도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만약 월경을 범한 자가 있다면, 옛날의 율로써 단죄하고 만약 이미 강을 건넌 백성이라면 곧 넉넉한 기한을 정하여 법을 설치하여 회수하십시오. (중략) 그리고 백두산 입구와 두만강가도 마땅히 각별히 잘 살펴서 집안 식구를 이끌고 흘러들어가는 폐단을 일절 엄히 금지시킨다면 민심에 국경을 넘지 않으려는 마음이 생겨서 우리땅에서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이미 강을 건넌 백성들이라도 반드시 다른 지역(러시아를 가리킵니다)에 흘러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위 글을 보면 이중하가 실제로 국경으로 생각하는 것은 두만강이라는 것이 명백합니다. 또한 강을 건너간 백성들을 다시 불러들여야 한다는 방침도 명백하지요. 이중하는 두만강 너머에 평야가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백성들이 자꾸 넘어가면 결국 우리 땅이 텅 비고 청나라 땅만 채워지는 일이 된다는 점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청나라에서 우리나라 백성들을 자국민으로 만들려 한다는 점도 이중하는 알고 있었습니다.

1887년 4월에 2차 감계회담이 열립니다. 이때 조선은 임오군란을 겪은 뒤여서 청나라에 큰소리를 칠 입장이 되지 못했습니다. 청나라는 매우 고압적으로 이중하를 몰아치지만, 이중하는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 것이나 나라의 영토는 줄일 수 없다"라고 역시 초강경하게 받아쳐서 결국 2차 회담도 합의를 보지 못하고 무산되고 맙니다. 이 때도 이중하는 별단초를 올리는데 이것을 보면 회담의 전개방향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중하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말은 더 이상 소용 없다는 것을 알고 전략을 바꿉니다. 청나라는 국경으로 홍단수를 경계로 삼으려 하는데, 홍단수를 경계로 하면 무산 지방의 일부가 청나라 영토가 되어버립니다. 이때문에 이중하는 홍토수를 경계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죠. 그러자 청은 홍토수 중간의 작은 물줄기인 석을수를 경계로 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이중하는 끝까지 홍토수를 경계로 해야 한다고 버팁니다.

즉, 이미 송화강 지류 토문강 건은 2차 회담에서 사라지고 두만강 지류 중 어떤 것을 경계로 하느냐를 가지고 다투다가 회담이 결렬되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88년 3차 감계회담이 예정되었으나 이는 열리지 못하였고 결국 감계회담은 더 열리지 못했습니다.

덧글

  • 아빠늑대 2013/03/13 02:30 #

    외교든 장사든 일단 뻥카를 내어놓고 그 다음에 양보를 하는 것이 순리지요. 이중하의 노련함은 역시 사람이 없지는 않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 초록불 2013/03/13 08:08 #

    이중하는 합병은사금도 거부하고 향촌으로 은퇴하여 묘비에도 대한의 신하라는 점만 밝혀놓지요. 기개도 있고 두뇌도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 슈타인호프 2013/03/13 08:00 #

    2009년에 한참 발악하면서 포스팅하던 생각 나네요 ㅋㅋ

    그때 헤이그 간다던 양반들 지금 뭐하나 모르겠습니다.
  • 초록불 2013/03/13 08:08 #

    간도가 어딘지도 모르는 양반들이 태반이니까요.
  • NoLife 2013/03/13 09:38 #

    간도를 중국이 내줄 리도 없고, 받아올 근거도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간도가 한국땅이 된다면 대한민국이 대한인민공화국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을텐데 어째서 "간도도 우리땅"만 주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그 많은 인구를 추방이나 이주시키고 땅만 낼름 먹겠다는 꿈을 꾸는건 아니겠죠?
  • 초록불 2013/03/13 09:43 #

    알 수가 없습니다...
  • 네비아찌 2013/03/13 10:03 #

    정말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하는 것처럼 보안장벽과 요새화된 정착촌으로 원주민들을 계속 압박하자고요.
  • 허안 2013/03/13 10:12 #

    이중하라는 분 훌륭하신 분이었군요.
  • 초록불 2013/03/13 10:35 #

    회담 내용을 자세히 보면 이중하는 강희제라는 방패를 들고 청나라 관원들을 압박해서 그들의 주장이 관철되지 못하게 하는데, 오늘날에서 보면 키배의 달인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청나라 입장에서 보면 "벽"이란 소리를 들었겠지요. 하지만 나라의 국익이 걸린 문제에서는 외교관이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함은 당연하지요.
  • bergi10 2013/03/13 10:57 #

    멋진 외교관이네요 ㅎㅎㅎ

    근데 청나라의 시작은 만주 아니었나요?
    왜 토문과 두만을 헷갈려했을까요?
  • 초록불 2013/03/13 11:27 #

    이 사람들은 이 지방을 잘 모릅니다. 청나라는 송화강 하류 지역에서 발생해서 중원으로 진출한 뒤에는 자기들 발상지를 신성화하기 위해 봉금지역으로 묶어서 사람들이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된지 100년 이상이 지났으니 잘 알 리가 없었지요. 이 점은 이중하의 보고서에도 잘 나타납니다.
  • 2013/03/13 15:1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3/13 21:3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ttttt 2013/05/08 01:47 #

    잘 읽었습니다. ^^
  • 초록불 2013/05/08 10:07 #

    감사합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유사역사아웃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구글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