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의 중요성 *..만........상..*



87년 체제라는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헌법이 바뀌고 우리는 87년 체제에 살고 있다. 그 87년에 국민들은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직선제라는 절차를 얻어냈다.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말이 이래서 나온 걸로 알고 있다. 완벽한 민주주의는 아니고 - 세상에 완벽한 게 어딨냐고 하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고 - 절차상으로나마 이제는 민주주의를 할만한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고, 그 때문에 최근에 대법원에서 노태우 정권 당시의 학생운동도 민주화운동에 속한다는 판결을 내놓은 걸로 안다.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것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원칙인 셈인데, 이 말이 사실은 양날의 면도말로 작동한다. 집회 시위에 있어서 폭력적 수단이 동원되면 이에 대한 비난으로도 작동하고, 집회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면 이에 대한 비난으로도 작동한다. 이것은 비난하는 사람들이 가진 정치적 입지에 따른 것이라고는 하나...




나는 솔직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실제로" 정치적인지 잘 모르겠다. 진보라기 보다는 안티 새누리인 사람들의 경우, 실제 행동에서 굉장히 보수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많은데, 보수라고 지적하면 펄쩍 뛰는 경우나, 허구한 날 민주당과 진보세력을 비난하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는 사회민주주의라고 말하며, 자기야말로 진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흔히 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계급과 자신의 이상과 자신의 지식이 일치하여서 확고부동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보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자신의 정치 성향을 진보니, 보수니 하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비슷해서, 나는 경제적 지식이 얕고 정치사상사적으로도 극히 원론적인 것밖에 아는 것이 없다. 때문에 내 사고는 내가 살면서 느껴온 상식에 기초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나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일도 별로 없다. 기본적으로 나는 사건에 대해서 의심하도록 훈련받은 사람이고 그에 기초해서 사고하기 때문인데, 사고를 한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는 일도 별로 없다. 그것 역시 보통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잘도 떠들어도 그것을 어떤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는데, 다시 주제로 돌아가면, 나는 절차의 중요성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에 속한다. 그리고 공권력과 사적인 힘이 부딪칠 때 훨씬 큰 책임을 지는 쪽은 공권력이라고 생각한다. 공권력이란 국민이 국가에 위임한 힘이고, 그 힘은 개개인의 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크다. 공권력은 잘못 휘둘러지면 개인을 압살해버릴 수 있는 큰 힘이라서 스파이더맨에 나오는 명대사처럼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공권력을 규제하는 것은 절차, 절차의 정당성이다.

이번에 국정원의 정치개입 사건 - 선거법 위반을 포함해서 - 의 심각성은 여기에 있다. "종북"이라는 절대악을 상대하기 위해서 절차의 정당성이 다소 무시된다한들 그게 어떻다는 거냐, 라고 말하는 것에는 이런 절차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소중하게 혹은 아슬아슬하게 쌓아온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절차는 일종의 규제인데, 규제라는 것은 불편한 것이다. 인간은 사회를 구성해서 살아가고 있고 따라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 나는 그런 불편함을 가능한한 줄여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줄여나가는 것은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지 절차를 무시하는 것으로 달성하려 해서는 안 된다.

현재까지 나온 이야기로 보면 국정원은 그야말로 지난 정권 내내 사회를 자신들이 원하는 형태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도 그들에게 주지 않은 권한으로 그런 일을 행한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사족 : 나는 국정원이 해왔던 문제의 일들을 보면서 현대는 역시 주제를 감춰야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선전선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국정원은 아주 잘 보여줬다. "소설가로서" 본받아야 할 모범이다.

덧글

  • 2013/06/27 15:4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6/27 16:4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6/27 15:4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6/27 16:4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6/27 15:52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6/27 16:3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6/27 17:1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파리13구 2013/06/27 15:55 #

    일국의 정보기관이 미국의 스노든 같은 사람이 한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밀을 누설하는 정보기관은 모순이라 봅니다.
  • 초록불 2013/06/27 17:15 #

    정보기관은 들키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막 들키고 싶어서 안달을...
  • Mr 스노우 2013/06/27 16:26 #

    공감합니다. 목적이 뭐건간에 최소한의 룰은 지켜야죠.
  • 초록불 2013/06/27 17:15 #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습니다. (한숨)
  • 솔롱고스 2013/06/27 19:44 #

    <때로는 수단과 절차가 목적을 정당하게 한다>. 이 글을 보니까 살다보면서 어느 순간에 떠오른 이 생각을 적습니다.
  • 초록불 2013/06/27 20:51 #

    재미있는 말이군요.
  • 2013/06/27 21:32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6/30 10:5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아자토스 2013/06/27 22:06 #

    많이 무섭더군요.
  • 초록불 2013/06/30 10:54 #

    그렇습니다.
  • Scarlett 2013/06/28 12:07 #

    잘 읽었습니다. 공감이 많이 되네요.
  • 초록불 2013/06/30 10:54 #

    고맙습니다.
  • 훼드라 2013/06/28 19:46 #

    저 같은 경우엔 사실 90년대 후반 햇볕정책과 함께 많이 달라져가는 사회분위기를 보면서
    저희 세대중엔 드물게 제가 너무 '수구꼴통'인것 아닌가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에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되어 주로 그와 관련된 단체들에서
    활동하기 시작한게 그 무렵이고요...

