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말뚝 괴담의 원조격 이야기 *..역........사..*



태종에서 세종에 이어지는 기간 동안 조선에 뻔질나게 오던 명나라 사신이 있었습니다. 본래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고 있던 내시였죠. 바로 황엄이라는 자입니다. 전설 상에는 원래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증거는 못 찾았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내시로 출세해서 사신으로 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 친구한테도 그런 이야기가 붙은 것이 아닌가 싶네요.

황엄이 한 번은 제주도에 있는 구리 불상을 명나라로 가져가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누군가가 명에서 제주를 염탐하고자 이런 일을 꾀한 것이라고 태종에게 귀띰합니다. 제주도는 원나라 때는 원나라 영토로 편입되었던 곳인지라 조선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불길할 수밖에 없었죠. 태종은 즉시 전라도관찰사 박은에게 명을 내려 불상을 제주에서 가져오게 합니다.

잘 아다시피 조선은 유교 국가이고 특히 조선초에 억불숭유책을 강경히 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박은은 이런 일이 매우 불쾌했지만 어명이라 어쩔 수 없이 시행했습니다. 물론 불상을 받으러온 황엄에게 아부도 떨지 않았고 그야말로 사무적으로 대했지요. 황엄은 아주 잘 삐치는 인물이어서 대단히 불쾌했고 한양으로 돌아와 태종에게 "전하의 충신은 박은 하나더군요."라고 빈정대듯이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박은은 아예 전라도 목사들에게 과도한 향응 따위는 일체 하지 말라는 명까지 내리는데,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아서 나라의 위신을 떨어뜨렸다고 사임을 청하기도 합니다.

제주도의 불상을 가져가려는 이유는 그것이 본래 원나라에서 제조한 것이라 자기들 거라는 것이었죠. 오늘날로 본다면 문화재 반환 청구였던 셈입니다. 또한 명의 황제가 독실한 불교신자라 그걸 원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후에도 우리나라에 있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다 바치라는 요청을 하죠. 태조(이때는 태상왕)는 자신이 보관하던 것을 모두 보내는데, 태조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므로 이것을 내놓으면서 무척 애통해했을 것 같습니다.

반면에 불교를 싫어한 태종은 각 절의 것까지 죄 수거해서 가져다 바쳤습니다. 사리 요청은 그 뒤에도 계속 되어 세종이 즉위했을 때도 상왕 태종은 사리를 거둬서 명에 보내고자 했는데, 이때 신하 중 하나가 부처의 사리는 신라 때부터 내려온 보물로 나라를 보호하는 것인데 어찌 이것을 바칠 수 있겠느냐고 반대합니다. 세종은 이렇게 말하죠.

"그 사리를 바친다고 하여도 우리 나라에는 아무런 재화나 괴변이 없을 것을 보증하겠으니, 경은 염려하지 말라."

우리나라의 지맥을 끊는다는 쇠말뚝 괴담도 저런 식이죠. 사리는 그게 정말 석가모니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최소한 눈에 보이기나 하죠. 대체 그렇게 끊어진다는 지맥이란 게 실제로 있기나 합니까.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으니 문제지만...)

쇠말뚝 괴담이 임진왜란 때 전설까지 올라간다는 이야기는 전에도 했지만.

http://orumi.egloos.com/4555945 [클릭]

이런 이야기의 원형이 될만한 내용이 황엄과 얽혀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황엄은 처녀들을 뽑아서 명나라에 데려가는 일도 했던 터라 당시 백성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만큼 미움을 받은 인물입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이런 식의 우리나라 자체를 해꼬지 하는 일의 주역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남은 것 같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불상을 받으러 나주로 온 그는 가야산 북쪽의 벼랑 아래에 구멍을 팠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용이 산다는 전설이 있는데 황엄이 압승술壓勝術을 펼치고자 구멍을 뚫었다는 것이죠. 압승술이란 주술로 화복의 기운을 내리누르는 것으로 쇠말뚝 이야기나 똑같은 것입니다. 이 벼랑바위를 앙암仰岩이라 부릅니다.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것은 구멍이지 뭘 박아넣은 것은 아니긴 합니다만, 황엄에게 이런 전설이 생긴 직접적인 원인을 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태종실록 6년 7월 16일 두번째 기사에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불상 때문에 나주로 향하면서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인 진원현을 지나가던 황엄이 진원현에 있는 신령스런 나무인 백지수百枝樹에 몰래 구리못을 박았습니다. 이곳의 감무監務 허규許揆가 알아차리고 이것을 뽑은 다음에 계문을 올려 이 사실을 알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황엄이 압승술을 쓴 것이라 의심했다고 합니다.

