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산 *..역........사..*



동명의 신소설도 있지만 구의산九疑山이란 본래 요순시대의 순임금이 묻혔다는 산에 있는 아홉 개의 봉우리가 그게 그거 같아서 구분하기 힘들었다는데서 나온 말로 "의심스럽다"는 뜻으로 쓰이는 용어입니다.

을미사변으로 국모가 시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왕비 살해범이 누군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추정만 있을 뿐인데, 그것은 당시의 기록이 혼란스럽고 정치적인 이유로 진범을 밝히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범인을 조선인으로 단정하고 사형에 처한 기록도 나오죠.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11월 14일(경술) 2번째기사
피고 박선朴銑은 본래 머리를 깎고 양복 차림을 하고는 일본 사람이라고 거짓말하여 행색이 수상하였다. 개국(開國) 504년 8월 20일 새벽에 일어난 사변 때에 피고가 일본 사람과 함께 반란 무리들 속에 섞여 광화문(光化門)으로 돌입할 때 홍계훈(洪啓薰)이 문을 막고 역적이라고 소리치자 검(劍)으로 그의 팔을 치고는 곧바로 전각(殿閣)의 방실(房室)에 이르러 왕후(王后)의 처소에 달려들었다. 손으로 달비채를 휘어잡고 마루 끝까지 끌고 가서는 검으로 가슴을 찌른 후에 검은 빛깔의 천으로 말아서 석유를 붓고는 불태워버렸다. 이렇게 시역(弑逆)한 절차를 손으로 형용하는 것이 뚜렷하다는 김소사(金召史)의 고발에 의하여 피고를 잡아다 신문했더니, 피고는 줄곧 거부하였지만 궁중 인원들의 많은 눈을 가리기 어렵고 증인들이 분명하게 단언(斷言)하였다.


여담이지만 본문에 나오는 증언자 "김소사"는 "김조이"로 읽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이 증언자가 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군요. 저 이름은 조선 시대에는 아주 흔한 여자 이름에 불과하고...

문제는 저런 이야기는 당시 상황을 전하는 여러 이야기에서도 제일 비현실적인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일단 홍계훈은 총격전 중에 총에 맞아 죽었다 하고, 왕비는 당시에 쉽게 찾지 못해서 일본 낭인들이 온갖 쇼를 벌이고 다녔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죠.

저 판결이 있던 시기는 일본이 정권을 좌지우지하던 때인지라 저렇게 조선인에게 죄를 씌워서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겠지요.

이때 두 사람이 더 사형에 처해지는데 누구냐하면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와 훈련대 소속의 윤석우尹錫禹였습니다. 이주회는 별 일도 없었던 것을 반군과 결탁하였다는 혐의로 처벌한 것이었죠.

그나마 이 두사람은 왕비 시해에 관련이 있어서 처벌을 받은 것이지만 윤석우의 경우는 아예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윤석우는 당시 시체 하나가 불에 타다 남은 것을 발견하고 하사 이만성에게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만성은 나인의 시체를 태운다고 하였는데, 당시 나인이 죽은 바 없기에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합니다. 당연히 이 말부터 거짓말이죠. 당시에 일본 낭인들은 왕비를 특정할 수 없어서 여러 궁인을 죽였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심지어 왕비임을 확인시킨 뒤에 확인한 궁녀 셋도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태운 시체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윤석우는 이 타다남은 시체를 어찌해야 하는지 대대장 우범선禹範善에게 달려갑니다.

"저렇게 가까운 곳에서 시체를 태워서 유골을 남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하자 우범선은 "그곳을 깨끗이 치우고 혹 잔해가 있으면 연못 속에 던져버려라"는 지시를 하였는데 윤석우는 유해를 들고 연못으로 가다가 생각이 바뀌어 오운각 서쪽 봉우리 아래 묻었습니다.

윤석우는 이 시체가 나인이 아니라면 누구일까 의심[원문은 "鹿山煙起處가 竟是九疑山이라"]을 품었기에 이런 행동을 했다고 했지만 재판부는 당연히 그것이 누구 것인지 알면서 한 행동이므로 용서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립니다.

피고가 그날 밤에 군사를 이끌고 대궐로 들어간 것이 비록 장수의 명령대로 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진상이 여러 가지로 의심스러울 뿐더러 녹산 아래의 시체를 피고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으니 더없이 중하고 존엄한 시체에 거리낌 없이 손을 대어 제멋대로 움직인 것은 스스로 크게 공경스럽지 못한 죄를 지은 것이다. - 위 실록에서

그가 사형을 받은 죄명은 "더없이 중하고 존엄한 시체에 거리낌 없이 손을 대어 제멋대로 움직인 것"이었습니다. 만일 윤석우가 왕비의 시신을 땅에 묻지 않았다면 그 유체마저 찾을 수 없었을 것이므로 사실상 윤석우는 큰 공을 세운 셈이지만 최고 존엄에 대한 모독죄로 사형을 받았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말한대로 이런 일은 일본의 장악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기에 아관파천 후에 윤석우는 종2품 군부협판으로 특진됩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건양建陽 원년 3월 13일자)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올 수는 없지만...

덧글

  • alias 2013/07/28 15:36 #

    ...? 왜 소사를 조이라고 읽는 건가요? 그냥 결혼한 여자, 특히 과부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으로 알고 있는데요.
  • 초록불 2013/07/28 15:47 #

    귀찮아서 링크를 안 달았는데...^^

    http://orumi.egloos.com/4796279

    읽어보시면 됩니다.
  • 2013/07/28 16:4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7/28 17:0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swordprime 2013/07/30 14:46 #

    제일 유명하면서도 제일 미스테리한 암살사건인거 같네요...
  • 초록불 2013/07/30 15:52 #

    유명하긴 한데 사실 미스테리한 부분은 많지 않습니다. 범인 패거리는 아는데, 그 중 누구인지 특정하지만 못하는 거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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