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 정의의 중요성 *..역........사..*



용어의 정의는 비단 인문학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중요합니다. 정확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논의가 산으로 가기 때문에 논의가 진행되기 전에 용어를 정확히 정의해 놓는 일은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 되지요.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하면 문제가 되는 용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또한 과거의 잘못된 인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개념이 잘못 전달되어있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의 책 "만주족의 역사"는 첫 시작부터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직 다 읽은 것은 아닌데, 일단 첫머리를 떼어놓아야 할 것 같아서 몇 글자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만주족의 역사 - 10점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 지음, 양휘웅 옮김/돌베개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외국, 특히 구미학자들의 동양사 연구를 시큰둥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 우수한 논문을 보지 못한 탓이 크고, 라이샤워의 동양사 같은 것은 이미 우리 학계에서 우려먹을만큼 우려먹었던 탓도 있어서 그다지 신선하게 보이지 않았는데다가, 역사학자가 아닌 경우에는 잠깐만 읽어도 수없이 많은 오해와 몰이해가 보였기 때문에 서양인은 서양사에는 밝을지 몰라도 동양사에는 젬병이구나, 하는 턱도 없는 생각을 했었죠.

그 후에 훌륭한 책들을 많이 보면서 이런 생각을 접긴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인들의 시각이 우리와는 다른 부분을 가리킬 때는 조금 불편하기도 하고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이 책에도 그런 부분들이 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옮긴이 주에서 잘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전혀 다른 시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각설하고, 일러두기에 나오듯이 이 책은 "만주학, 중국학, 몽골학의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읽기가 편합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써본 사람은 다 알다시피 어렵게 쓰는 것보다 쉽게 쓰는 것이 훨씬 힘들죠.

"만주족의 역사"는 1장에서 역사 용어들을 정의합니다.

저도 전에 부족한 설명을 한 적이 있지만 "타타르"라는 혼란스러운 용어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서양인들은 만주족을 타타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혼란의 근원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사역사학 신봉자들은 이런 면밀한 고증 같은 건 시도하지도 않죠. 자기들한테 유리하다고 판단하면 낼름낼름 주워먹기만 합니다.) 타타르에 대한 내용은 이러합니다.

1. 타타르는 초기 몽골연맹체의 핵심적 구성원 중 하나.
2. 유럽인들은 몽골족을 타타르라 불렀음.
3. 유럽인들은 크림반도와 카프카스 지류 부근에 정착한 튀르크계 민족들도 타타르라 불렀음.
4. 유럽인들은 티무르와 그 추종세력도 타타르라 불렀음.
5. 유럽인들은 만주족도 타타르라 불렀음.

이런 혼동이 일어난 점에 대해서 이야기한 끝에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초기의 만주족을 '유목민'이라고 부를 정도로 몽골족과 만주족을 혼동한 근대 역사학자들의 잘못이 용서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혼동은 대부분 사안을 간략하게 받아들이려 한 그들의 희망 때문이었지, 실제의 무지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 위 책, 26쪽

만주족이 유목민이라고, 청제국을 유목제국이라고 오해하는 일은 지금도 가끔 봅니다. 저는 간단하게 돼지를 기르는 유목민은 없다는 점을 이야기해줍니다. 돼지를 끌고 다니는 유목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므로 이런 이야기를 듣는 순간 대부분의 경우 여진족이 유목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하지만 이런 부분을 설명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이해 안에서 오해를 더 하게 마련이죠.

덧글

  • 다루루 2013/12/30 04:12 #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도 있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당초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칭할 때, 그 범주와 의미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시작하는 것도 있고, 그 이후에도 그런 것에 대해 설명하거나 다루고자 할 때 그것에 대해 확실하게 정해두고 시작해야 화자의 말을 이해하는 데 헛다리 짚는 일이 없을 테니까요. 더 넓게 보면 그런 역활을 하는 온갖 사전도 그래서 중요한 거고...
  • 초록불 2013/12/30 10:52 #

    일본이 개화를 맞이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사전을 편찬하는 일이었다고 들었어요. 대단한 인간들이었다는 생각을 했죠.
  • 다루루 2013/12/30 18:32 #