황엄이 실제로 이런 짓을 했는지는 좀 의문이지만, 당대 사람들이 이런 미신을 믿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네요. 이렇게 신령한 존재에 가하는 주술이 땅에다 행하는 것으로 전이되는 것은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 일이 잘 안 되는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건 참 쉬운 일이죠.

덧글

  • Leia-Heron 2013/03/16 23:37 #

    저번에도 댓글을 달았던거지만
    '산은 자신의 각질에 말뚝이 박히든 말든 신경쓰지도 않았어요 ㅇㅅㅇ'
  • 초록불 2013/03/17 12:17 #

    중세도 아니고 대체 땅에다 쇠말뚝을 박았다고 운명이 바뀐다는 걸 믿다니... 원...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걸 믿는 게 아니라 일제가 그걸 믿고 행한 것이 문제라고 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제가 그런 짓을 했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

    이 새끼, 친일파네...로 돌아온다는...-_-;;
  • Niveus 2013/03/16 23:42 #

    그러니까 지맥에 손을 대려면 적어도 길이 10km정도 되는 말뚝을 박아야(...어!?)
  • 초록불 2013/03/17 12:18 #

    그런 기술력이면 뭘해도 됩니다...^^
  • 검투사 2013/03/16 23:45 #

    이런 환경에도 드라마 <대풍수>가 정말 묻혀버린 건...
    그만큼 그 드라마가 재미가 없었거나(전 딱히 그렇다고 보지는 않지만),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이상 저런 걸 안 믿거나가 아닐까 합니다만... -ㅅ-;
  • 초록불 2013/03/17 12:18 #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런 프로그램이 기획된다는 거 자체가 이미...
  • 지크프리드 2013/03/16 23:53 #

    잘되면 내탓 안되면 남탓은 오래된 전통이었군요.(창밖)
  • 초록불 2013/03/17 12:19 #

    뭐, 저 이야기는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니까 쇠말뚝 이야기는 저보다 후대의...)
  • 아빠늑대 2013/03/17 05:32 #

    지맥에 쇠말뚝 이야기는 이리저리 찾아봤는데 풍수 쪽에서도 오래된 것은 없고 (구전말고...), 주로 민속학들... 중에서 무당들의 것에는 꽤나 나오더군요. 말뚝 보다는 칼이나 무기 같은 상서롭지 못한 것들을 박아 넣는다는 것이 꽤 있더군요. 풍수에도 말씀하신 것도 있고, 들은 것들도 있는지라 이리저리 봤는데 산을 깎아내리거나 큰 굴을 뚫는다거나 하는 경우는 대상이 되던데 쇠말뚝 정도의 이야기는 못 봤어요. 물론 풍수 관련서를 죄다 본게 아니라서 뭐라 하기는 그렇습니다만...
  • 아빠늑대 2013/03/17 05:33 #

    사실 쇠말뚝이 문제가 된다면 집 지을 때 박는 것들은 어찌 봐야 할지...
  • 초록불 2013/03/17 12:19 #

    발상을 뒤집어보면... 사실 우리나라의 번영은 일제가 박은 쇠말뚝 때문이라는... (먼산)
  • Ladcin 2013/03/17 07:11 #

    다만 환경에는 딱히 좋을건 없지만 뽑는것도 나쁘진 않겠죠.
    근데 쇠말뚝 중에는 군 막사용이였다~ 라는 경우가 왕왕있죠
  • 초록불 2013/03/17 12:20 #

    뽑은 쇠말뚝을 분석하면 6~70년대 물건이라는 사실이...
  • 한도사 2013/03/17 11:13 #

    지맥을 끊으려면 지각을 뚫고 맨틀까지 들어가는 쇠기둥을 박아야 합니다. 혹은 토탈리콜처럼 지구핵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으면, 나라의 운세가 바뀔거라고...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지구핵을 뚫었는데, 나라의 운명이 안 바뀔리가...)
  • 초록불 2013/03/17 12:20 #

    부라보!
  • 파랑나리 2013/03/17 23:58 #

    그렇다면 쇠말뚝 전설은 늦어도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거군요.
  • 초록불 2013/03/17 23:59 #

    쇠말뚝 전설의 근본은 "압승술"에 있는 것이니, 이 "압승술"이라는 게 어디서 나왔는지를 추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 ttttt 2013/05/08 01:39 #

    그런 게 문제면 철탑전신주는 어쩔..
    말뚝보다 그걸 믿는 게 더 자기최면아니겠습니까.
  • 초록불 2013/05/08 10:06 #

    그렇습니다. 땅 파는 행위가 모두 문제가 되는 거지요.

    물론 저 사람들은 혈맥에 박는 게 문제인 거라고 항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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