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포스팅은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나온 『북방민족과 중원왕조의 민족인식』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1004년 12월, 송과 요는 "전연의 맹"이라는 조약을 맺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송은 요에 세폐를 바치기로 하고 요는 송을 형의 나라로 인정하기로 한 것이죠. 송은 명분을, 요는 실리를 얻고 양국은 공히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한족"들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오랑캐인 거란족을 형제의 국가로 삼은 것도 못마땅했고, 잃어버린 연운 16주를 되찾지 못한 주제에 세폐까지 바쳐야하는 처지가 된 것이죠. 강경한 측에서는 이런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조정의 처사를 맹비난했으나(왕안석), 현실적인 정치가들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사마광).
재미있는 것은 신법에 반대한 소동파와 같은 인물도 요에 대한 강렬한 거부감은 일치하고 있더라는 점이랄까요. (어쩌면 이런 동류의식이 약간이나마 왕안석을 인정하는 자세로 나오게 된 건지도 모르겠네요.)
송이 요에 보낸 세폐는 처음에는 은 10만냥, 비단 20만필이었는데 1042년에 은 20만냥, 비단 30만필로 올라갑니다. 이것은 상당한 양이었지만 송나라의 재정에 악영향을 줄 만큼은 아니었고 전쟁 비용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부담이 아니라 자존심이었지요. (어쩐지 이런 대목에서는 햇빛정책과 북한 송금문제가 떠오르네요...)
송의 선비들이 느낀 치욕감을 씻어줄 방법은 세 가지였습니다. 셋 다 자기위안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안타깝군요. 첫째는 세폐를 제공하는 것은 탐욕스런 요나라에 대처하는 송나라의 현명함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소철은 이렇게 해서 요나라 거란족의 흉포한 기질이 (재물에 넘어가) 순화되고 있다고까지 주장하죠. 둘째는 정신승리법으로 송나라가 평화를 지켜낸 정의의 사도라는 식으로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라가 평화를 누리는 것은 송나라의 은덕 때문이라고 말하는 거죠. 심지어는 이런 송나라의 태도에 감읍한 요나라가 연운 16주를 바칠 거라는 망상도 나옵니다. 셋째는 요나라를 오랑캐라고 멸시하는 것이었습니다(더불어 한족의 우수한 문화를 대비해 줍니다),
그런데 한족은 송나라에만 살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요나라에는 포로로 잡혀간 한족도 많았고, 연운16주에는 원래 한족들이 살고 있었으니 요나라 안에도 한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 이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여기고 있었을까요?
초기에는 대부분의 한족이 남쪽에 있는 중원왕조를 그리워했습니다. 송나라가 세워진 뒤에는 그 대상이 송나라가 되었고요. 이때문에 요나라에는 협조하지 않았죠. 협조를 해도 어쩔 수 없는 시세에 따른 것이라 기회가 되면 남쪽 한족 왕조로 망명하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요나라의 통치는 오래 계속 되었고 끝까지 현실을 인정하지 않기는 어려웠습니다. 또한 전연의 맹 이후에는 요나라의 강성함을 목격하고(더불어 송나라의 허약함도) 더욱 현실을 인정하는 움직임이 커지게 됩니다.
심지어 한족 관료였던 유육부는 한족의 마음을 사는 계책으로 조세를 낮추는 안을 제안하는데, 그렇다면 모자라지는 세금은 어디서 충당하냐고 묻자...
"송나라를 협박해서 받아오면 됩니다."
라는 획기적인 안을 제출합니다. 그리고 이 제안대로 일이 진행되지요. 후대로 오면서 한족 관료는 요나라를 자신의 나라로 여기고 송을 적대시하기까지 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어쩐지 친일파 논쟁이 떠오르게 되는군요.)
이런 변화에는 요나라가 유교를 존중한 데도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점은 송나라의 선비들이 바라본 바와 같이 요나라의 한화 현상도 분명 있었다는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조심스럽게 보아야 하며 거란족의 한화와 더불어 한족의 호화 현상도 있었기 때문에 문화전파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요나라의 멸망 당시에도 요나라에 끝까지 충성을 바친 한족들도 존재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이미 종족적 관념보다 국가에 대한 관념이 우선시되었던 것이죠.
중국은 최근에 동북공정 등과 같은, 민족 문제에 있어서 매우 비역사적인 발상을 보이며 과거 "이민족"이었던 종족들도 "소수민족"으로 중국에 속한 종족으로 주장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고대사에까지 가져가고 있고, 유교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한화"라는 이름으로 묶어버리려 하는 몰역사적 자세를 보이기도 하죠.
민족 문제 고찰에 있어서 정복왕조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여러가지 시사점을 던져주었습니다. 일단은 이렇게 정리성 글만 적어 놓습니다.
![]() | 북방민족과 중원왕조의 민족인식 - ![]() 류영표 외 지음/동북아역사재단 |
1004년 12월, 송과 요는 "전연의 맹"이라는 조약을 맺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송은 요에 세폐를 바치기로 하고 요는 송을 형의 나라로 인정하기로 한 것이죠. 송은 명분을, 요는 실리를 얻고 양국은 공히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한족"들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오랑캐인 거란족을 형제의 국가로 삼은 것도 못마땅했고, 잃어버린 연운 16주를 되찾지 못한 주제에 세폐까지 바쳐야하는 처지가 된 것이죠. 강경한 측에서는 이런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조정의 처사를 맹비난했으나(왕안석), 현실적인 정치가들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사마광).
