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일본 원정 *..역........사..*



여몽연합군이 일본 원정을 단행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런데 쿠빌라이 칸은 왜 해상 전투에 어두운 몽골 군을 일본까지 보낼 생각을 했을까요? 그냥 정복욕이 넘쳐서?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쿠빌라이가 워낙 똑똑한 인물이잖아요.

사실은 이렇습니다.

남송 정벌이 시급한 상황에서 쿠빌라이는 이런 조언을 받습니다.

남송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일본을 초유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진언은 1265년(고려 원종 6년)에 고려 사람 조이趙彛라는 인물에게서 나왔습니다. 조이는 고려인이지만 몽골에서 출세를 한 인물이죠. 경남 함안 출신이라 일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봐야겠죠.

1226년 쿠빌라이는 원종에게 일본에 사신을 보내니 길안내를 하라고 합니다. 예부시랑과 병부시랑이 사신으로 가지요. 말은 서로 통교하자고 되어 있으나, 조서의 내용은 협박성이었습니다. 통교 안 하면 재수 없다는 정도라고나 할까요.

고려는 긴장합니다. 그런 말에 순순히 통교할 나라가 있을 리도 없고... 문하시중 이장용은 몽골 사신들에게 편지를 보내 만류하는데,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일부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일본은 바다로 만 리나 떨어져 있으며, 가끔 중국과 서로 내왕하기도 하나 해마다 공물을 바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중국도 그들을 논외로 쳤으며, 만약 찾아오면 그들을 위무하고 떠나가면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이는 그들을 얻는다 해도 교화에 이익됨이 없고 버리더라도 황제의 위신에 손상됨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천자께서 위에 계셔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이 모두 다 신하가 된 판국에 저 벌레같이 무지하고 하찮은 오랑캐가 어찌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벌이나 전갈 같은 미물의 독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천자의 국서(國書)를 내리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못됩니다. 수나라 문제(文帝) 때 저들은, ‘해 돋는 나라의 천자가 해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글을 보내노라.’는 교만하고 명분을 모르는 글을 보내기까지 했으니, 어찌 옛날 버릇이 남아있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국서를 보냈다가 만약 교만한 회답에 불경한 언사까지 쓸 경우, 내버려둔다면 조정의 허물이 될 터이고, 저들을 정벌하려고 하더라도 바람과 파도가 험난하여 황제의 군대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것입니다.

원래 일본에 가기를 좋아할 리 없었던 사신들은 일본에 가는 시늉만 하고 몽골로 돌아가버립니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1270년까지 다섯 번이나 사신을 다시 보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일본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다섯번 째에는 천황을 만나 통보하겠다고 나섰는데, 거부 당했습니다. 당시 가마쿠라 막부를 지배하고 있던 호조 도키무네는 이미 1차 통보 때부터 격분한 바 있으며 이에 따라 몽골 침입에 대비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1268년부터 고려는 몽골의 요구에 따라 병선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 때는 이 병선들이 남송을 치는 것인지, 일본을 치는 것인지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일본 정벌로 가닥이 잡혀가기 시작했습니다.

쿠빌라이 입장에서 "듣보잡"인 일본이 감히 통교의 권유를 뿌리치니, 가만 둘 수 없었겠죠.

고려는 여전히 일본 정벌을 말리려고 했습니다. 5차 초유사이자 1272년 마지막 6차 초유사로 다녀온 고려 사신 조양필은 쿠빌라이에게 일본을 쳐야 얻을 게 없다고 직언을 올립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이 1274년 결국 여몽연합군이 발진합니다. 이후 경과는 여기서 논하지 않습니다. 전쟁 후에 일본도 고려 정벌을 하겠다고 잠시 준비를 하다가 포기하는 상황이 있었죠.

원종은 원정 직전에 죽었고(이 때문에 원정이 3개월 미뤄졌습니다), 그후 충렬왕이 즉위했죠.

쿠빌라이는 남송 정복이 막바지였던 1275년에 일본에 또 사신을 보냅니다. 호조 도키무네는 이들 사신 다섯 명을 모두 죽여버립니다. 이들의 처형 소식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279년에 다시 사신이 가지만, 이때도 바로 처형되어버립니다. 몽골 입장에서도 이제 안 쳐들어갈 도리가 없네요. 자국 사신이 참수 당했는데도 내버려 둘 수는 없었겠죠.