    하지만 정작...가령 조갑제,지만원씨라던가 심지어 뉴라이트하고도 전 의외로
    안 맞는 부분이 많더군요 - 가령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던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을 일일이 다 언급하면 진짜 자전소설
    한편 써야할 분량 나오니 일단 생략하고...)

    다만 근래에는...일베라던가 또는 모씨의 지나친 극우적 행보를 보고
    제가 생각보다 왼쪽(!)에 있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습니다
    한마디로 15년전엔 제가 너무 수구인것 같아 고민했는데...요즘은 제가
    너무 좌경화(?)된것 아닌가...고민중이라는 ^^;;

    근데 근본적으로 제가 보기에도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는 무슨 보수,진보
    좌우 이런것에 대한 대단한 개념정리나 이런게 되어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것
    같더군요

    논점을 좁혀서 이번 NLL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만약, 보수의 가치가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것이라면...절차적 문제점을
    따져보는것이 맞습니다. 그런 관점에선 분명 국정원의 경솔한 행동도
    또 지난 대선 이전에 이미 새누리당 일부 관계자나 국회의원들이 문제
    의 발언록을 봤다면...분명 정치적 책임을 져야할 부분은 있는것 같군요

    하지만...어찌되었거나 이 문제의 NLL발언록을 놓고...잘하면 한동안
    임진왜란 이전의 황윤길,김성일 뺨치는 논쟁이 계속될것 같네요. 똑같은
    발언록을 갖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 훼드라 2013/06/28 19:50 #

    솔직히 전 이 참에 좌우 모두...자신들의 통일관을 좀 더 투명하게
    대중들에게 공개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가만보면 결국 우리사회 보수,진보 또는 좌우간의 상호 불신이 극심한것
    결국...북한을 바라보는 시각과 통일관에서 크게 엇갈리는 부분이 있기
    때문인것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에요

    뭐...우파진영에서 생각하는 통일관은 어쨌거나 누가 뭐래도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이죠. 다만 그 방법론과 과정의 문제엔 각 개인이나 단체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좌파도...차라리 진짜...자신들의 북한관이 뭐고 통일관이 뭔지
    좀 더 국민들한테 솔직하게 자신들의 속내를 드러내는게 어떨까요 ?

    가령...진짜 햇볕정책으로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길 바라는건지
    또는...그 개혁개방 정책을 좀 더 적극적으로 추진 북한을 우리가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는 방향을 생각하는건지

    아니면 남북한 상호 정치체제는 인정한채, 경제,문화적으로 하나가 되는
    경제,문화 공동체의 방향을 바라는것인지

    그것도 아니면...진짜...가령 반미자주 같은 노선의 관점에서 볼땐...차라리
    북한식 1당독재를...차선 정도의 대안 정도로 보고 있는것인지

    그 문제에 대한 불신이 확실히 해소되기 전에는...이와같은 좌우갈등의 골은
    해결할 방법이...그렇게 쉽게 발견되지 않을것 같습니다

  • 2013/06/29 11:2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초록불 2013/06/30 10:57 #

    훼드라님 / 위에 달린 비공개글은 훼드라님에게 쓴 것인데, 보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글루스의 이 비밀답글 시스템은 어떻게 작동되는지 잘 몰라서요.

    통일에 대한 문제는 참 복잡하죠. 사실 80년대 반정부(반체제가 아니라요) 세력의 통일관에 대해서 당시에도 많이 고민을 했는데, "우리 민족이니까 통일은 당연"이라는 것 말고, 이론적 기반을 알아내기가 어렵더군요.

    통일에 대해서는 저로서는 선 북한의 민주화, 후 통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이걸 어떤 정교한 방식으로 설명을 드리기는 현재로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 훼드라 2013/07/01 14:55 #

    초록불 / 지금 댓글 잘 보고 있습니다. 다만 쓸데없이(?) 이것저것 좀 바쁜사람이라 조금 늦게 확인한것 뿐 ^^;;

    비공개 댓글 + 초록불 / 어쨌거나 통일 문제를 비롯 이념,정치등에 관한 논란은 간단히 이야기하기엔 너무 복잡한 문제이니 일단 이 정도로 마무리 하죠. 감사합니다. ^.*
  • 초록불 2013/07/02 10:54 #

    그렇군요. 댓글 작성 밑에 달린 답글은 비공개로 놓아도 댓글 작성자는 볼 수 있는 거군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건데 의심이 많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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