재미있는 것은 신법에 반대한 소동파와 같은 인물도 요에 대한 강렬한 거부감은 일치하고 있더라는 점이랄까요. (어쩌면 이런 동류의식이 약간이나마 왕안석을 인정하는 자세로 나오게 된 건지도 모르겠네요.)
송이 요에 보낸 세폐는 처음에는 은 10만냥, 비단 20만필이었는데 1042년에 은 20만냥, 비단 30만필로 올라갑니다. 이것은 상당한 양이었지만 송나라의 재정에 악영향을 줄 만큼은 아니었고 전쟁 비용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부담이 아니라 자존심이었지요. (어쩐지 이런 대목에서는 햇빛정책과 북한 송금문제가 떠오르네요...)
송의 선비들이 느낀 치욕감을 씻어줄 방법은 세 가지였습니다. 셋 다 자기위안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안타깝군요. 첫째는 세폐를 제공하는 것은 탐욕스런 요나라에 대처하는 송나라의 현명함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소철은 이렇게 해서 요나라 거란족의 흉포한 기질이 (재물에 넘어가) 순화되고 있다고까지 주장하죠. 둘째는 정신승리법으로 송나라가 평화를 지켜낸 정의의 사도라는 식으로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라가 평화를 누리는 것은 송나라의 은덕 때문이라고 말하는 거죠. 심지어는 이런 송나라의 태도에 감읍한 요나라가 연운 16주를 바칠 거라는 망상도 나옵니다. 셋째는 요나라를 오랑캐라고 멸시하는 것이었습니다(더불어 한족의 우수한 문화를 대비해 줍니다),
그런데 한족은 송나라에만 살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요나라에는 포로로 잡혀간 한족도 많았고, 연운16주에는 원래 한족들이 살고 있었으니 요나라 안에도 한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 이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여기고 있었을까요?
초기에는 대부분의 한족이 남쪽에 있는 중원왕조를 그리워했습니다. 송나라가 세워진 뒤에는 그 대상이 송나라가 되었고요. 이때문에 요나라에는 협조하지 않았죠. 협조를 해도 어쩔 수 없는 시세에 따른 것이라 기회가 되면 남쪽 한족 왕조로 망명하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요나라의 통치는 오래 계속 되었고 끝까지 현실을 인정하지 않기는 어려웠습니다. 또한 전연의 맹 이후에는 요나라의 강성함을 목격하고(더불어 송나라의 허약함도) 더욱 현실을 인정하는 움직임이 커지게 됩니다.
심지어 한족 관료였던 유육부는 한족의 마음을 사는 계책으로 조세를 낮추는 안을 제안하는데, 그렇다면 모자라지는 세금은 어디서 충당하냐고 묻자...
"송나라를 협박해서 받아오면 됩니다."
라는 획기적인 안을 제출합니다. 그리고 이 제안대로 일이 진행되지요. 후대로 오면서 한족 관료는 요나라를 자신의 나라로 여기고 송을 적대시하기까지 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어쩐지 친일파 논쟁이 떠오르게 되는군요.)
이런 변화에는 요나라가 유교를 존중한 데도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점은 송나라의 선비들이 바라본 바와 같이 요나라의 한화 현상도 분명 있었다는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조심스럽게 보아야 하며 거란족의 한화와 더불어 한족의 호화 현상도 있었기 때문에 문화전파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요나라의 멸망 당시에도 요나라에 끝까지 충성을 바친 한족들도 존재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이미 종족적 관념보다 국가에 대한 관념이 우선시되었던 것이죠.
중국은 최근에 동북공정 등과 같은, 민족 문제에 있어서 매우 비역사적인 발상을 보이며 과거 "이민족"이었던 종족들도 "소수민족"으로 중국에 속한 종족으로 주장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고대사에까지 가져가고 있고, 유교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한화"라는 이름으로 묶어버리려 하는 몰역사적 자세를 보이기도 하죠.
민족 문제 고찰에 있어서 정복왕조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여러가지 시사점을 던져주었습니다. 일단은 이렇게 정리성 글만 적어 놓습니다.
덧글
뒷날 요나라가 여진에게 망했을 때 연운 16주의 한인은 송나라로 가려는 자가 거의 없었던 거 같습니다. 특히 송에 할양되는 6주의 백성들도 전부 정든 고향을 버리고 금나라를 따라 북으로 이주합니다. 물론 이건 금과 송의 조약에 따른 강제 이주이기도 합니다만 와중에 송으로 도망치는 자도 없었다는 건 당시 송나라의 막장 정치가 이미 연운16주의 한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는 얘기겠죠.
근데 연운16주 문제에서 송나라 사대부에게는 16주가 억울하게 상실한 영토일지 몰라도 요나라 입장에서는 군사력을 빌려주고 정당하게 받아온 합법적인 자기네 영토라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뒤에 요나라가 내분에 휩싸인 데다 후주의 세종이 대단히 영용하기도 해서 16주 중에 영, 막 2주를 도로 점령하게 됩니다.(세종은 연운 16주를 완전히 회복하려고 했지만 병으로 사망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게 중국측 입장에서 상실한 영토의 회복이지만 요나라 입장에서는 오히려 정당한 자기네 영토를 빼앗긴 겁니다. 그러니 이를 되찾아야 한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 문제가 결국 전연의 맹에서 송나라는 영, 막 2주의 보유를 요나라로부터 인정받고 대신 세폐 30만을 보낸다는 거였기 때문에 사실 당시 사정을 생각하면 둘 다 적당한 선에서 잘 타협을 했다고 봐야 할 겁니다. 물론 송나라 사대부들에겐 그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던 거 같긴 하지만요.
동양철학쪽에서는 송나라의 정신승리법중 하나로 당대에 이기론이 급발전했다는 설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