이 2차 일본 정벌에 있어 충렬왕은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충렬왕은 원정이 끝난 다음 해에 김방경을 쿠빌라이에 보내 이런 호소를 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충렬왕 원년(1275) 을해년 봄 정월 경진일
만일 또 다시 일본 정벌을 일으킨다면 저희나라로서는 그에 필요한 전함과 병사들의 양식을 더 이상 공급할 능력이 없습니다. 나라가 피폐하여 부지할 수 없게 되니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황제께서 직접 보지 못하셨으니 당연히 어찌 그 지경까지 이르렀겠느냐고 하실 것이지만, 저희의 지극한 정성을 받아주시고 간절한 이 호소를 양해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런 충렬왕이 적극적으로 변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슨 말로도 몽골의 야심을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말리다가는 눈밖에 날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때 자칫 잘못하면 홍다구와 같은 부원배들이 고려 조정을 말아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2차 원정은 멸망한 남송의 병선과 인력이 주가 되어서, 고려 쪽의 부담은 조금 덜한 편이었습니다. 이런 전략도 충렬왕 측에서 고려했을 가능성이 있겠죠.

그것은 고려사에 나오는 충렬왕의 일본 원정 조건에서도 살필 수 있습니다. 충렬왕은 일곱 가지 조건을 제시하는데, 그 중에는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 고려군과 한족군의 병력을 줄이는 대신 토리티무르[闍里帖木兒]를 시켜 몽고군을 더 징발하여 출정시킬 것.
- 홍다구의 직임을 더 높이지 말고 전공을 세운 이후에 포상할 것과 토리티무르와 고려국왕에게 동정성사(東征省事)의 지휘를 맡길 것.
- 중국 연해지역민들을 뱃사공과 선원으로 충당할 것.


입으로는 출정을 떠들면서 실속을 챙기려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보여지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해도 당연히 대규모 원정의 부담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덧글

  • 아빠늑대 2014/02/28 18:51 #

    대규모 원정은 수륙 어디서나 모두 부담이겠지만, 서양이나 동양이나 해양 원정은 그야말로 돈 먹는 기계더만요.
  • 초록불 2014/03/01 10:53 #

    그렇죠. 원정군 규모를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죠...^^
  • 2014/02/28 19:44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3/01 10:5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dunkbear 2014/02/28 20:26 #

    고려에게 있어서 진짜 부담은 공민왕-우왕 시절로 이어지는 왜구침략으로 나타났지만요... 쩝.
  • 초록불 2014/03/01 11:05 #

    뭐, 그 시절에는 북으로는 홍건적도...^^
  • 다루루 2014/03/01 00:26 #

    부산에서 날씨만 맑으면 보이는 게 쓰시마고 난징에서 나가사키까지 1000여 킬로미터인데, 1만리면 거의 4천여 킬로미터. 어디 대몽고의 사신 앞에서 거짓부렁을!

    뭐, 당연히 말이 그렇다는 거겠지만요. 당시에 해상 측량 기술이 있었을 거 같지도 않고. 근데 진짜 너무 노골적으로 가기 싫다고 말하는 게 보여서 찍히지나 않았을라나 싶을 정도네요(...
  • 초록불 2014/03/01 11:06 #

    일단 뻥을 친 뒤에...^^
  • 재팔 2014/03/01 01:31 #

    일본 대하드라마에선 무려 충렬왕 앞에서 "선물로 병선을 달라"는 대칸이 나오셨습죠 ㅋ
    물론 그 뒤에는 "몽골의 요구를 거역하면 우리 고려는 멸망하무니다"(재일교포 배우라 억양이..)라고 일본 상인 앞에서 샌드백 타령하는 고려 사신도.. 그러고보니 그 드라마의 조양필은 중국 관복 입은 몽골 대신으로 나오더군요.
  • 초록불 2014/03/01 11:06 #

    조양필이 몽골 대신이라니...
  • 역사관심 2014/03/01 12:02 #

    왜가 수에게 보낸 헛소리는 이미 유명했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 초록불 2014/03/01 17:45 #

    일제강점기에는 저걸 교과서에 실어놓고 자랑했다고 하죠?
  • 의성 2014/03/03 13:02 #

    좋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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