    정확히는, 서양 학문의 용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번역국'을 설치했다고 들었습니다. 생각나서 찾아보니, 캐나다나 유럽연합도 번역 전담 기구를 운영하고 있다는군요.
  • 루드라 2013/12/30 05:08 #

    서양인은 서양사에는 밝을지 몰라도 동양사에는 젬병이구나, 하는 턱도 없는 생각을 했었죠. <-- 마찬가지였네요. 전 좀 늦게 깨달아서15~6년 전까지만 해도 확실히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뒤에 서양인들이 쓴 동양사에 대한 심도있는 좋은 글들을 보게 되면서 무참하게 박살났지만요.
  • 초록불 2013/12/30 10:53 #

    학술적인 책들은 번역도 잘 안되고 하니까 편견을 갖기 쉬웠던 것 같습니다.
  • Bonobono 2013/12/30 08:36 #

    그래서 어느 분야나(특히 학술 분야) 용어의 통일이 가장 중요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장 먼저, 가장 엄격하게 정의되어야 할 부분인데 어느 분야나 많이 소홀한 거 같기도 하구요.
  • 초록불 2013/12/30 10:54 #

    다 안다고 생각해서 엉터리가 되는 일은 하드웨어 쪽 매뉴얼 같은 걸 봐도 알 수 있죠.
  • 도연초 2013/12/30 12:26 #

    페르시아, 아랍의 역사가들이 몽골, 튀르크의 세력이 중앙아시아 일대에 잘 남아있을 당시에도 몽골인을 '튀르크의 별종이다'라고 한 데 대한 의문이 이 글을 보고 풀렸습니다.
  • 초록불 2013/12/30 13:31 #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 萬古獨龍 2013/12/30 17:55 #

    용어의 개념정의의 문제는
    등서양을 막론하고 그만큼 유목민족들이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는 반증이겠지요.
  • 솔롱고스 2013/12/30 22:40 #

    제목에 나타난 주제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설명하신 얘기도 주제에 일관되게 쓰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호평하는 얘기를 적습니다.

    여담1) 이 포스트 덕분에 하멜 표류기을 보았던 기억을 되집습니다. 하멜 표류기에는 만주인을 타타르로 표기하니까요.

    여담2) 만주인 중에서 유목민으로 볼 수 없다는 얘기에 동조합니다. 특히 '건주 여진'을 초점을 두면서요. 만주인도 몽고인처럼 '변발'을 했기에 유목민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반박할 근거가 더욱 많아 보입니다. 후금, 이어 대청 제국으로 발돋음을 하는 과정을 살짝 살펴도 말입니다.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백성에게 농지를 개간하는 일을 권장했다는 사항 만을 보더라도 만주인의 토대가 되는 건주 여진인은 몽고인처럼 유목민으로 보기가 아주 힘듭니다. 저는 건주 여진인이 기원이 유목민일 이지어도 최소한 농경의 이점을 확실하게 알았다고 판단합니다.

    여담3) 서양인이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역사관도 살피면 좋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했던 맹점을 잘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마냥 믿어서 만을 안된다는 경계를 떨치지 않습니다. '살육과 문명'처럼 사실을 말해도 저들에게만 유리한 점만을 밝힐 수 있으니 그 저의가 의심스럽기 때문입니다.
  • 초록불 2013/12/31 14:37 #

    그러니까 서양 학자들도 다 레벨이 있습니다. 유사역사가로부터 태산준령까지 존재한다는 이야긴거죠...^^
  • pulse01 2013/12/31 12:51 #

    이런저런 매체나 이야기들을 줏어듣다 보면 약간 의아했던 부분이 이런 용어 사용 때문이었군요.

    아하!! 하는 마음으로 하나 깨달았습니다 ㅎㅎ
  • 초록불 2013/12/31 14:38 #

    도움이 된 것 같아 기쁘네요.
  • 迪倫 2013/12/31 13:00 #

    저 역시 처음에는 서양학자들이 한문을 우리처럼 접할 수 있는게 아닌데 하고 좀 개론 수준이지하고 얕잡아봤다가 완전 다른 레벨의 연구들을 보고 뜨악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아무튼 이참에 새해 인사도 끼워넣어서... 초록불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초록불 2013/12/31 14:38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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