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의 증언 *..역........사..*



김열규 선생님 빈소에 다녀왔습니다.

조문을 마치고 나오자 책을 한 권 줍니다.

푸른 삶 맑은 글 - 10점
김열규 지음/한울(한울아카데미)


이 책에는 현대사의 여러가지 증언이 들어있습니다. 쉽게 쉽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재주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금방 읽어낼 수 있는 책입니다.

이기백 선생님 글에도 나오지만 조선어 쓰기가 금지되었던 학교 이야기나, 군국주의 하에서의 고생도 읽을만 하지만 광복 후의 부산 상황은 처음 보는 것이어서 재미있었습니다. 부산을 통해서 재조선일본인들이 빠져나가게 되는데 이들의 짐을 압수해서는 경매에 붙였다고 하는군요. 이 안에서 간혹은 돈도 나왔다고 하니 빼앗긴 일본인들은 피눈물을 흘렸을 것 같군요. 하기야 살아서 돌아간 게 어디냐 싶을지도... 김열규 선생님은 팔 수도 없다고 내팽개쳐버린 책들을 주워모아 열심히 읽었다고 하는데, 책을 좋아하는 제 입장에서는 그 책을 빼앗긴 사람들의 심정이 안 되게 느껴집니다.

또 이 무렵에 일본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의 귀국을 돕기도 했는데 그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그들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처참했다. 걸인 같은 행색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초라한 몰골에는 지침과 굶주림의 빛이 역력했다. 제대로 발을 옮겨놓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병에 찌들대로 찌든 중환자도 끼어 있었다. 세기말의 참상을, 인류의 마지막 날을 보고 겪는 것 같았다. (중략) 우리가 내미는 주먹밥을 받아서 입에 넣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고맙소! 고맙소! 학생들." 울먹이면서 주먹밥을 베어 무는 그들의 손이 떨리고 입이 떨렸다. 그들은 자신의 눈물을 고명 삼아 굶주린 배를 간신히 채워 나가는 것이었다. - 위 책, 95~97쪽

6.25가 일어난 때, 김열규 선생님은 서울대 문리대 학생으로 서울에 있었는데, 다급해진 병사들의 분위기에 놀랍니다.

나는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6.25 전쟁을 남한이 일으켰다는 터무니없는 일부의 주장에 침을 뱉고 싶어진다. 전쟁을 먼저 일으킨 쪽이에서 일요일이라고 병사들을 휴가 내보내다니, 그건 말도 안 되기 때문이다. - 위 책, 121쪽

그 다음날 하숙집 주인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으니 부산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그집 식구들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는데, 그게 마지막 열차였다고 하는군요.

전혀 몰랐는데 김열규 선생님의 아버지는 남로당원으로 월북을 했고 남파 간첩도 몇 번 한 모양입니다. 이 때문에 여러차례 고초를 겪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 끝에 그 연좌제와 얽힌 서강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강대에 재직한 지 20여 년 되었을 때 서울대에서 불렀고 옮겨갈 마음을 먹었는데 그때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때문에 서강대에 남게 됩니다.

근 20여 년 동안 경찰이 나 때문에 학교 당국자를 찾아왔다고 했다. 학교 안에서의 나의 행적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심지어 나의 아버지와 관련된 연좌제를 내세우면서 내게 사표를 받으라고 강요했다는 것이다. 한두 번 그런 게 아니라고 했다. 끈질기게 그랬었다는 것이다. 한데도 미국인 신부인 총장과 교무처장은 경찰의 요구를 거부했다고 한다. 나와 내 아버지 사이의 일은 한 집안의 사생활이라는 것을 내세우더라는 것이다. (중략)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경찰과 말썽을 빚으면서도 내게는 그런 사연은 커녕 눈치도 보인 적이 없는 학교 당국자의 배려가 내 가슴을 쳤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총장과 교무처장을 찾아가서는 엎드려 사과했다. (위 책, 212~213쪽)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많은 뛰어난 인재들을 사장했을지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들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덧글

  • sharkman 2013/10/26 15:02 #

    그러나 역사는 지금 다시 돌아와서 '유신시대가 더 나았다'라고 주절대는 놈들이 권력을 잡고 있지요. 조만간 연좌제와 긴급조치와 계엄령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는 애들에게 맛을 보여줄 듯.
  • 초록불 2013/10/26 15:04 #

    설마 그렇게야 되겠습니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는 해도...
  • 사발대사 2013/10/26 17:03 #

    국어학, 한국학, 민속학계의 거목이셨던 고 김열규 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초록불님의 마지막 말씀을 읽으니 옛날 분당 살 적에 제가 침을 맞으러 다녔던(...) 모 침구원 원장의 말씀이 연상됩니다.

    이북 함경도 출신이고 직접 김일성의 연설을 보기도 했고 월남해서는 모 군 정보기관에 근무했다는 그 어르신 말씀; "일제시대에 조선의 엘리트들은 거의 모두 공산(사회)주의에 빠져서 모조리;;;;; 월북하고 이남에는 쭉쟁이(.........)들만 남았어" "그 대단한 엘리트들이 모두 김일성이 한테 숙청을 당했던 것이지" "그래서 오늘날 이북이 저 모양 저 꼴이 된거야"

    쭉쟁이들이 한국을 이 정도 발전시켰다니...(야!)

    이건 좀 다른 얘긴데 이북에는 함경도와 평안도 간의 알력이 대단한 모양이더군요.
    제가 그 할아버지(...)고향을 잠깐 착각해서 평안도이시냐고 했더니 무지하게 기분나빠하시더라는....얼굴까지 시뻘개질 정도로...(....)

    역시 우리는 한 민족(어이!)
  • 초록불 2013/10/26 20:10 #

    북으로 간 엘리트들의 최후는 생각만 해도 슬퍼집니다.
  • Histudy 2013/10/26 20:12 #

    남한에 경남, 전라가 있다면, 부칸에는 평안과 함경이 있는 것입니까 으헝
  • 零丁洋 2013/10/26 16:49 #

    「한 그루 우주나무와 신화」의 저자인 김열규 교수님이 맞죠. 집에 오래된 주간조선이 몇년치 있는데 어렸을 때 거기에 연재된 신화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명복을 빌어 드리고 싶군요.
  • 초록불 2013/10/26 20:11 #

    맞습니다.
  • 뚱뚜둥 2013/10/26 17:42 #

    http://news.nate.com/view/20131026n05873

    "간첩이 날뛰는 세상보다는 차라리 유신시대가 더 좋았다"라고 간접인용하시는 서강대 전총장님을 오늘 보게됩니다. 신부님이 아니라서 그런가?
  • 초록불 2013/10/26 20:11 #

    학교도 옛날의 학교가 아니에요...
  • 2013/10/26 18:0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10/26 20:1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10/26 20:3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10/26 20:3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누군가의친구 2013/10/27 23:50 #

    다시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허안 2013/10/28 11:33 #

    개념없이 사는 인간들에게나 좋았던 끔직한 시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권좌를 차지했으니 개념없이 사는 것도 지금 시대에는 괜찮은 선택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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